까였다.
그것도 1년 정도 짝사랑한 김태형한테. 그 1년이라는 긴 긴 시간이 단 1분만에 종결되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미안.. 너무 당황스럽다. 랜다. 1년간 날 흔들어놓고, 고작 저 한 마디로 날 병신 만들었다. 쉽게 까는 거 보니까 나한테 관심이 없었던게 확실해졌다. 그냥 나 혼자 삽질한 거라고 치기엔 내가 너무 마음을 줬고, 바로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이였다. 그냥, 내 모든 오장육부를 설레게 하는 사람이였다. 까일 거였음 내가 왜 고백했는지 아직도 후회된다. 그냥 해봐, 걔도 너한테 마음있을지 누가 알아. 라며 나를 꼬드겼던 박지민의 말이 화근이였다. 차라리 고백 안했더라면 친구로는 남았을텐데, 하며 축 쳐져있던 와중에 전화 한통이 왔다. 박지민이였다. 전화고 뭐고, 숨 쉬기도 짜증날 지경이라서 좀 늦게 받으니 존나 걱정하는 척을 한다. 무슨 일 있냐? 왜 이렇게 늦게받아. 없어. 에이 있는 것 같은데. 있으면? 술 사주게? 바로 승낙하는 박지민에 후드집업만 걸치고 집을 나섰다.
집에서 3분 거리에 위치한 포장마차에 들어가니 박지민의 얼굴이 보였다. 날 보고 놀란 눈치다. 야 그게 뭐야, 심각하네. 한결같은 어이없단 얼굴로 날 쳐다보는 박지민을 무시하고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 너 보러 오는데 내가 꾸며야 되냐? "
"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될 것 아냐, 저 거 봐라 저거... 말을 말아야지. "
" 뭘 말을 말아, 술이나 말아. "
그래도 내가 까인 걸 아는 터라 금세 닥치곤 안주를 시켰다. 내가 그렇게 거지꼴인가. 크고 흰 티셔츠랑, 대충 묶은 똥머리, 트레이닝복 바지에 회색 후드집업이 끝인 차림이였다. 게다가 민낯, 초췌한 면상까지. '박지민 만날 때의 look' 으로서 딱이였다. 아무리 10년 친구라도, 여자고 남잔데.. 라며 궁시렁대는 박지민에, 술잔을 쾅 놓으며 말했다.
" 잔말말고 따라라, 나 상태 안 좋은 거 알지? "
" 야, 모르면 내가 술 사겠냐! "
박지민이 사람 좋게 웃어댔다. 그래, 니가 사는 거니까 맘껏 취해야지. 꽤 늦은 시간이였어서 그런지 술이 잘 들어갔다. 내가 원래 낮술 못해서 그런가. 벌개진 얼굴로 까인 얘기를 늘어놓았다. 뭐가 뭔지도 몰랐다. 사실 나 술 못한다. 그냥 스트레스 받으면 몇 잔 먹고 마는데 오늘은 달랐다. 존나 마시고 죽자, 하며 부어댔다.
" 야.. 내가, 끅, 어떤 샤람을 조와하는지를 아냐? "
꼭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주인공이 취하고 행패부리는 것 처럼, 딸꾹질을 해대며 겨우 말을 이어갔다. 술이 들어가니까 얼굴이 두꺼워졌다. 손을 막 써가며 말했다. 그러니까, 김태형은 그 새끼는 진짜로, 어?, 나를 내가 속상하게 만들었어 걘. 어? 라는 정체불명의 말도 나불댔다. 박지민이 한숨을 쉬며 내 머리를 테이블로 내렸다.
" 그냥 자라, 좀. 개소리 하지 말고. "
난 누워서도 나불댔다. 그래, 김태형은 내가 우습겠지.. 그냥 어항에 있는 물고기들 중에 있는 튼튼한 붕어 정도 였을라나. 말하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참, 내가 나를 한탄하고 있으니까 너무 애잔했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박지민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눈 마주치니까 고개를 조용히 떨군다. 어지간히 신경쓰였나보네. 살짝 웃으며 야, 인상펴. 니가 차였냐? 라 하니까 미안.. 이란다.
" 뭐가 미안해, 니가. "
" ..사실 나, 너랑 김태형이랑 안 될 거 알고 있었어. "
말문이 막혔다. 순간 내가 잘못들었나 했다. 멍청하게 어? 하며 되물으니까 박지민이 여전히 고개를 들지못한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야.
" 그래서 고백하라한 거고, 일부러 전화한 거야. 지금 말해서 미안.. "
" 야. 아니,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가지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냐? 이유라도 들어보자. 나한테 뭐 복수할 거 있었냐? "
그런게 아니고, 김태형 원래 질 안 좋은 애야. 내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더 듣기도 싫었다. 무슨 개소리래. 내가 1년동안 봐온 모습은 다 연기였고 지랄이였단 말이네 그럼. 박지민의 구차한 변명 때문에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막장드라마에 나오는 악녀처럼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며 따지고도 싶었다. 근데 지금은 내가 취한 상태고, 지나면 꿈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애써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달래봤다. 자리에서 일어나니까 앉으라고도 안한다. 아니 못하는 거 겠지.
그 모습이 더 웃겨서 포장마차를 빠르게 빠져나왔다. 나오면서 왜 눈물이 나는 건지 몰랐다. 까인게 떠올라서? 친구가 배신해서? 좋아하던 애의 충격적인 본모습 때문에? 내 생각엔 다 아니였다. 그냥 내가 너무 비참해서. 이게 맞았다. 편의점에 들러서 맥주를 존나 품에 넘치게 담고 계산하는데, 손님이 들어왔다.
시발, 전정국이였다.
전정국은 내 친한 동생이다. 애가 좀 순진무구하게 생겼는데 되게 차분하다. 그리고 어리다. 스물 셋 밖에 안 됐다. 존나 부럽다 나는 벌써 스물 일곱인데. 인기도 열라 많고 좀 잘생긴 놈인데 애가 철벽이 장난 아니다. 근데 나랑은 좀 친하다. 모순인 것 같은데 암튼 친하다. 접때 내 성격이 좋다고도 그랬었다. 얘 얘기를 조금 하자면 전정국 친구중에 시끄러운 애가 있는데 아마 호섭인가 호석인가 그럴 거다. 얘가 막 난리를 치면서 누나, 누나랑 정국인 천생연분같아요. 둘다 순하게 생겼는데 성격은 막 쎄고요, 궁합도 안 본다는 4살차이잖아요. 얘 어때요? 라며 노래를 불러댔다. 그 때마다 전정국이 그 친구한테 그만하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내곤 나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왜 사과를 하니,별로 기분 안 나쁜데. 라고하니 살짝 미소지을 뿐이였다. 얘를 존나 모르겠다.
암튼, 편의점에서 만났다. 전정국이 존나 놀라서 들어온다. 하긴, 누가 봐도 진풍경이지. 평소에 좀 쎈 누나가, 이렇게 초라하게 눈가는 빨개가지고 술을 사고 있는데. 게다가 몹시 후리하게, 누가봐도 차인 애처럼. 알바생이 계산 다 했다며 봉투에 담아드릴까요 묻는다. 근데 난 전정국이랑 서로를 보고있어서 대답을 못했다. 알바님 죄송
" 누나.. 울지마요. "
여기서 존나 내 눈물샘을 자극시켰다. 보통이면 왜그래요 왜 울어요 라던지, 무슨일있어요 라는 말이 나오는데, 얜 이유를 묻지않는다. 감동이라면 감동이였다. 배려심 쩌네, 생각했다. 다가와서는 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살살 두드려준다. 손 치워내고 괜찮아. 라 했다. 솔직히 안 괜찮다. 달래줄 인간이 절실했다. 알바생이 눈치보다가 한 10캔정도 되는 맥주들을 봉지에 집어넣으니까 전정국이 말린다.
" 저기요, 이거 계산 취소해주세요. "
" ? 아뇨 계속 담아주세요. 뭔 취소야. "
" 이걸 다 마시게요? 예전에 지민이형한테 들었어요, 누나 술 못한다며요. 한 캔만 사요. "
... 입술을 꾹 닫았다. 박지민은 애한테 쓸데없는 얘기를 해. 눈물이 차올랐다. 이윽도 뚝 떨어졌다. 왜 우는지 이유도 필요없었다. 애증의 박지민 때문인 건 확실했다. 10년동안 츤츤대며 뒤에서 나를 챙겨주면서 오빠같이 든든했던 박지민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진짜 김태형이 그런 애 인가? 확실히 박지민의 태도는 진심이였다. 근데, 혹시나-, 하는 멍청한 미련을 못버리는게 사람이라고. 난 아직도 김태형을 신뢰하고, 한 구석에서 좋아하고 있었다.
전정국이 진짜 딱 한 캔을 계산하고 내 손을 잡아 편의점을 나왔다. 묵묵히 앞장서는 전정국의 뒷 모습이 꼭 김태형같았다. 김태형이라도 이랬겠지. 술 마시지말라고 나를 말렸겠지. 만약 내가 고백 안했으면 내 앞이 얘가 아닌 김태형이였을라나. 쓸데없는 망상을 했다. 여름인데 바람이 찼다.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뜨거웠다. 전정국이 하염없이 동네를 빙빙 돌았다. 어디 가냐 물으니까, 누나 마음 정리 되면, 그 때 데려다줄게요. 지금 아님 못 울 걸, 창피해서. 라며 날 배려해준다. 전정국의 말에, 나도 모르게 소리내며 막 울었다. 나쁜새끼 라는 단어들도 막 나왔는데 전정국은 끝까지 내 손을 꼭 잡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내심 고마웠다. 진정되고나니까 어느새 해가 뜨려했다. 울 땐 정신 없었는데, 진정이 되니까 여러 생각들이 오갔다. 얼마나 생각을 많이 했냐면 맥주 김빠졌겠다 라는 생각까지 했다. 박지민이랑 새벽늦게 만난 건 맞는데, 시간 진짜 빨리가네. 말 없이 노을을 빤히 쳐다보며 계속 걷는데, 전정국이 말했다.
" 예쁘다, 그쵸. "
순간 밀려오는 민망함에 대답을 못했다. 표정은 경직되었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머릿속에선 다양한 욕설들이 신나게 뛰놀고 있었다. 아 씨댕, 내가 왜 그랬지. 아무리 친하다 해도, 박지민이였어도 쪽팔릴 상황인데 그게 전정국이라니. 후회가 밀려왔다. 김태형에게 까인 그 순간 보다도 더 쪽팔렸다. 새벽 내내 걸으며 내 울음과 지랄을 다 받아준 전정국이 야속하기 까지 했다. 나 말리지..
" 정국아. "
" 네. "
" 어, 내가 일단 미안하고, 어 그렇네. 응 할말 없어 미안. "
담담하고 쿨한데 굉장히 쪽팔린 티가 나는 내 말에, 전정국이 뒤돌아보며 씩 웃었다. 새끼, 잘생겼다. 눈 마주치니까 더 경직 됐다.
" 저 지금 기분 되게 좋아요. "
" ? "
" 누나 힘들 때, 옆에 있어준게 나라서. "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어..그래..고마워.. 라 하니까 전정국이 헤헤 웃으면서 내 머리를 빠르게 쓰다듬었다. 존나 뭐지, 이게. 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전정국이 내 옆에 섰다.
" 이제 가요.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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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