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을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고소한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부엌으로 졸래 졸래 걸음을 옮기자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분히 내려 앉은 검은색 머리, 하얀 셔츠, 그리고 회색 정장 바지. 먼저 일어난 김태형은 마치 제 집인 것처럼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계란 후라이를 하는 건지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후라이팬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김태형을 잠깐 바라보다가, 식탁 의자를 조심스레 빼내어 앉았다.
"어."
소리를 들은 건지 김태형이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일어났어요?"
"응. 일찍 일어났네?"
"저야 뭐, 원래 아침형 인간이잖아요."
김태형의 말에 푸스스 웃자 김태형이 하얀 접시에 계란 후라이를 담아 식탁 위로 내려놓았다. 조촐하긴 하지만 그럴듯한 아침 밥상을 둘러보고 있으니 김태형이 내 맞은 편에 슬그머니 앉았다. 그리곤 날 바라보았다.
"누나."
"어?"
"화장도 했어요?"
김태형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손을 올려 괜히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그냥 뭐…. 시간이 좀 남아서."
"평소엔 화장같은 거 잘 안 하고 다녔잖아요."
"여자들은 가끔 화장 하고 싶은 날이 있기도 해."
내 말에 킥킥 웃은 김태형이 내 앞에 놓여져 있던 숟가락을 들어 내게 내밀었다. 얼른 먹어요. 이러다 늦으면 어떡해요. 김태형의 말에 옆에 걸린 시계를 잠깐 바라보았다가, 얼른 내민 숟가락을 받아 들었다.
한 입, 두 입 우물거리던 내 시선이 문득 김태형의 셔츠에 닿았다. 넥타이를 하지 않은 김태형의 셔츠 목 부분에는 어제 본 것처럼 단추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다른 단추는 가지런히 잠근 채로, 의도하지 않게 노출된 김태형의 목을 잠깐 바라보다가 물었다.
"병아리."
"네?"
"셔츠, 그러고 갈 거야?"
내 물음에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의 끝을 가볍게 문 김태형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떨어진 단추가 있긴 한데 달 줄 몰라요."
"어렵지 않잖아."
"해본 적 없어서."
말을 마친 김태형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씩 웃으며 물었다.
"누나가 달아주면 안 돼요?"
김태형의 말에 힐끔, 김태형을 바라보았다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저 웃음. 저 웃음, 저 놈의 웃음. 전부터 늘 봐오던 웃음이었지만 이상하게 저 웃음에는 당할 수가 없다. 그건 김태형도 알고 있는 듯 했다. 뭐라고 표현을 하기 애매했지만 저 웃음은, 뭐, 말하자면 무장해제를 시켜버리는 그런 웃음이었다. 홀라당 녹아버릴 정도의 웃음.
나는 애꿎은 반찬을 젓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웅얼거리듯 답했다.
"…그렇게 좀 웃지 마."
"왜요, 너무 잘생겼어요?"
"넌 가끔 보면 정말 별로야."
"제가요?"
"그래. 넌 네가 잘생겼다는 걸 알고 있어서 재수 없어."
돌려 말할줄 모르는 내가 던진 말에 김태형이 킥킥 웃었다. 별로 상처를 받은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숟가락으로 밥을 입에 넣는 김태형을 힐끔 바라보던 내 시선이 다시 김태형의 목에 닿았다. 아, 신경 쓰이잖아….
꾸역꾸역 밥을 입 안으로 밀어넣은 나는 김태형보다 먼저 그릇을 비웠다. 쥐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자 김태형도 금세 다 먹은 건지 나를 따라 숟가락을 내려 놓았다.
"옷 벗어봐. 단추 달아줄게."
내 말에 김태형이 "어, 진짜요?" 하고 되물어왔다. 그런 김태형에게 다 먹은 그릇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벗어. 시간 얼마 없어."
"알았어요."
짧게 대답을 마친 김태형이 그 자리에서 셔츠를 벗….
"야!"
"네?"
"여기서 벗으면 어떡해!"
"그럼 어디서 벗어요."
"들어가서 벗어. 정국이 방에 가서 벗고, 거기 있는 티셔츠 아무거나 입고 나와."
내 말에 김태형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날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뭐 하러 그래요. 시간도 없다면서, 그냥 여기서 벗고…."
"아, 좀! 얼른! 들어가서 벗고 나오라니까."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부끄럽기라도 해요, 누나?"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물어오는 김태형의 모습에 입을 꾹 다물었다. 내 행동에 웃음이 터진 김태형이 피식 웃곤 저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 몸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잖아요."
김태형의 말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말이 조금… 묘하잖아! 사실 김태형의 말은 사실이었다. 전정국, 나, 김태형 셋이서 계곡이며 바다며 놀러간 적이 수없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봤던 몸이었는데. 정말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던 그런 몸이었는데….
새삼스럽게 이러는 게 이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몇 개 풀다 만 셔츠 사이로 보이는 김태형의 가슴팍에 도무지 눈을 둘 수가 없었다.
"얼른 들어가서 셔츠 벗고 나와. 얼르은."
칭얼대듯 말한 나는 전정국의 방을 향해 김태형을 등 뒤에서 쭉 밀었다. 내 미는 힘에 마지 못해 움직이던 김태형이 갑작스레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놀란 내가 김태형을 올려다보자, 김태형이 뒤를 돌아 저를 밀고 있던 내 양 손목을 잡아왔다.
"생각할 수록 이상해요."
"…뭐, 뭐가."
"갑자기 왜 이렇게 당황했어요, 누나?"
"당황 안 했어."
"볼도 좀 빨개졌잖아요."
"아냐."
"아니긴."
"……."
씨이…. 나도 대체 왜 이러는 지 모르겠단 말야, 이 병아리야. 나도 새삼스럽게 김태형이 불편한 이유를 모르겠다. 전정국이랑 같은 놈인데. 동생 친구, 아니 따지고 보면 친동생과도 같은 놈인데.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김태형이 피식 웃으며 조금씩 내 얼굴을 향해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꼭 전날 밤 처럼.
그리고,
꼭 내게 키스라도 할 것처럼.
다가오는 얼굴에 당황한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떨어지지?"
"누나. 겁먹었어요?"
"……."
"왜요."
"……."
"제가,"
"……."
"…무슨 짓이라도 할까봐?"
점점 더 내게 가까워지며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김태형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 좀 다가오란 말이야.
잠깐의 정적.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태형이 정적을 깨고 킥킥 웃으며 내게서 멀어졌다. 나를 잡은 손목을 풀어낸 김태형이 옆에 걸린 시계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 짓도 안 할 거니까 눈 떠요. 이러다 늦어요, 우리 둘 다."
김태형의 말에 조심스레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나를 내려다보고 웃는 김태형의 모습에 왠지 모를 창피함이 밀려왔다. 나, 눈은 왜 감은 거야…. 잠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이리 저리 굴리다가, 그대로 휙 뒤를 돌았다. 먼저 걸음을 옮긴 내가 쇼파 위에 올려둔 가방을 잡아 채며 웅얼거렸다.
"…단추는 네가 달아."
먼저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태형이 반쯤 풀어헤친 제 셔츠의 단추를 다시 잠그며 내게 소리쳤다.
"같이 가요, 누나!"
Oh my boss 3
부제 : 왠지 모르게 서운해
엘리베이터에 탄 나는 두 개의 층을 눌렀다. 7층, 그리고 본부장실이 있는 9층. 아무렇지 않게 거울을 보며 앞머리를 정리하는데 김태형이 갑작스레 9층 버튼을 꾹 눌러 껐다.
"…에? 그건 왜 꺼?"
"9층에 갈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요."
"너 9층에 가야하잖아."
내 말에 김태형이 어깨를 으쓱 했다.
"어젠 본부장실 정리가 덜 되서 그런 것 뿐이에요. 저만 9층에 동떨어져 있는 것도 웃기잖아요. 본부장이라면 제 사람들과 소통할 줄도 알고 그래야 하…."
"잠깐, 잠깐만!"
"네?"
"뭐야. 그렇다는 건 너도…."
말끝을 흐린 내가 김태형을 바라보며 겨우 말을 이었다.
"7층에 있단 거야?"
내 말에 김태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웃는 김태형과는 다르게 내 얼굴은 눈에 띄게 일그러져갔다. 차라리 다른 층에 있는 것이 다행일 뻔 했는데. 덜 마주쳐도 될 거라는 생각에 그나마 다행이다, 안심하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웃기긴 했다. 같은 부서의 본부장이 혼자 9층에 떨어져 있는 것도 웃겼다.
어제는 왜 이걸 몰랐을까…. 김태형이 본부장으로 온 게 너무 충격이 커서, 다른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걸까.
생각이 많아진 내가 입을 꾹 다물자 김태형이 날 힐끔 바라보았다.
"정신 차리세요, 탄소 씨."
"…어?"
"여긴 회사잖아요. 그렇게 정신 놓고 있다간 분명 한소리 들을 겁니다."
갑작스레 달라진 김태형의 목소리. 조금은 딱딱해진 목소리에 김태형을 힐끔 바라보는데 어느새 7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서류를 전달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소은이가 나와 본부장님을 보곤 어, 하고 반가운 소리를 냈다. 덕분에 우리 둘의 시선이 소은이에게로 닿았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김태형을 향해 가볍게 몸을 숙인 소은이는 내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런 소은이를 향해 고개를 까딱인 김태형은 가벼운 걸음으로 먼저 부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김태형을 따라 졸졸 걸음을 옮기던 나를 붙잡은 것은 소은이였다.
"언니!"
"어?"
"본부장님이랑 같이 출근하신 거에요? 시간도 아슬아슬한데, 어떻게 둘이 같이 와요."
뭐야, 뭐에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날 잡고 물어보는 소은이의 물음에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같이 오긴.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거야."
"그래요? 무튼 언니, 놀랐다구요. 평소엔 그렇게 일찍 출근하던 사람이 오늘은 9시가 다 되도록 오질 않으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요."
"늦잠을 좀 자서 그래. 너 어디 가려고 했던 거 아냐?"
"아, 맞다. 이거 전해줘야 하는데 깜빡 했다."
내 말에 소은이가 웃으며 다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7층에 머물러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 탄 소은이가 "조금 있다 봐요, 언니." 하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출근했는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퇴근이 그리워졌다.
Oh my boss 3
부제: 왠지 모르게 서운해
김태형과 같은 회사, 같은 층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몇 일이 흘렀다. 김태형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일에 적응하고 있었다. 아니, 정정. 김태형은 무서울 정도로 원래의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아버지 빽만 믿고 본부장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김태형이 손을 대는 것들 마다 성공했다.
모든 게 완벽한 김태형에게서 딱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고르라면, 김태형이 회사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였다. 병아리일 때와는 전혀 다른 딱딱한 말투, 차가운 표정. 벌써 김태형에게 혼이 난 것도 몇 번이었다. 기획안은 내는 족족 까였고, 보고서는 쓰는 족족 다시. 웃음기 없는 싸한 표정의 김태형은 지금까지의 여느 (재수 없는 직장 상사) 본부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맡은 일에 있어선 칼같이 날카로워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병아리만 보던 나는 이런 김태형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몇 년을 병아리 모습만 봐왔는데, 갑자기 이런 무서운 모습이라니…. 첫 날 이후로 김태형과 집에 같이 간 적도 없었다. 이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김태형은 일이 많았고, 나 또한 일이 많았으며, 김태형의 집과 우리 집은 정 반대 방향이었다.
게다가 밥은 회사 식당에서 먹지 않는 건지, 점심, 저녁 시간에도 얼굴을 보기가 도통 힘들었다. 하긴 마주쳐서 뭐 해…. 그래봤자 무서운 본부장님일게 뻔한데.
수정한 보고서를 들고 본부장실의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김태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하는 짧은 대답에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셔츠를 입은 김태형이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점심으로 먹은 건지 샌드위치 포장지가 한 쪽 가에 올려져 있었고, 갑갑했던 건지 넥타이는 풀고 있었다.
이 방에만 오면 주눅이 든다. 하도 많이 혼나서 그런가. 입을 꾹 다문 내가 김태형의 책상 위로 수정한 보고서를 올리자 김태형이 힐끔, 나를 바라보았다.
"보고서 다시…."
"네. 기다리세요. 금방 읽어볼 테니까."
말을 마친 김태형이 노트북을 한쪽으로 밀곤 내 보고서를 들었다. 천천히 첫장부터 한 글자씩 읽어 내려가던 김태형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김태형의 눈치를 살피던 내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어디가 또 이상한가요?"
"탄소 씨."
"……."
"하아…."
내게 뭐라고 말을 하려고 날 부르던 김태형은 하아, 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으로 제 눈을 문지른 김태형이 표정 없는 얼굴로 날 보며 말했다.
"보고서가 독후감입니까?"
"…네?"
"이걸 보고서라고 할 수 있냔 말입니다. 중요한 사실, 중요한 데이터는 쏙 빼먹고 느낀 점만 주구장창 적어놓은 이런 글을."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하던 김태형이 잠깐 말을 멈추었다. 김태형의 말에 아무런 말도 못 한 내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살짝 떨구자 김태형이 말을 이었다.
"다시 쓰세요."
"……."
"모르면 물어서 쓰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또 묻고 물어서 쓰세요. 이렇게 형식도 없이 제 마음대로 써오지 말고."
내가 쓴 보고서를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은 김태형이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옆에 놓여진 노트북으로 다시 시선을 옮긴 김태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보세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 한 나는 그대로 천천히 몸을 돌려 본부장실을 나왔다.
본부장실의 문이 닫히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뭐야…. 기분이 왜 이래."
혼이 나서 그런 걸까?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가끔 혼날 때도 있는 거지, 하고 생각하면 그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말하자면, 왠지 모르게 조금… 섭섭하고 서운한 기분이었다.
늘 내 편이었던 병아리. 늘 내게 누나, 누나, 하며 웃었던 병아리의 모습이 또 새삼스럽게 낯설었다. 내게 화를 내는 김태형은…. 그러니까, 내 말은.
"김태형은 늘 내 편이었으면 했는데…."
가만히 본부장실 앞에 선 나는 작은 목소리로 나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
일에 충실한 우리 태태 ㅠ.ㅍ 본부장이라는 자리가 태태를 날카롭게 만드나 봐요..
설레 해주셔서 좋아요....♥ 늘 말하지만 태태는! 사랑입니다!
암호닉
서류님 본부장님 윤기모찌님
슙디님 카누님 탱탱님 여기봐전정꾸님
미스터태태님 슙기력님 깡깡님 유채님
복동님 사원님
♥ 하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