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민, 그가 알고 싶다
부제: 과연 그는 누구인가.
조 명단은 조교한테 확인하고 이상 질문 없지?
무책임하게 말을 하시고 떠나신 교수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다 턱을 괴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난 세상에서 조별 과제가 제일 싫더라. 옆에 가만히 앉아있던 정호석이 펜을 정신없이 돌리며 투덜댔다. 말해 뭐해. 입을 여는 대신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필기로 가득 차 있는 공책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모처럼 조별 과제 받은 김에 민윤기 불러서 술이나 마시러 갈까. 또 호구짓 할 나를 위해 미리 위로주.
하긴, 그래도 너보다 더 하겠냐. ㅇㅇㅇ 조 운은 하나도 없어서.
…
이번에도 호구짓 할 예정?
조용히 해라. 말이 씨가 된다.
내 말에 입에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한 정호석이 씩 웃어보였다. 근데 네가 조 운이 없긴 하잖, 아! 지퍼를 잠그기 무섭게 다시 가볍게 열려버린 입을 닫아야겠다 싶어 손수 입을 닫아주니 온갖 엄살을 피운다. 조 운이 없는 건 사실이다. 좋게 말하면 천사, 나쁘게 말하면 호구. 말로만 PPT 담당이지 온갖 자료조사에, 발표까지 떠맡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야, 조 떴다. 끝까지 중얼대던 정호석이 급하게 고개를 들고 목이 빠질 듯 스크린에 집중했다. 자기 조원들을 찾기 바쁜지 금방 주변은 소란스러워졌다. 이번엔 어떤 스펙타클한 호구짓을 하게 될까 싶어 나도 얼른 명단을 훑어 내렸다. 아, 저기 있다 내 이름. 7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 중에 내 이름을 찾고 나와 묶인 사람들의 이름을 살폈다. 조원이…
저기, 3조 맞으시죠?
… 네? 아, 네.
박지민이에요. 드디어 만났네요, 선배.
**
근데 왜 박지민이 그 수업을 듣지?
내가 아냐.
아니요 선배, 저 분명히 걔 그 수업 에이플 맞았다고 한 걸 들은 것 같거든요?
밥이나 드세요.
밤까지 이어지는 강의를 버티기 위해 자취방에서 죽어가던 민윤기를 불러 술 대신 맛도 없는 학식을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있다가 정호석의 옆에서 물어오는 김태형에 눈을 흘기며 식어버린 소세지 볶음을 젓가락으로 푹 찔렀다. 안 그래도 찝찝해 죽겠는데 왜 자꾸 들먹여, 들먹이길.
드디어 만났다며 꼭 전에 만난 사람처럼 말하던 박지민은 이내 내 옆에 있던 정호석과 인사를 나누고는 자기 조를 찾아 떠난 정호석의 자리에 자연스레 앉아 턱을 괴고 꽤 긴 시간동안 나를 바라봤다. 물론 정호석이나 김태형과 같이 무리지어 다니는 후배인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내 입장에선 얼굴 보고 말을 튼 건 처음이라 박지민의 태도에 당황해 따라오는 눈길을 피하기에 급급했고, 얼마 안 돼 나와 박지민을 찾아 온 조원들이 서로 번호교환을 하는 중에도 조용히 불러주는 번호를 입력하고 급하게 강의실을 나왔다.
그, 박지민인지 뭔지 걔.
어?
머리가 복잡해 멍하니 젓가락질만 하고 있는 나를 힐끗 바라 본 민윤기가 묵묵히 밥을 먹다 입을 열었다. 박지민 이라는 주제를 잡고 이야기꽃을 피워대던 김태형과 정호석도 말을 멈추곤 민윤기를 바라봤다. 뭔가 말하려 입을 열던 민윤기를 빤히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아니다.
민윤기의 입은 열리기가 무섭게 다시 닫혔다. 뭐야, 어제 밤에 술을 처마셔서 그런가 애가 상태가 영 별로네. 고개를 젓고 내가 다시 식판에 시선을 두자 김태형과 정호석도 김이 빠졌는지 다시 수저를 들었다.
너 오늘 좀 졸더라.
아, 머리 아파서. 삼일 밤 샜더니.
그러게 내가 어제 김남준 전화 받지 말랬지.
강의가 끝나자마자 버스 시간을 맞추려 급하게 뛰어나간 정호석과 김태형에게 인사를 하고 느리게 짐을 챙기는 민윤기 옆에서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해대자 인상을 찡그린 민윤기가 내 이마를 툭 밀어내곤 가방을 둘러매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기는 잔소리 엄청 하면서 내가 한소리만 하면 그렇게 정색을 해대요. 괜히 입을 삐죽대며 나도 뒤따라 강의실을 나서자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은 민윤기가 캔을 따 나에게 건네주었다. 도서관 가자.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누군가의 발소리와 민윤기의 말소리가 울렸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주변을 두리번대자 민윤기가 내 팔을 잡고 끌어당기며 건물을 나섰다.
오늘은 안 돼. 조별 과제 자료 조사 때문에. 내일까지 보내달래.
자료 조사? 네가 웬일로 자료 조사를 하냐. PPT는.
박지민? 걔가 한다더라. 그래서 덥석 맡겼지.
아까 조별 과제 단톡에서 있었던 일을 읊자 민윤기가 영 탐탁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리고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시험기간에는 항상 같이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던 터라 마주하는 시선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나온 커피 맛 사탕을 까서 민윤기의 입에 집어넣었다. 우리 윤기 혼자 있을 수 있지? 아이를 어르듯 장난스럽게 던진 내 말에 결국 민윤기도 바람 빠지듯 웃어 보이며 잡고 있던 내 팔을 놓고는 내 머리를 꾹 눌렀다.
데려다 줄까.
내가 애냐. 혼자서도 잘 가요. 집 갈 때 전화해.
내 말에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민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한 번 더 둘러맨 민윤기가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던 민윤기의 뒤통수가 금새 사라지고 나도 뒤를 돌았다. 이어폰 을 대충 귀에 꽂아 넣고 아까부터 계속 진동이 울리던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어 잠금을 풀었다. 간단한 패턴을 그리자마자 기다린 듯 카톡이 쏟아졌다. 잠시 머뭇거리다 진동의 원인이던 조별 과제 단톡에 들어가자 온갖 이모티콘을 사용하며 박지민이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학교 앞 맛 집을 찾았다며 심지어 음식과 함께 곱게 브이를 하며 찍은 셀카를 올리기도 했다. 얘는 원래 성격이 이런 건가. 필요한 말이 아니면 굳이 카톡을 사용하지 않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로 가기를 꾹 눌렀다. 그리고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가까이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나는 어깨를 흠칫 떨었고 얼른 고개를 들자,
읽씹하는 거예요, 선배? 섭섭해요, 저.
… 어, 어?
셀카까지 예쁘게 찍어서 보냈는데. 사진 별로였어요? 좀 더 위에서 찍을 걸 그랬나?
아까와는 다르게 도서관에서 나온지 얼마 안 된 티를 내며 동그란 안경을 걸치듯 쓴 박지민이 서운하다는 듯이 말하다가 아무 말도 못하는 나를 보고 씩 웃고서는 자기 셀카를 띄운 내 핸드폰을 내 눈 앞에 들이댔다. 이거 봐요 나 턱선 강조하려고 일부러 목에 힘도 줬는데. 당황스러운 마음에 뒷걸음질을 치다 발이 꼬여 몸을 휘청거렸고, 웃고 있던 박지민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는 내 팔목을 얼른 쥐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고개를 살짝 들자 방긋 웃고 있는 박지민의 얼굴이 바로 앞에서 보였다.
… 아, 저기 미안.
괜찮아요, 선배? 놀랐죠?
아니야, 괜찮아.
급하게 박지민의 품에서 떨어져서는 고개를 숙이고 횡설수설하며 내뱉은 나의 사과를 뒤로 한 채 박지민은 나를 살피기에 바빴다. 내 양 어깨를 쥐고 뒤로 돌리려 하길래 손을 내저으며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박지민이 입을 앙 다물고는 가만히 나를 보더니 다시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 가는 길이에요 선배?
어깨 밑으로 흘러내린 가방끈을 추켜 올리고는 손으로 꼭 부여잡고 숨을 크게 내쉬자 박지민이 내 옆에 자연스레 위치하며 물어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지민은 그럼 같이 가자며 나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항상 민윤기나, 민윤기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던 길을 온전히 낯선 사람과 함께 하자니 기분이 묘했다.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을 앞에 두자, 아까 대충 꽂아두었던 이어폰 한 쪽이 귀에서 빠져나와 다른 쪽 귀에 의지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아, 이어폰은 빼야 되나…. 그래도 같이 가자고 했으니까. 박지민이 옆에서 별 다른 내용 없이 내뱉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이어폰을 빼내려 손을 올리는데 그런 내 손을 턱, 하고 잡은 박지민이 대롱대롱 매달려 곧 떨어질 듯 하던 이어폰 한 쪽을 자신의 귀에 꽂아 넣었다.
…
어, 이거 윤기 선배 목소리 아니에요?
…
랩한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이렇게 듣는 건 처음이에요, 저.
가까이서 내 눈을 마주하고 웃는 박지민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앞만 보고 걸어갔다.
집에 얼른 들어가요. 아무도 없으니까 무섭겠다. 그죠?
… 집에 아무도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무리 오늘 처음 얘기했다고 해도 과 후밴데 그걸 모를까 봐요?
…
얼른 들어가요, 선배. 들어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요.
…
우리 선배는 나랑 더 같이 있고 싶나 봐. 아까와 같이 찝찝한 느낌에 발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박지민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어이가 없어 인상을 찡그리자 안경을 고쳐 쓰다 눈을 마주친 박지민이 입술을 쭉 내밀고는 서운한 티를 냈다. 아니, 뭐 장난인데 그렇게 정색할 것 까지는 없잖아요 선배…. 몸을 배배 꼬며 말하기에 고개를 내저었다.
들어갈게. 오늘 데려다 줘서 고마워.
네가 날 왜 데려다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뒷말은 삼킨 채 말하는 나를 보며 습관처럼 또 방긋 웃어 보인 박지민이 손을 흔들었다. 평소에 민윤기라면 대꾸도 않고 바로 집으로 들어갔을 나였지만, 아니 애초부터 민윤기는 손을 흔들지도 않지만 어쨌든.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그러다 괜히 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간지러움에 급하게 뒤를 돌아 집으로 들어갔다. 뭐야, 나 왜 하고 있는 거야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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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방금 데려다줬어. 오늘 조 편성 신의 한 수. 강의 듣길 존나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