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지금 내가... 전정국이랑... 말이라는 걸 했다. 약간... 기절할 것 같다. 너무 떨려서...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이미 관심 밖이다. 내 몸의 모든 세포가 오직 전정국에게만 반응하고는 것 같다.
“너희 둘 다 오늘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해?”
정신을 빼놓고 멍하니 전정국의 널찍한 등판만 바라보다가 선생님께 한소리 들었다. 어떻게든 수업에 집중해보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책을 보며 안간힘을 써봤지만 실패. 물이라도 마셔보면 좀 나아질까 해서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곤 정수기 앞으로 갔다. 그 때 교실 안에서 들려온 소리.
“정국이 너도 물을 좀 마시던지 세수를 좀 하던지 해봐.”
이어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전정국이 교실 복도를 지나 정수기 쪽으로, 그러니까 내가 있는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곧 내 뒤에 서는 전정국에 침 한 번 꿀꺽. 두근거리는 내 심장 소리를 전정국에게 들킬까 걱정. 와... 진짜 상사병 나서 죽겠어...
그렇게 유독 힘들었던 수업을 끝마치고 단어를 외우기 위해 작은 교실로 옮겨갔다. 여전히 전정국과 나 사이엔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아, 지난 수업 때와 비교해서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작은 교실을 가득 메운 공기의 흐름이 ‘어색어색’이 아니라 ‘복잡미묘’라는 것. 차라리 어색한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나만 느끼는 건지, 전정국도 느끼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 사이엔 굉장히 이질적인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전정국 때문에 외우는 둥 마는 둥 하며 외운 탓에 시험지를 받았을 땐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장으로 변해갔다. 반도 못 적고 연필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전정국도 나와 비슷한 상황인 듯 했다. 선생님께 시험지와 함께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학원을 빠져나왔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 계단을 내려가 학원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악!”
“어... 미안.”
“아... 아니야.”
전정국이다.
“선생님이 너 이거 주라고 하셔서...”
“아... 고마워.”
전정국이 내게 건넨 건 A4용지 한 장이었다. 두세 줄 정도의 문구가 적힌.
“선생님이 다음 시간부터 교재 바뀐다고 사오라고 하시더라..”
“그..래?”
의도치 않게 전정국과 나란히 길을 걷게 되었다. 종이만 주고 평소처럼 쌩하니 먼저 가버릴줄 알았는데 웬일로 나와 보폭을 맞춰 걷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그 때 전정국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저기.. 책 사러 같이 갈래..?”
“어?”
“아, 싫으면 안 가도 되고..”
함께 책을 사러 가자는 전정국의 물음에 당황.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한 단어 한 단어 되새김질하며 생각해본다. 그것도 잠시. 남자가 삼세번은 해야지, 왜 이렇게 포기가 빨라? 실망스러워하는 전정국의 말투에 나도 모르게 답해버렸다.
“아니야, 같이 가자.”
내 응답에 대한 전정국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긍정적이었다. 반대로 나는 머릿속이 다시 새하얗게 변해갔고 생각의 끈은 하나하나 잘려나갔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끔..
동네서점에 도착한 나와 전정국은 책을 찾는 데만 열중했다. 누가 먼저 책을 찾는지 내기를 했기 때문이다. 서점까지 오는 길의 어색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내가 먼저 꺼낸 얘기였다. 먼저 찾는 사람한테 햄버거 사주기. 의외로 그런 게 전정국의 취향에 잘 맞았나보다. 그리고 얼마 후 조용하기만 하던 서점에 말소리가 피어난다.
“어, 찾았다.”
“어, 나도.”
전정국과 내가 사이좋게 책을 한권씩 찾아냈다. 스코어는 1대 1. 괜스레 승부욕이 불타올라 남은 책 한권을 찾으려 눈에 불을 켰다.
“찾았어?”
“아니.. 안 보인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쪽에서 키킼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찾았어..?
“내가 먼저 찾았네.”
“어디 있었어?”
“저기, 위에.”
전정국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제일 위층 선반에 놓여 있는 책이 보였다. 내가 팔을 뻗어도 간신히 닿을까 말까한 높이에 말이다.
“저렇게 높이에 있는데 내 눈에 보일 리가 없지.”
투덜거리는 내 모습을 전정국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왜 이래..?
“맨날 앉아있을 때만 봐서 몰랐는데.. 너 키 작구나?”
“뭐래? 나 160 넘거든?”
“그래봐야 나보다 15센티는 넘게 작은데?”
순간 욱해서 욕할 뻔 했다. 저게 진짜 말 튼지 얼마나 됐다고 키로 사람 놀리고 있어.
“너 저기 손 안 닿잖아.”
“까치발 들면 닿거든?”
“안될 거 같은데.”
까치발 들어봤자 안 닿을게 뻔해 보이지만 욱하는 마음에 닿는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당연한 말이지만 역시나, 짧았다. 다리가 아니라 팔이 짧은 거다. 뭐가 좋다고 실실 쪼개는 있는 전정국을 살짝 째려봐주고선 땅에 발을 붙였다. 근데 진짜 미친 게 확실한 것 같다. 이 상황에도 전정국을 보니 웃음이 새어 나오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끝이 간질거리는 게 내가 정말 전정국을..
“자.”
“고마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저 높은 데서 책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걸 보니 전정국의 키가 크긴 하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처음 봤을 땐 저렇게 크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팔에 얼핏 근육도 좀 보이는 것 같고.. 팔뚝부터 손등까지 핏줄도 서 있고..
“계산.”
“아..!”
전정국이 나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입술 새로 침을 질질 흘리며 전정국의 그 잘난 바디를 감상하고 있었을 거다. 그런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서점에서 나와 길을 걷고 있자니 밤바람이 불어와 몸이 으슬으슬했다.
“추워?”
“조금.”
춥냐고 묻기에 춥다고 답한 것뿐이었다. 절대로 그 이상의 의미는 담지 않았다. 그런데..
“이거.”
전정국이 가방을 열더니 교복 가디건을 꺼내 내게 주었다. 전정국의 교복 가디건이.. 내 손에 들려있다.
“춥다며. 그거 입으라고.”
어머니...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었던가요..? 감히 제가 전정국님의 가디건을 입어도 될는지요.. 하며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있는데
“안 입어? 넣을까?”
“아니! 입을 거야.”
도로 넣을까 묻는 전정국에 다급하게 대답했다. 입을 거라고. 네, 당연히 입어야지요.
“너 되게 웃기다.”
“내가 뭐가?”
“학원에선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되게...”
“왜 말을 하다말아?”
“아니야..”
순간 난 보았다. 새빨갛게 익어버린 전정국의 귀를... 뭐..지?
다시 전정국과 나 사이엔 정적만이 존재했다. 복잡미묘한 공기의 흐름과 함께.
♡
[암호닉]
망고 민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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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은 계속 받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재미있게 보고있다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쓰는 글이라 많이 부족한 탓에 손끝이 간질거리는 달달함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겠지만
앞으론 좀 더 케미 터지는 내용으로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