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오늘은... 전정국과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다. 전정국이 나를 바래다주었던 그날 밤 전정국과 나는 번호를 교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벽에 카톡을 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주말에 뭐해?’
‘아마도 침대랑 한 몸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럼 영화 보러 가자.’
선수인건가 의심도 해봤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다는 말이야.
나름대로 데이트라고 신경을 좀 썼다. 간만에 원피스도 꺼내 입고 화장도 했다. 12시. 준비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 아파트 출입문에 다다르니 전정국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를 보고 미소를 짓는데 순간 심장이 철렁하는 게 설레서 죽을 뻔 했다.
“오늘 예쁘네.”
“나 원래 예뻐.”
내 말에 전정국이 푸스스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내 심장 뛰는 소리가 전정국에게 들리지 않기만을 바란다.
“내가 좀 생각을 해봤는데..”
“뭘?”
“너 선수야?”
“어?”
전정국이 좀 당황한 듯 보였다. 그리고선 하는 말이...
“어떻게 알았어?”
“진짜야?”
“어! 나 축구부 주장인데? 내 뒷조사라도 했어?”
음.. 그래. 전정국은 선수는 아닌 모양이다. 아, 물론 축구선수는 맞고.
“아니.. 그러니까...”
“왜?”
“내가 말하는 선수라는 게.. 그런 거 있잖아, 막 여자애들한테 잘해주고...”
“아...”
전정국도 이제야 내 말의 뜻을 알아차린 듯 했다. 괜히 더 얘기했나...
“내가 그래 보여?”
“아니 그건 아닌데.. 니가 나한테 하는 행동이...”
“아... 근데 나 그런 애 아니야. 어.. 그러니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이 길래 더 묻지 않고 가만히 전정국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가 여자애들이랑 친해본 적이 없어서.. 너를 어떻게 대해야 될지를 몰라서.. 어...”
“......”
“친구들한테 좀 물어봤어. 그래서 걔네가 하라는 대로 했는데... 아 그러니까...”
전정국의 말에 조금 놀랬다. 전정국도 나처럼 이성친구가 없다는 것에. 그리고... 전정국도 나처럼 학교에서 내 얘길 한다는 것에. 전정국에게 궁금했던 세 가지 중에 벌써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전정국은 어떤 앤지, 나처럼 학교에서 내 얘길 하는지. 이제 남은 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러니까 니 말은 너 선수 아니라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됐어.”
전정국을 바라보며 웃었다. 전정국의 대답이.. 너무 순수하고 예쁘게 들려서. 내가 너를 안 좋게 생각할까봐 걱정하는 것 같아서. 근데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나.. 니가 선수였어도 계속 널 좋아했을 거야.. 아니, 오히려 너한테 놀아나면서도 좋다고 헤실헤실 거렸을걸?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기로 했다. 드디어 전정국과 함께 먹는 첫 식사다. 햄버거를 사야하나 생각했지만 오늘만큼은 분위기를 내보고 싶었다. 햄버거는 다음에.
“뭐 먹을래?”
“난 아무거나 상관없는데.”
“그거 남자들 최대의 난제랬어. 난 그런 거 못 맞춰.”
전정국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아무거나. 나도 어디서 본 적이 있다. 여자들의 아무거나 상관없다는 말이 제일 어렵다는 거. 괜히 전정국에게 미안해졌다. 진작 하나만 콕 집어서 말해줄 걸 그랬다.
“나 파스타 먹고 싶은데.. 남자들은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거 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야. 남자들도 그런 거 좋아해.”
“그래?”
“아저씨들도 어렸을 땐 청국장보다 스파게티를 더 좋아했을 걸?”
전정국은 꽤나 논리적이었고 난 전정국에게 설득 당해버렸다.
“배고프다. 빨리 먹으러 가자.”
전정국이 맛있는 집을 안다며 나를 이끌었다. 아 진짜 여자 많이 만나본 거 아니야?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자 전정국이 왜 그러냐며 묻는다.
“맛있다는 데는 누구랑 갔다 왔었는데?”
“오늘 처음 간다 처음! 친구가 가르쳐줬어.”
발끈하며 말하는 전정국은 정말... 귀여웠다. 자주 놀려먹어야겠어.
“나랑 오려고 친구한테 물어본 거야?”
“...응.”
잠깐 망설이더니 그렇다고 수줍게 대답하는데 설렌다. 아니, 그냥 전정국이 어떤 행동을 하던 다 설렌다. 아무래도 오늘내로 설렘사 당할 것 같다. 나 죽으면 양지 바른 곳에 묻어줘야 돼. 알겠지?
도착한 곳은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메뉴를 주문하는데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 잘 맞았다.
“난 토마토보단 크림이 낫더라.”
“역시. 뭘 좀 아네.”
“어떻게 시킬까?”
“나 선택장애야. 다 맛있는데 어떻게 고르냐?”
“너 나랑 진짜 잘 맞는다.”
내가 그렇게 말을 하자 전정국이 손을 내민다. 하이파이브. 약간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고 받아쳐주었다.
“그럼 파스타 하나, 피자 하나, 샐러드 하나. 어때?”
“와. 진짜 대박.”
“왜?”
“둘이 와서 세 개 시키는 거. 내 친구들은 이해를 못하더라.”
전정국이 감탄을 하며 한 번 더 손을 내민다. 우리 진짜 잘 맞는다. 이런 사소한 거 하나에도.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평소에 궁금해 했던 것들에 대해서.
“너 나한테 왜 갑자기 잘해주는 거야? 원래 안 그랬잖아.”
“그 땐 안 친했으니까 그런 거고 지금은 친하잖아.”
“듣고 보니 좀 그러네. 다른 여자애들이랑도 친해지면 잘해줄 거라는 거잖아.”
내가 생각해도 좀 무리수였나 싶었다. 우리가 뭐 얼마나 대단한 사이라고. 그렇지만.. 질투가 났다. 그리고 궁금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니. 안 그랬을 거야. 애초에 친해질 생각을 안 했겠지.”
“그럼 나랑은 왜 친해질 생각을 했어?”
“그건... 모르겠다.”
“그럼 그 날 나한테 책 사러 같이 가자고 한 거, 그건 왜 그런 거야?”
“어.. 그것도 잘 모르겠다.”
결국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음식이 나옴으로써 우리의 대화는 끝을 맺었다. 사실 남녀관계에 대해선 빠삭한 편이다. 연애를 해보지를 않아서 그렇지. 아, 고등학생한테 연애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이성교제. 그래, 이게 더 나은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좀.. 보수적이고 이성교제를 해보지를 않아서 그렇지 남녀관계에 대해선 친구에게 조언도 해 줄 만큼 박식하다. 예를 들면 어떤 곤란한 상황에서의 남녀가 취해야 할 대처법이라던 지, 또는 객관적 기준에서의 좋은 이성과 나쁜 이성의 구분이라던 지. 특히 내 전문분야는 이성의 행동으로 판단하는 나에 대한 관심도...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성이 하는 말이나 행동으로 그 이성이 나를 좋아하는지,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안다는 거다. 그런데. 도통 알 수가 없다. 전정국은. 누가 그러더라. 연애경험도 없는 것들이 남녀관계는 더 잘 안다고. 그 말이 정답인가 보다.
“안 먹어?”
“어? 아... 먹고 있어.”
“아직 손도 안 댔잖아. 배 안 고파?”
“그럴 리가. 배고파서 죽겠는데.”
“빨리 먹어. 아니다. 천천히 먹어. 아니, 어... 빨리 포크를 들고 천천히 먹어. 오, 나 말 잘한다!”
귀엽다. 내 이상형은 귀여운 남자가 아니라 섹시한 남잔데.. 근데 귀엽다. 친구 말대로 한번 잘해봐야겠다. 전정국이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