떽떽거리는 걸로는 2등 하라 하면 분하다며 발을 동동 구를 내 쌍둥이 동생 목소리보다도 더 듣기가 싫었던 매미 울음소리가 어느덧 잦아든 걸 보면, 여름도 거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듯 했다. 그래, 가만히 있어도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여름이 끝나가는 건 정말 좋았다. 여름을 너무 미워해서였을까. 왜 내 인생도 종이 칠 거 같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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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이니 여름방학에도 쉬지 않고 공부를 하겠다는 내 의지가 하늘은 언짢았던 것일까. 만약 그런 거였다면 차라리 태양을 더 뜨겁게 달궈서 아예 나를 활활 태우지. 내 학교 생활 10년, 시험을 보는 족족 나는 한 번도 60점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 반면 내 동생은 한 과목이라도 60점 아래로 내려와 본 적이 없었다. 같은 배에서 같은 날 태어나, 같은 유전자를 받았는데도 뭐 이리 다른 건지 매일 엄마 잔소리는 내 몫이었다. 좋은 유전자는 자기가 다 가져갔으니 나에겐 안 좋은 거라도 넘겨주겠다는 건가. 소파에 앉아 통화를 하며 깔깔거리는 부승관을 보자니 분명했다. 저 자식은 날 엿 먹이려고 태어난 게 틀림이 없다는 걸.
"야, 부너봉. 너 6반 이석민 알아?"
걔는 또 누구야. 뭐가 그리도 웃긴 지 통화에 정신이 팔려 양 볼에 달걀 한 개씩은 숨겨둔 거 같던 얼굴은 어디로 갖다 치우고 금세 퍽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묻는 부승관에 '나는 아무 것도 몰라요~' 라는 뜻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썹만 들썩거렸다. 그러자 부승관은 약이 오른 건지 대뜸 '아! 아냐고, 모르냐고!' 라며 소리를 질렀다.
"눈알은 어디 가서 엿이랑 바꿔 드셨대. 딱 봐도 모른다는 표정 지었잖아."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한 번 팽- 뀌더니 핸드폰에 대고 '야, 너 모른댄다. 님 분발 좀 하셔야 할 듯.' 이라며 다시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는데 저게 모지리가 아닐 리가. 식탁에 앉아 식빵에 딸기잼을 발라 먹는데 슬쩍 다가온 부승관이 내일부터 수고하라며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더니.
"잘 먹을게, 멍청아."
내 손에 곱게 쥐어져 있던 식빵을 들고 방으로 도주했다. 저걸 죽여, 살려. 그리고 난 그때까지만 해도 부승관의 수고하라던 말이 당장 내일부터 보충이니까 힘내라고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줄로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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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보충 생각에 괜히 교실로 들어가기가 싫어져 '2학년 1반' 이라고 적힌 팻말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왕 열심히 공부하기로 마음 먹은 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앞문을 힘차게 열었다가 낯선 얼굴 (그 중에는 부승관도 있었다.) 들이 쟤는 뭐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데, 그제서야 보충은 성적 순으로 반을 재배정한다는 말이 떠올라 부리나케 문을 닫고 지난 주에 종례 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던 내가 배정 받은 5반으로 달려갔다.
농땡이를 부린 탓에 이미 삼삼오오 짝을 찾아 자리에 앉아있었고, 남은 자리라곤 어떤 남자아이 옆자리 하나밖에 없었다. 한 명도 남김 없이 친구들과 모두 반이 떨어졌기에 보충반에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아무 여자애 옆에나 앉아서 말 걸고 친해지려고 했건만 다 망했다. 어쩔 수 없이 하나 남은 빈 자리로 가 옆자리 앉은 아이에게 여기 앉아도 되겠냐고 물어봤다. 예의상 입꼬리도 힘껏 올리고 활짝 웃으면서. 그런 내 표정이 3초만에 구겨질 줄은 몰랐다.
"일부러 너 앉으라고 아무도 못 앉게 했는데. 오빠 잘 했지. 빨리 앉아, 내 공주님."
뭐야, 저 또라이는. 어이가 없어서 돋은 소름을 보면 닭이랑 친구 먹을 수도 있을 거 같았다. 또라이의 친구들인 건지 앞뒤로 앉은 다른 남자애들이 또라이 뒤통수를 때리더니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쟤는 너 모른다는데 초면에 그러면 실례라는 둥 웃어재기기 바빴고, 그동안 나는 내가 과연 이 자리에 앉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 수백 번도 더 고민했다.
"미안, 미안. 이석민이 좀 또라이야. 부승관 쌍둥이 맞지? 여기 앉아. 난 부승관 친구야."
쟤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또라이로 불리는구나. 얼떨떨하다 못해 가출을 할랑 말랑 하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의자에 앉았다. 이름이 뭐인 지, 부승관이 괴롭히진 않는 지 정신 사나웠지만 그래도 애들이 먼저 말을 걸어줘서 겨우 의심의 눈초리를 풀 수 있었다. 자기를 부승관 친구라고 소개하던 아이는 권순영이라고 했다. 째진 눈 때문에 한 성깔 할 거 같았는데 보기 보다 붙임성도 좋고 누가 부승관 친구 아니랄까 봐 말도 참 많은 편인 듯 했다. 권순영에 이어 다른 아이들이 서로 다투며 자기 이름을 알리기 바빴고, 모두 부승관과 친하니 잘 지내자는 말에 친구가 없던 나는 보충기간동안 어떻게 지내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내심 고마웠다. 김민규가 친해지자며 손을 내밀었는데 악수 안 해주고 씹으면 괜히 무안해 할까 봐 내민 손을 잡았다. 아니, 잡으려던 순간에 또라이가 김민규 손을 탁 쳐냈다.
"내가 말했잖아. 너봉 내 거라고."
오, 존나 개소리. 근데 또라이가 정색하니까 또 은근 무섭다. 다른 애들을 보니 또라이를 마치 무슨 벌레라도 보는 듯이 하나 같이 모두 다 얼굴이 구기고 있었다. '저 새끼 저거 또 시작이네.' 라며 중얼거린 이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그제서야 자기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날 눈치 챈 건지 또라이가 고개를 휙 돌려 날 보더니 씩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너 보고 싶어서 부승관 따라서 가끔 너네 집에 몇 번 갔었는데도 날 모르다니, 그건 좀 많이 슬프다. 그래도 앞으로 아는 사이 하면 되지, 그치."
"……."
"앞으로 더 친해지고 서로 더 알아서 내 거 하는 건 어때, 너봉아."
그러더니 내 볼을 꼬집는다. 뭐야, 이 호구는. 버터랑 마가린을 같이 밥에 비벼서 드셨나. 난 아파 죽겠는데 뭐가 그리도 좋길래 빙구처럼 웃는 건지 모르겠다. 으아, 시발. 이제 공부한다고 안 깝칠게요. 살려줘, 부승관. 아니, 승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