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 애가 걷는 세상은 언제나 둥글게 돌아간다. 하루를 스물 네 개의 단락으로 쪼개어 매 순간 격변하는 나와는 많이 달랐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조심스러웠으며 이상적이었다. 나는 그 애가 나보다 느린 세상에서 살아서 속이 꿋꿋하니 한참 어른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애의 모든 것이 못내 걱정스러웠다.
"민윤기, 나 간다."
그래서 언제나 저무는 해를 따라 길게 늘어지는 그 애의 그림자를 따라 걸었다. 혹시나 밟으면 그림자마저 아파할까봐 저만치 비켜선 채로. 그렇게 외로운 동행을 마치고 나면 낡은 집 안으로 삼켜지는 것만 같은 그 애의 하얀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렸다. 민윤기, 나 간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는 것은 이제는 어쩐지 익숙한 일이 되었다. 그 애는 자신의 뒤를 따라 걷는 발걸음 소리 하나도 알아 차리지 못하니까. 그 마른 어깨에 손을 툭 하고 걸치면 그제서야 왜소한 몸을 잘게 떨고 나를 올려다보곤 했으니까.
*
내가 가난보다 견딜 수 없었던 사실은 그거였다. 매일 밤 창 밖의 별을 세며 텅 빈 문장들을 이어가던 어린 나를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 하필이면 아버지라는 점.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뿐인 자식의 꿈보다 현실을 더 이해하는 사람이었기에 나의 더딘 성장을 인내할 여유가 없었다. 내가 중학교 삼 학년 때, 그동안 소중하게 모아온 나의 기록들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고 그 이듬해 나는 떠밀리듯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 모든 것을 집어 삼킨 채 끝없이 타오르던 그 날의 불씨를 아직 가슴 속에 남긴 채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더 이상 교육비를 댈 수 없다는 비보를 전해 받고 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퇴서를 냈다. 나는 그 애를 그런 열 여덟에 만났다. 내가 현실의 끄트머리에 가장 볼품없이 매달려 있었을 때에.
"너 왼쪽 귀가 안 들리는구나."
"……."
"내가 아까부터 네 왼쪽에 딱 붙어서 널 불렀는데, 네가 한 번도 돌아보질 않았어."
그 죽어가듯 헝클어진 시선 속에서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던 건, 귀가 안 들리는 남자애 하나가 전부였다. 유일함, 나는 나보다 반 뼘이나 작은 그 애가 가진 그 독보적인 가치에 맥없이 할 말을 잃고 한참 동안 옆자리를 서성였다. 어쩌다 사이좋게 걸음이 맞춰질 때면 온몸이 눅눅하면서도 싱그럽게 달아올랐다. 벅차오르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부서질 것처럼 하얗기만 한 그 애가 빛을 받으면 꼭 태양인 것만 같아 내게는 따로 태양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애를 배웅하는 두 번째 해를 물리고 돌아가는 길에, 시를 한 편 지었다.
「 그리울 때마다
바다를 퍼담은 어항은
얼마나 출렁였던가
밀리고 썰리고
흔들릴수록 쉽게 엎질러지는
작은 물의 나라
그 속에 갇혀 있는 슬픔을
깊숙이서 건져내어
위로하여 어루만지네
상처가 덧나
흉칙하게도 변했구나
만신창이인 나를 어쩌면 좋으니 」
"가난에, 자퇴에, 동성애까지."
"인생 참."
내가 불쌍해서였다.
*
사람의 눈은 시각 무시의 원리가 있어서, 한 쪽 눈의 시력이 감소하면 곧 다른 쪽 눈도 따라서 시력이 감소한다고 한다. 민윤기의 귀도 그랬다. 그 애는 덤덤하게 자신의 두 귀가 멸망 직전에 걸쳐져 있음을 알렸다. 충분히 비극적인 소식이었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울 이유가 없었다. 아직 그 애는 언어를 구사하는 데에 있어서 어려움이 없었고, 느슨한 목소리도 한결같았으며, 두 눈도 멀쩡했고, 걸을 수도 있었고, 규칙적인 숨 또한 막힘없이 내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애는 건재했다. 다만 아주 가까운 속삭임이 아니면 더 이상 정상적으로 소리를 들을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그 애가 지금 지켜내고 있는 것들, 딱 그것만 가지기로 했다. 대신에 나는 장난기를 발동해 거기서 조금 짓궂은 취미를 하나 챙겼는데, 그건 바로 돌아볼 일이 없는 민윤기의 뒷모습에 대고 이런저런 고백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민윤기."
"……."
"안 들리지?"
"……."
"멍청이."
"……."
"좋아해."
"……."
"사랑까진 아니고."
"……."
"…아닌 걸로 칠래."
두 쌍의 발걸음 소리가 전부인 희멀건 아스팔트 바닥에서는 내가 수놓는 사랑이 피어 올랐다.
*
내 편지를 읽는 외로운 등 위로 우울함이 뚝뚝 흘러 내렸다. 스무 줄을 꼬박 넘긴 장문의 글에 대한 그 애의 감상평은 미안하다는 말이 다였다. 그러면서도 한참을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마른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고 불거진 어깨뼈 위에 턱을 얹었다. 큰일이다. 온통 뾰족하기만 한 나의 빙산이 느리고 둥근 그 애로 인해서 자꾸만 깎이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의 결함을 미안해하는 그 애에게서 내가 자꾸만, 애달픈 사랑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괜찮아. 나는 말을 잘 하는 게 아니라 글을 잘 쓰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말솜씨가 좋은 편이 아니었고, 그 애는 듣질 못했다.] 우리는 정말이지. [나는 글을 잘 썼고, 그 애는 시력이 좋았다.]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사이였다.
"너는 내 사랑을 보면 되잖아."
그러니까 나는 그 애의 입에서, 버릇처럼 사랑이 흘러 나오길 바란다. 그렇게 버릇처럼 늘러 붙은 미안하다는 말 대신.
실제 있는 시입니다 :)
며칠을 질질 끈 글을 이제야 맘 잡고 썼네요..
나는 언제쯤 장편을 쓰지 (먼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