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분명히 계약 했잖아요! "
" 미안하네 미안해.. 계약에 차질이 있던 모양이야.. 젊은이가 한번만 참아줘. 응? "
" 저 이거 신고할꺼니까 그렇게 아세요! "
별빛이 씩씩거리며 부동산을 나서려 할때면, 할아버지가 별빛을 잡고 얘기한다.
" 젊은 사람이 이 늙은 할애비 봐서 한번만 용서해주게. 응? 부탁이야.. "
" ...며칠 걸리는데요. "
" 한달이세. 딱 한달!
한달만 기다려주면 내가 말끔히 해결해 놓을걸세. "
그렇게 난생처음 보는 남자와 한달동안 동거를 하게 되었고,
지금은...
이제 딱 열흘만 남겨둔 상태이다.
" 저기요! 저 빨리 씻어야 돼요. 언제 나올꺼에요. "
동창회 약속 시간에 늦게 생긴 별빛이는 화장실 문을 쿵쿵 두드리며 원식이 나오길 재촉했고
원식이 젖은 머리를 털며 하의에 수건만 두른채 나왔다.
" 옷,옷은 왜 안 입고 나와요! "
민망해 괜히 화를 내며 그에게 말하자
원식은 자신의 그런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은듯 태연하게 말했다.
" 빨리 나오라면서요.. "
멀뚱하게 별빛을 쳐다보며 머리를 터는 원식을 지나쳐 화장실로 들어갔다.
"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
투덜대며 씻기 시작했지만 그을린 피부에 떡 벌어진 어깨와
선명한 복근으로 머리를 털던 원식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지금 이거.. 왜 자꾸 떠오르는건데!
" 미쳤어? 무슨 생각 하는거야.. "
별빛이는 혼잣말을 하며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
.
.
" 야 완전 오랜만이다! "
" 와- 넌 진짜 그대로네? "
정말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친구들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게 되니 반가운 마음에,
친구들이 건네는 술잔들을 거부하지 않고 다 받았다.
평소 좋아하지도 않던 술을 몇잔째 들이키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 그래서? 그 남자가 잘해줘? "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드디어 나타났다.
여자들이 모이면 뭐, 뻔한 남자얘기.
반쯤 취해 넋이 나간채 헤롱거리는 날 제외한 친구들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친구의 말에 눈을 번쩍이며 수다를 이어나간다.
남자 얘기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주제만으로 시끌벅적 하는데,
생판 모르는 남자랑 거의 한달째 살고 있다는 얘기를 꺼내면 얼마나 난리가 날까.
생각해보니까 기가막히네.
" 야- 저기 맥주병좀 건네봐아- "
호프집 테이블 위에 얼굴을 비비며 뭐라뭐라 웅얼거리는 별빛을 보고 친구들이 말한다.
" 쟤 취했네 벌써. "
" 야 나 안취했어! 나 말-짱해! "
내 잔에 맥주를 따르기 위해 손을 뻗자 내 옆에 있던 친구가 나를 제지하며 친구들에게 말한다.
" 얘 집에 보내야될거 같은데? 시간도 늦었고..
별빛이네 바뀐 집 전화번호 아는 사람 있어? "
" 나 아는데. 내가 전화 해볼께. "
반쯤 뜬 눈으로 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정신줄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
원식은 쇼파에 앉은채 벽에 걸린 작은 시계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걱정에 저절로 떨어지는 다리, 그리고 자꾸만 찌푸려지는 얼굴.
" 몇신데 아직도 안 들어와. "
12시를 훌쩍 넘겨버린 작은 시곗바늘에 거실을 서성이다, 따르릉- 하며 집전화가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 여보세요? "
" ...... 야, 별빛이 오빠있었어? 언니밖에 없었지 않아? "
원식에게 건네는 말이 아닌 다른 사람한테 건네는듯한 말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전화기를 귀에 댄체 다시 한번 말했다.
" 여보세요. "
" 아, 별빛이네 집 맞아요? "
" 맞아요. 별빛씨 어딨어요? "
" 여기 ○○호프집인데.. 지금 별빛이 완전 취해.. "
" 지금 바로 갈께요. "
이럴줄 알았다.
별빛이의 친구의 말에 차마 다 끝나기도 전에 원식은 옷을 재빨리 갈아입고 밖을 나왔다.
*
친구들의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떠보니
웬 한 남자가 내 친구들에게 빙- 둘러싸여 있다.
" 뭐야? 별빛이 남자친구 있었어? "
" 누구에요? 별빛이 집 전화를 왜 그쪽이 받은거에요? "
" 같이 사는거 아니야? "
" ..헐. 같이 살아요? "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당황했는지 원식이 진땀을 흘리며 별빛을 찾는다.
" 별빛씨는요? "
" 어머어머. "
바로 별빛을 찾는 원식의 모습에 친구들의 웃으며 손가락으로 별빛을 가리켰고,
친구들의 손가락을 따라 원식이 시선을 옮기면,
" 어? 뭐야아- 왜 그쪽이 여기 있어요? 일로와 일로와. 맥주 마셔요 맥주우-.. "
잔뜩 취해버린 별빛이 자신의 팔을 휘적휘적 젓고 있다.
원식은 그런 별빛이의 모습을 쳐다보더니
친구들에게 몸을 돌려 정중히 말한다.
" 연락줘서 고마워요. 그만 가볼게요. "
" 업혀요 "
별빛이의 앞에 자신의 등을 돌리며 원식이 말했고
안간다고 떼쓰는 별빛을 겨우 간신히 달래 원식은 별빛을 업고 호프집을 나왔다.
" 술 잘 마시지도 못하는거 같더만.. "
등에 별빛을 업은채 집에 도착한 원식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별빛을 조심히 침대위로 눕혔다.
" 아, 답답해.. "
목 까지 다 잠군 블라우스 남방이 답답했는지 별빛이 목 즈음을 만지며 웅얼거렸고
원식이 잠시 망설이다 별빛이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 맨날 집에 늦게 들어올때마다 걱정되 죽겠고,
나 불편해 할까봐 일부러 방에서 잘 나오지도 않았는데.. "
별빛이 술에 취해 못 들을꺼라 생각한 원식은
눈을 꼭 감은채 누워있는 별빛을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 남자 여자가 한 지붕아래 같이 사는데 내가 안 힘들리가 없잖아.. "
한숨을 쉬다, 원식이 흐트러진 별빛이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별빛이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한다.
" 별빛씨가 좋아졌어요. 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