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수였던 저와 배우지망생이던 너. 저는 신인이자 무명이었고 너 역시 잘 풀리지 않는 배우지망생이었어요. 둘이 나름 알콩달콩 사귀던 도중 네게 권태기가 오고, 저는 그 스트레스로 안절부절 못하던 찰나 네 매니저에게 스폰 얘기를 들어요. 대기업과 긴밀하게 연결된 조직의 보스가 저와 네가 사귀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절 대가로 네 데뷔와 앞날을 모두 약속해주겠단 제안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잠깐 망설였지만 누구보다도 널 사랑했기에 제안을 받아들여요. 그 덕에 넌 데뷔때부터 주목을 받았고 다방면에서 러브콜을 받는 탑이 됐지만 전 안중에도 없었어요. 일이 우선이었고, 권태는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으니까. 네가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갈 때마다 제 몸과 마음은 망가져갔지만 그래도 괜찮았어요. 급기야 보스의 집에 감금을 당해도. 점점 제게 흥미가 떨어진 보스는 절 내다버렸지만 이미 넌 누구의 도움도 없는 사람이 되었기에 상관없었어요. 다만, 절 찾지도 않는 네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저 또한 이미 남의 손을 탄 몸으로 널 마주하고 싶지 않아 죽은 듯이 지냈어요. 무용은 반강제적으로 그만둔 지 오래고. 어쩌면 권태의 끝은 다른 연인이 생긴 널 보는 게 당연한 일일 텐데, 소문으로만 돌던 네 새 애인과 함게 있는 다정한 모습을 보는 게 왜 이렇게 서러운지. 그러나 정말 후회할 일은 그 뒤에 터졌어요. 절 유독 괴롭히던 조직원 중 하나가 제가 모르는 재밌는 사실이 있다며 건넨 사진에는 잊을 수 없던 네 예비 신부. 그리고 녹음기에는 보스와 그 여자의 목소리. 알고 보니 저와 내 관계를 알던 여자는 의도적으로 절 떼어놓으려 일을 꾸몄고, 스폰서는 그 여자나 다름없었던 것. 밀려오는 후회에 속상해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까지 마시고 반은 필름이 끊긴 채 무작정 네 집으로 향했지만, 그저 한심하게만 보는 네 눈빛이 술김인데도 불구하고 여실히 느껴졌어요. "내가 형 때문에... 내가 형을 위해서 무슨 짓을 했는데." 덜덜 떨리는 손을 꼭 말아쥐면서 이미 눈물범벅이 된 제 얼굴을 빤히 보는 네가 한 번쯤은 눈물을 닦아줄 만도 한데, 손길은커녕 한숨만 돌아왔어요. 그게 무슨 소리인진 모르겠지만 지금 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오면 어떡하냐는 말과 함께 네 등 뒤 너머 멀리서 들리는 누구냐는 상냥한 그 여자의 목소리. 어, 동료가 급하게 전해줄 게 있대서. 그거 내가 할게, 넌 좀 쉬어. 다정한 네 답도 제 귀에 쿡 박혔어요. 말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는데. 네가 이 모든 걸 알면 저보다 더 상처를 입을까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 술기운과 홧김에 문을 닫고 나오는 네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털어놨어요. 저 여자가 그런 거야. 저 여자가 우릴 망친 거야, 형. 잠자코 듣고 있던 넌 다시 깊은 한숨을 쉬며 절 경멸하는 눈으로 보며 더 실망하게 하지 말라는 그 말만을 남기고 절 남겨두고 들어가버렸어요. 그 날은 밤새 거리를 떠돌며 울었고, 안에서 제가 모든 걸 알고 있단 사실을 엿들은 여자의 계략으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깁니다. 사실 죽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는 제 상태에 이젠 정말로 널 볼 수 없겠구나 하며 자취를 감춰요. 연락도 없고, 제 말이 은근 신경 쓰이던 너는 고민하다 뒤늦게 절 찾지만 이미 누구도 제 행방을 모르는 상태. 그제야 너는 여자의 뒤를 캐게 되지만 보스와의 관계는 도무지 정보가 없어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 조직의 보스에게, 제가 널 위해 제 자신을 팔았던 것들도 모두 알게 됩니다. 제 행방이나, 마지막의 사고까지는 알지 못했고. 복수라도 하고 싶지만 조직의 보스도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난 상태. 넌 후회로 얼룩진 하루하루를 보내게 돼요. 그러던 어느 날, 넌 시상식에서 왠지 스치듯 절 본 것 같은 느낌에 찝찝한 마음으로 대기실을 나오다 모퉁이 뒤에서 그리웠던 제 목소리와 네 매니저의 대화를 들어요. 고마워요. 다시 못 볼... 아니, 다시 못 들을 줄 알았는데. 수술 안 해요. 병원비가 한두 푼도 아니고, 어차피 수술도 국내에서는 어렵대서요. 사실 해외도 가망은 없을 것 같고... 무엇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지금은. 대신 그 돈으로 좋은 보청기 샀어요. 죽기 전까지 목소리 잘 담아두려고. 조금이라도 더 잘 살다 가려고요. 전 우리 형만 행복하면 돼요. 진심으로. 오랜만에 듣는 내 목소리도 놀라운데 수술이니, 죽는다느니 충격적인 말들에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던 너는 내가 무언가 탁탁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간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달려갑니다. 조직에서 굴려져 무용은커녕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몸이 된 건 오래. 여자의 계략으로 시력도 잃고, 이젠 귀까지 먹어가는 처지에 방치한 몸이 기어코 병원에서 선고를 받게 했어요. 오늘은 특별히 얻은 티켓으로 어쩌면 제겐 마지막일 네 목소리를 들으러 온 거예요. 티비로도 들을 수 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거리에서 듣고 싶어서. 이번엔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절 따라오던 너는 골목에서 넘어진 저와 재회하게 돼요. (지팡이로 땅을 턱 짚으며 걸어가다 아무래도 오랜만의 정신없는 서울에다 장시간 외출에 무리한 탓인지 휘청이다 누군가의 어깨에 부딪혀 넘어지고 보청기마저 떨어져 나가자 연신 사과를 함에도 절 욕하는 상대의 목소리도 웅얼대는 소리로 들려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상대가 가고 나서야 빗물에 젖은 땅을 짚으며 보청기를 찾는) 어, 어딨지... 제가 텀. 추가 설정, 여체화 가능. 석진이 형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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