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세상으로 04 w.기분이나쁠땐 무슨일이기에 의사선생님은 나만 따로부른 것일까. 외출허가에 따라왔던 기쁨도 잠시 묘한 감정에 휩싸여 문앞에서 쭈볏쭈볏 거리던 민석이에게 기다리라 일러두며 밖으로 내보내고 나는 선생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아마 민석이도 본능적으로 직감했을 것이다. 병원에서 몇십년 째 신세지고 있을 텐데 본인의 이야기라는 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궁금하겠지.. 민석이도.. 밖에서 초조히 기다리고 있을 민석이의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내 맞은편에서 진지한 표정을 하신 선생님이 천천히 입을 열어 운을 뗐다. "루한.. 루한도 알겠지만.. 민석이는 이병원에서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꽤나 오랜 시간을 지내온 녀석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과 얘기하는 게 어색하고 누군가와 부대끼며 살아온 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놈이에요. 루한. 내가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국적도 불분명하고 거주지도 안알려주고 직업도 없고 나이만 18살이라는 루한을 왜 뽑은 줄 알아요? 솔직히 이곳에. 민석이가 속한 병실에 봉사하겠다고 신청한 사람들은 많았어요. 그러나 하나같이 그 사람들 눈에서 진실성, 간절함은 볼 수 없었어요. 그게 루한을 뽑은 이유에요. 아무것도 자신을 증명해줄 수 없는. 어찌보면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는 루한을 뽑은 것은 루한이 그 누구보다 간절했기 때문이에요. 아, 서론이 조금 길어졌네요.. 바로 본론으로 가죠. 루한. 김민석 환자..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외출을 허락해준거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추억 만들어주려고... 당신을 부른거에요. 사실 민석군 병실 아이들 대부분은 얼마 남지 않은 아이들이에요. 아마 본인들도 느끼고 있을거에요. 어린나이에. 당신과 또래 아이들이. 하루종일 저병실에서 하루하루 죽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저 아이들은. 민석이는. 두려워하고 있어요. 루한. 당신의 역할은 바로 이겁니다. 조금 잔인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민석이와 최대한 많은 추억을 만들어줘요. 민석이에겐 기적이란 것은. 저 병실 모든 아이들에게 기적이란 건 없어요. 저 아이들이 마지막 한 잎 남은 꽃잎을 떨어뜨리기 전에 당신이 저 아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주세요. 그리고 저 아이들을 죽는 그 순간까지 두려워하지 않도록 꼬옥 잡아주세요.. 이게 당신의 역할이에요.. 이런 부탁을 하려고 당신같은 진실성, 간절함을 가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거에요. 아무리 내가 의사경력이 많고 실력이 뛰어난다 한들. 두려움에 가득 찬 저 아이들을 편안하게. 후회없게 눈감겨줄 자신이 없더군요.. 루한.. 부탁합니다. 아직 빛을 봐야할 나이지만 빛을 보지못하는 저 아이들에게 가짜 빛이언정 빛이라도 보여주세요..." 의사선생님은 고개를 숙이셨다. 의사선생님의 어깨에서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깊은 죄책감과 슬픔, 그리고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괴로워하는 감정. 그 모든 것이 복잡하게 섞여 의사선생님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예상은 했다. 민석이에게 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병실아이들에게 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속에 던져진 나의 역할도 예상은 했다. 저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주는 것이란 걸.. 그랬기에 민석이에게 모르는 척하면서 물었고. 병실이 울리는 걸 깨닫고 민석이에게 말하는 척하며 병실의 아이들에게 내가 하고픈 말을 전했다. 물론 그 말의 효과가 있는 지 없는 지는 모르지만. 조금 더 그자리에 앉아있다가 멍한 정신으로 대충 목례를 하고 나오려던 찰나 의사선생님의 목소리가 내 가슴을 옥죄여왔다. "부탁해요...루한..." 매우 떨리는 목소리였다. 죄책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그리고 민석이와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다시한번 깨닫게 해주는. 이젠 두려워할 민석이를 편안하게 해주어야함을 깨닫게 해주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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