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라듣기->
양갈래를 곱게 땋고서 허리까지 오는 흰 셔츠를 흔드는 소녀. 희윤은 입안에 달싹대는 단어를 차마 내뱉지 못했다. 다가올 미래를 모른 채 팔꿈치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는 소녀는 기껏 해봐야 희윤의 또래로 보였다. 지친 표정으로 땡볕을 노려보는 눈빛마저도 풋풋함을 숨기지 못했다. 희윤은 다시 입술을 오므리기만 했다. / 경아는 조금 일찍 딸을 낳았다. 이름은 희윤, 성은 경아의 성을 따랐다. 희윤은 어려서부터 똘똘했다. 유일무이한 친구 소영이 자주 들여다보러 왔는데 능청 떨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복도 좋다. 깔깔 웃으며 그리 말하는 소영의 말을 희윤이 완전히 알아듣는 건 아니어도 경아의 기분은 좋았다. 소영은 경아와 고등학교를 거쳐 성인이 되어서도 우정을 유지하던 친구였다 그런 희윤에게도 사춘기 시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너까지 엇나가면 어떡해. 엄마 어떤 상황인지 알잖아. 응?" "내 인생이라고. 제발." 신경질도 내고 그러다가 혼나기도 하고. 정신없던 그 시절에 만난 친구가 있었는데 이름은 정혜였다. "알았어. 네네~ 조만간 갈게요." "누구야?" "엄마." 희윤의 남자친구 제노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온 인연이었다. 쌍방이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친구도 못할 뻔했다. 제노는 이런 희윤 보고 냉정하다고 섭섭해했다. 정혜와는 연락이 끊긴지 오래였다. 사실 끊겼다기보단 정혜의 일방적인 손절이었다. 원래 제노 희윤 정혜는 학창시절 떨어지지 않던 친구 사이였다. 아직도 희윤은 그 이유를 모른다. 어렴풋이 짐작 가는 계절이 있기야 했지만 말로 꺼낸 적은 없다. 벌써 8년 전이었다. / 잠든 기억이 없었다. 점점 시간을 잊어버리는 기분이었다. 희윤도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겼다. 어느 순간 눈을 떴을 때, 희윤은 낯선 곳에서 서 있었다. 아무도 저를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다. 촌구석에 난데없이 떨어진 희윤은 뒤에서 소리치는 목소리와 스쳐 지나가는 인물을 보고 그냥 꿈이겠거니, 곧 깨겠거니 했다. 지나치게 생생했지만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서. "정경아! 밥 먹고 가..! 라니까. 저노무 기집애는! 성격만 급해가지고 어쩌려고." 사진으로만 보던 할머니가 쌩쌩히 돌아다니셨다. 대충 짐작하건대 방금 지나간 소녀를 보고 경아라 불렀다. 엄마의 어린 시절을 생눈으로 보는 경험을 한 사람은 아마 희윤밖에 없을 것이다. 장면은 멋대로 전환됐다. 꿈이라서 그런가. 흔한 볼 꼬집기도 안 해봤지만 꿈이라고 확신했다. 배경은 교실이었다. 학생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고 선풍기가 탈탈 소리 내며 돌아갔다. 제비뽑기 형식으로 다들 작게 접힌 흰 종이를 하나씩 뽑았다. 경아도 그걸 펴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근처에는 소영이 앉아 있었는데 남자애들에게 소리치며 발밑으로 떨어지는 종이를 주우려 상체를 숙였다. 순간 위로 지나가는 브랜드 신발에 소영은 한 번 더 소리를 질렀다. 경아는 소영이 남자애를 쫓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 종이를 주웠다. 얼핏 보이는 이름을 희윤은 슬쩍 읽었다. 그리고 그 옆에 펼쳐진 이름도 보였다. '정경아.' 이름이 무얼 뜻하는지는 교탁에 서서 소리치는 담임의 목소리 덕에 알아챘다. "다들 각자 마니또 확인했지?" 희윤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날의 계절도 찌는 여름이었다. / "정경아! 나재민이 너 찾는다!!" 나재민? 당연히 희윤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밝게 상기된 우율의 볼이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희윤은 모를 다른 어떠한 거 때문인지는 몰랐다. 경아는 희윤에게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어디 다녀왔어?" "옥수수밭! 근데 나재민은?" "오자마자 나재민이야?" 살짝 굳은 마크의 입매를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두리번거렸다. 말희가 재민이 불렀다고 해서 왔단 말이야. 희윤은 처음으로 경아를 보며 눈치 없다 생각했다. 눈치도 자라는 걸까. 희윤이 몰래 학원 빠졌을 때는 어떻게 알고 혼냈으면서. 말희가 잘못 전달했나 보다. 마크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재민이 소영이랑 있어." 희윤은 찰나였지만 그 표정을 알았다. 실망감. 불안함. 마크와 마찬가지로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 경아는 밝게 대답했다. "아, 소영이랑?" "응. 김소영이랑." 애매한 신경전이 느껴졌다. 희윤은 둘 사이에 적응하지 못해 뛰쳐나왔다. 사실 희윤은 소영의 이름을 오랜만에 들어봤다. 경아의 유일한 벗이자 말동무 그리고 아름다웠던 소영이 머릿속을 스쳤다. 경아는 학창시절 남자애들이 다 소영을 좋아했었다고 회상했다. 한동안 슬픔을 회상으로 물리쳤던 경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희윤은 아주 어렸지만 그날의 분위기를 잊지 않았다. "아니, 나재민 완전 어이없지 않아?" 이럴 거면 왜 부른 거야. 구시렁대는 소영은 정갈한 반묶음 틈으로 빠져나온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을 정리했다. 경아는 희윤을 볼 때마다 가끔씩 소영이 생각난다며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기억하는 소영의 모습 그대로였다. 늙지 않았다. 이 감정은 심히 이상했다. 처음 경아를 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네가 이해해. 걔가 원체 엉뚱하잖냐." "넌 이민형이랑 무슨 얘기 했어? 걔가 너 마니또래?" "아니이. 옥수수밭만 뒹굴다가 만난 거라서. 별말 안 했어." "에이, 뭐야. 그러면 우리 둘 다 마니또 맞추기 틀린 거야?" 옥수수를 한입 베어먹은 소영이 투덜댔다. 경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너만 틀렸지. 희윤은 잠시 의문을 가졌다가도 작게 끄덕였다. "내가 너 마니또 맞춰볼까?" "소용없어. 넌 몰라." 내가 왜 몰라? 순수한 궁금증이었지만 옥수수를 넘겨받은 경아는 한입 베어 물며 침묵했다. 아까 교실에서 본 종이가 떠올랐다. '김소영.' 보통 사람들은 소영의 미소를 보고 반했다고 한다. 경아도 마찬가지로 소영의 미소를 보고 반했을지도 모른다. 종이를 확인했다면 소영도 마니또 역할을 잘 수행해냈을 거란 가정이 문득 들었다. 얽히고설켜 단순한 문제가 복잡해지는 게 싫었다. 이런 사소한 문제마저도 해결하지 못했으니까. 소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그냥 옥수수나 뜯어먹으며 흘려보낼 문제인데. 희윤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눈물을 쏟아냈다. 슬프다기보단 벅찼다. 이유 모를 벅참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경아의 인생을 들여보다 자기도 모르게 본인에게 대입해 버린 탓이었다. 정혜는 희윤의 마니또였다. 마찬가지로 희윤도 정혜의 마니또였다. 주변에 장난질에 희윤이 종이를 잃어버렸다. 그걸 주운 건 정혜였지만 마니또란 이유로 비밀로 했다. 그게 시초일 줄 알았다면 후회할 일도, 지금처럼 누군가를 대신해 울지도 않았을 텐데. "어디 다녀왔어?" "옥수수밭! 근데 나재민은?" "오자마자 나재민이야?" 살짝 굳은 마크의 입매를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두리번거렸다. 말희가 재민이 불렀다고 해서 왔단 말이야. 희윤은 처음으로 경아를 보며 눈치 없다 생각했다. 눈치도 자라는 걸까. 희윤이 몰래 학원 빠졌을 때는 어떻게 알고 혼냈으면서. 말희가 잘못 전달했나 보다. 마크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재민이 소영이랑 있어." 희윤은 찰나였지만 그 표정을 알았다. 실망감. 불안함. 마크와 마찬가지로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 경아는 밝게 대답했다. "아, 소영이랑?" "응. 김소영이랑." 애매한 신경전이 느껴졌다. 희윤은 둘 사이에 적응하지 못해 뛰쳐나왔다. 사실 희윤은 소영의 이름을 오랜만에 들어봤다. 경아의 유일한 벗이자 말동무 그리고 아름다웠던 소영이 머릿속을 스쳤다. 경아는 학창시절 남자애들이 다 소영을 좋아했었다고 회상했다. 한동안 슬픔을 회상으로 물리쳤던 경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희윤은 아주 어렸지만 그날의 분위기를 잊지 않았다. "아니, 나재민 완전 어이없지 않아?" 이럴 거면 왜 부른 거야. 구시렁대는 소영은 정갈한 반묶음 틈으로 빠져나온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을 정리했다. 경아는 희윤을 볼 때마다 가끔씩 소영이 생각난다며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기억하는 소영의 모습 그대로였다. 늙지 않았다. 이 감정은 심히 이상했다. 처음 경아를 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네가 이해해. 걔가 원체 엉뚱하잖냐." "넌 이민형이랑 무슨 얘기 했어? 걔가 너 마니또래?" "아니이. 옥수수밭만 뒹굴다가 만난 거라서. 별말 안 했어." "에이, 뭐야. 그러면 우리 둘 다 마니또 맞추기 틀린 거야?" 옥수수를 한입 베어먹은 소영이 투덜댔다. 경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너만 틀렸지. 희윤은 잠시 의문을 가졌다가도 작게 끄덕였다. "내가 너 마니또 맞춰볼까?" "소용없어. 넌 몰라." 내가 왜 몰라? 순수한 궁금증이었지만 옥수수를 넘겨받은 경아는 한입 베어 물며 침묵했다. 아까 교실에서 본 종이가 떠올랐다. '김소영.' 보통 사람들은 소영의 미소를 보고 반했다고 한다. 경아도 마찬가지로 소영의 미소를 보고 반했을지도 모른다. 종이를 확인했다면 소영도 마니또 역할을 잘 수행해냈을 거란 가정이 문득 들었다. 얽히고설켜 단순한 문제가 복잡해지는 게 싫었다. 이런 사소한 문제마저도 해결하지 못했으니까. 소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그냥 옥수수나 뜯어먹으며 흘려보낼 문제인데. 희윤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눈물을 쏟아냈다. 슬프다기보단 벅찼다. 이유 모를 벅참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경아의 인생을 들여보다 자기도 모르게 본인에게 대입해 버린 탓이었다. 정혜는 희윤의 마니또였다. 마찬가지로 희윤도 정혜의 마니또였다. 주변에 장난질에 희윤이 종이를 잃어버렸다. 그걸 주운 건 정혜였지만 마니또란 이유로 비밀로 했다. 그게 시초일 줄 알았다면 후회할 일도, 지금처럼 누군가를 대신해 울지도 않았을 텐데. "어디 다녀왔어?" "옥수수밭! 근데 나재민은?" "오자마자 나재민이야?" 살짝 굳은 마크의 입매를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두리번거렸다. 말희가 재민이 불렀다고 해서 왔단 말이야. 희윤은 처음으로 경아를 보며 눈치 없다 생각했다. 눈치도 자라는 걸까. 희윤이 몰래 학원 빠졌을 때는 어떻게 알고 혼냈으면서. 말희가 잘못 전달했나 보다. 마크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재민이 소영이랑 있어." 희윤은 찰나였지만 그 표정을 알았다. 실망감. 불안함. 마크와 마찬가지로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 경아는 밝게 대답했다. "아, 소영이랑?" "응. 김소영이랑." 애매한 신경전이 느껴졌다. 희윤은 둘 사이에 적응하지 못해 뛰쳐나왔다. 사실 희윤은 소영의 이름을 오랜만에 들어봤다. 경아의 유일한 벗이자 말동무 그리고 아름다웠던 소영이 머릿속을 스쳤다. 경아는 학창시절 남자애들이 다 소영을 좋아했었다고 회상했다. 한동안 슬픔을 회상으로 물리쳤던 경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희윤은 아주 어렸지만 그날의 분위기를 잊지 않았다. "아니, 나재민 완전 어이없지 않아?" 이럴 거면 왜 부른 거야. 구시렁대는 소영은 정갈한 반묶음 틈으로 빠져나온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을 정리했다. 경아는 희윤을 볼 때마다 가끔씩 소영이 생각난다며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기억하는 소영의 모습 그대로였다. 늙지 않았다. 이 감정은 심히 이상했다. 처음 경아를 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네가 이해해. 걔가 원체 엉뚱하잖냐." "넌 이민형이랑 무슨 얘기 했어? 걔가 너 마니또래?" "아니이. 옥수수밭만 뒹굴다가 만난 거라서. 별말 안 했어." "에이, 뭐야. 그러면 우리 둘 다 마니또 맞추기 틀린 거야?" 옥수수를 한입 베어먹은 소영이 투덜댔다. 경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너만 틀렸지. 희윤은 잠시 의문을 가졌다가도 작게 끄덕였다. "내가 너 마니또 맞춰볼까?" "소용없어. 넌 몰라." 내가 왜 몰라? 순수한 궁금증이었지만 옥수수를 넘겨받은 경아는 한입 베어 물며 침묵했다. 아까 교실에서 본 종이가 떠올랐다. '김소영.' 보통 사람들은 소영의 미소를 보고 반했다고 한다. 경아도 마찬가지로 소영의 미소를 보고 반했을지도 모른다. 종이를 확인했다면 소영도 마니또 역할을 잘 수행해냈을 거란 가정이 문득 들었다. 얽히고설켜 단순한 문제가 복잡해지는 게 싫었다. 이런 사소한 문제마저도 해결하지 못했으니까. 소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그냥 옥수수나 뜯어먹으며 흘려보낼 문제인데. 희윤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눈물을 쏟아냈다. 슬프다기보단 벅찼다. 이유 모를 벅참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경아의 인생을 들여보다 자기도 모르게 본인에게 대입해 버린 탓이었다. 정혜는 희윤의 마니또였다. 마찬가지로 희윤도 정혜의 마니또였다. 주변에 장난질에 희윤이 종이를 잃어버렸다. 그걸 주운 건 정혜였지만 마니또란 이유로 비밀로 했다. 그게 시초일 줄 알았다면 후회할 일도, 지금처럼 누군가를 대신해 울지도 않았을 텐데.비디오 태그를 지원하지 않는 브라우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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