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멀고 먼 옛날의 세상은 태양과 달, 그리고 지구만이 존재했답니다. 뜨겁고도 뜨거운 태양을 다스리는 '태양의 신'은 태양 뿐만 아니라 달과 지구도 다스렸지요. 어느 날부터 태양의 신은 지구에 생명들을 불어넣기 시작했고, 그 수 많은 생명들 중 하나가 바로 인간이랍니다. 인간들은 정말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서 서로를 도와주고 사랑하며 평화롭게 살아갔어요. 하지만 그 평화로움은 잠시였고 악(惡)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답니다. 무차별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들 때문에 태양의 신은 쉴 틈이 없었죠. 그는 자신을 대신해서 선한 인간들을 다스려 줄 인간이 필요했어요. 아주 많은 인간들 중 한 사람을 뽑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밤을 새가며 신중하게 골랐답니다. 긴 고심 끝에 그는 땅끝 어딘가에서 가정을 꾸리고 오손도손 살아가는 한 남자를 지목했어요. '김'가의 사람이었죠. 김씨는 이미 소문이 자자했어요. 정말 착하고, 정말 마음씨가 곱고, 자신의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요. 마음씨가 얼마나 착한지, 그는 가난에 몸부림 치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돈을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느라 자신마저도 가난해질 지경에 이르렀었던 사람이었어요. 그는 태양의 신의 부탁 아닌 부탁을 받고서, 자신은 사람을 다스릴 줄 모른다며 거절을 했지만, '자네가 아니라면 인간들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이 세상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저 지켜만 볼 텐가?' 겁을 주는 태양의 신 때문에 그 부탁을 받아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김씨는 그 선한 마음씨로 인간들을 지혜롭게 다스렸어요. 악인들마저 그의 마음씨에 감탄을 하고 갔으니, 태양의 신은 아주 만족스러워했고 김씨에게 '평화신'이라는 별칭도 붙여주었어요. 하지만 태양의 신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답니다. 그것은 바로 김씨가 인간이라는 점이었어요. 인간은 언젠가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잠시 잊은 것이었죠. 태양의 신과 김씨는 큰 고민에 빠졌어요. 후에 김씨가 죽게 되면, 또 다시 누군가 사람들을 다스려야 하는데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거든요. 그렇게 고민이 이어지던 어느 날, 태양의 신은 김씨를 세레니티산(태양의 신과 평화신이 만남을 가지는 곳)으로 불러냈어요. 그리고선 김씨를 깜짝 놀래킬 말들을 늘어놓았죠.
'자네의 자손들이라면 틀림 없이 고운 마음씨를 타고날 것 같군. 그래서 말일세, 평화신의 자리를 자네의 자손들이 이어가는 것은 어떠한가.'
그래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자신의 자손들이 평화신의 자리를 이어간다니.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김씨는 당연히 거절하려 했어요. 그럴 수는 없다고요. 하지만 이번에도 태양의 신은 강경했습니다. '매번 평화신을 꼽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것 보단 낫다고 생각되네. 지금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자네의 자녀들은 착하디 착하지 않은가.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어. 자네의 자손들이 평화신의 자리를 이어가게 될 것이야.' 그럴 거면 왜 물어본 것인지. 김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어요. 이번에도 김씨는 태양의 신을 이길 수가 없었거든요.
태양의 아이
Written by. Romanticism
"김탄소양의 생일을 축하하며, 파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와아아-!'하는 큰 환호 속에서 케이크가 내 앞으로 다가왔으며 나는 인위적으로 입바람을 불었다. 나의 입바람에 열여섯 개의 촛불이 한 번에 사라지니 환호는 더욱이 커져갔다. 하지만 내 표정은 밝아지긴 커녕 더욱 어두워져 갔다. 일 년에 한 번 맞이할 수 있는 나의 생일은 언제나 그랬듯이 크게 치루어졌다. 내가 '평화신'의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렇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평화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들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살았다. 나는 그 사실에 늘 불만을 가지고 살았다. 평화신이라는 아버지는 겉으로는 선한 척, 착한 척. 별의 별 척은 다 하면서 속으로는 너덜너덜해진 걸레마냥 더럽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건 어머니도,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다스려야 하는 자신의 위치를 남용해서 사람들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그러면서 온화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미소를 띠겠지. 생각만해도 구역질이 났다.
"탄소야, 생일 정말 축하해!"
"여기 내 선물이야. 이번에 $$에서 새로 나온 신발인데, 딱 네가 생각 나더라구!"
"나는 @@@디자이너가 직접 디자인 한 목걸이 가져왔어. 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목걸이야. 꼭 끼고 다녀주라."
말이 내 생일파티였지, 이곳은 사람들의 인맥을 넓히는 데 이용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다들 진심으로 축하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나와 어떻게 친해질까, 평화신과 어떻게 한 편이 될까. 이딴 꾀나 부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들을 한 두번 보는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나는 이런 더러운 사교계에 일찍 눈을 뜬 편이었기에. 물론 나의 어머니란 사람 덕분이었다. 더럽다, 더럽다 하면서도 이런 곳에 발을 두지 않을 수 없는 나 자신도 더럽다고 느껴졌다. 어머니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곳에서 몰래 빠져나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홀로 은은한 빛을 내는 달이 참 예뻤다. 나는 언제쯤 저런 달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늘 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세상을 밝혀주는, 더러운 세상 속에서 선한 사람들을 지켜내주는. 나의 아버지, 어머니처럼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이 아닌. 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나의 꿈을 짓밟았다. 너는 이 세상의 꼭대기에 올라 서야 한단다. 너는 이 세상을 거머쥐는 사람이 되어야 한단다. 아버지만 믿거라, 어머니만 믿거라. 나는 그 사람들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과연 내가 꼭대기에 올라 선다고, 이 세상을 거머쥐고 사람들을 흔든다고 행복해질까. 답은 '아니오.'이다. 그들은 늘 오답만을 나에게 강조하며 나를 괴물로 만들려고 했다.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데.
"안녕."
익숙하지만 모르는 척 하고 싶은 목소리였다. 왜 나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하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놈이었다, 전정국은. 지금 내 시간을 방해하는 인간은 내 오빠의 여자친구라고 하기엔 이상한, 그래 정혼자라고 해두자. 결혼을 약속한 사람, '전정연'의 동생이다. 어렸을 적부터 자주 보았던 사이지만 나는 전정국을 싫어했다. 늘 나의 시간을 빼앗아갔으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더러운 속내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전정국은 늘 자신을 숨기고 가면을 쓴 채로 사람을 대한다. 절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저 가면을 뜯어내면, 더럽고 추악한 얼굴이 나타날 것이 분명했으니까.
"오늘 달이 참 밝네."
자신의 인사에 대답도 하지 않았건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혼잣말을 하는 전정국에 콧방귀가 나왔다. 내 시간을 방해하는 사람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냥 전정국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전정국과 말을 섞을 때면 늘, 나도 전정국 같은 사람이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는 그 기분이 아버지, 어머니의 추악한 모습들을 지켜보는 것만큼 끔찍했다. 단호하게 뒤를 돌아 그 공간을 빠져나가려는 나를 붙잡은 것은 전정국의 목소리였다. '너도 알면서 참.' 내가 뭘 안다고, 자기는 뭘 안다고. 뭐라도 아는 사람처럼, 어린 아이를 훈계하려는 듯이 말을 붙이는 게 짜증났다. 질척거리는 놈.
전정국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다시 빠져나가려는 순간, 전정국이 또 다시 나를 붙잡았다. '아, 정말 모르는 거야?' 뻔뻔함과 가식이 잔뜩 묻어나오는 그 목소리가 내 귓가를 더럽혔다.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고 싶었지만 그 욕설은 곧 목구멍으로 삼키어야 했다.
"정우형이랑 정연누나 결혼이 끝이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 그 둘만의 결혼으로 끝이 날 거라고 생각하냐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전정국의 눈동자에는 장난스러움이 넘실거렸다. 매사에 진지하지 못하는 놈이었다.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되었다. 더 들어봤자 내 손해라고 생각됐다. 전정국을 외면하고 다시 공간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그 둘 결혼하면,"
"......"
"너랑 나랑 약혼해."
"뭐라고?"
"이런. 정말 몰랐나 보네."
이번에는 욕설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아버니와 어머니께 가서 이게 무슨 좆같은 소리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다시 몸을 돌려 전정국을 바라보자 아직도 그의 눈동자에는 장난스러움과 뻔뻔스러움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마.' 눈을 부릅뜨고 말하자, 장난스러움과 뻔뻔스러움이 가득이던 전정국의 눈동자가 공허해졌다. 순식간이었다, 전정국이 자신의 모습을 바꾼 것은. 내 예상과 마찬가지로 전정국은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이었다.
"어쩌나. 그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진짜라서."
"야."
"20살이 되는 해, 네 생일에 결혼할 거야."
"야, 전정국."
"상상만 해도 행복하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네 모습."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저런 말을 해주었다면 참 달았을 텐데. 하지만 저 말을 내뱉는 사람은 전정국이었다. 그 달디 단 사랑의 속삭임은, 더럽디 더러운 말이 되었을 뿐이었다. 전정국과 말을 섞을 시간이 아까웠다. 당장 아버지와 어머니께 가야 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사실을 캐내야 했다. 전정국과 나의 결혼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몸을 돌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실 곳으로 향했다. 뒤에서 전정국의 비웃음이 내 귓바퀴를 타고 흘러왔다. 귀가 한쌍이라도 더 있었다면, 당장 귀를 뜯어내는 건데. 입 안으로 욕설을 웅얼거렸다. 분노를 조절하기가 힘에 겨웠다. 이렇게까지 화가 난 적은 처음이었다.
***
학교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오니, 평소보다 유독 태양이 밝은 느낌이었다. 내 눈을 괴롭히는 햇빛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니 평소보다 부풀어오른 듯한 태양이 나를 바라보는 듯 했다. 오늘따라 무언가 변한 게 많은 것 같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태양도. 예감이 좋지 않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기었다. 학교로 가는 발걸음은 정말 가벼웠다. 하지만,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서는 안 됐었다. 아니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그랬기에 그를 만날 수 있었고, 아버지와 어머니께 벗어날 수 있었고, 전정국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의 품에 안길 수 있었으니까. 내가 그 징조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정말로 다행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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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조각글을 들고 왔어요. 음, 그냥 나중에 써보고 싶은 판타지물이랄까요. 제가 로맨스도 좋아하지만 추리나 판타지에도 굉장히 좋아해서요. /ㅅ/
태양의 신이 누구일지 맞추신 분께는 작은 선물(?)을 드려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실 오늘 신을 등장시켜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기엔 글이 너무 짧고, 시간도 없어서 등장시키지 못했어요. 열심히 생각해보세요.^ㅁ^
암호닉은 다음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