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prologue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의 눈빛은 짙은 노란색, 그 사람 뒤로 보이는 아주 큰 달은 차디 찬 붉은 색. 내가 서 있는 이 땅의 색은, 하늘색. 몽롱하게 눈을 떠 나도 모르게 오묘한 회색 빛깔의 새를 따라가보면 가끔 보이는 이 곳의 풍경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질 때 쯤, 그와 내 만남은 끝이 났다.
“안녕.”
“안녕.”
“오랜만이네.”
“응,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나쁘지 않았어. 넌?”
“난 별로. 네가 오지 않은 덕에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았거든. 네가 보고 싶었나봐.”
“미안.”
“오늘도 파랑새를 따라왔나보네.”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에는 은빛의 푸른 색으로 보이는 작은 새를 그들은 ‘파랑새’라고 불렀다. 처음엔 눈 앞에 나타난 사람에게 저 새의 이름을 물었고, 그 뒤로는 어째서 그 새의 이름이 ‘파랑새’인지 물어봤지만 언제나 ‘파란색이잖아.’ 라는 말을 뱉곤 했다. 처음엔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아 몇 번이고 어떻게 저게 파란색이냐며 되물었지만, 그 역시도 내가 보는 색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해 수긍하기로 했다. 반복해서 만난 그 새의 색이 이제는 점점 파란색으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도 그는 정원에 있어?”
“응. 오늘 쯤이면 꽃이 필 거라고 했거든.”
“저기는 눈이 쌓여 있잖아. 정원에 꽃이 어떻게 펴.”
“글쎄, 가보면 알겠지.”
다른 건 다 적응이 돼도 저 문의 크기는 절대 적응이 되지 않을 거라며 언젠가 그에게 중얼거렸던 문이 열리고나니 문 밖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여기가 이런 풍경인 적이 있었나. 올 때마다 눈이 가득했던 것 같은데. 당장 저 문이 열리면, 눈이 가득한 풍경이 펼쳐지는데 말이다.
“그의 기분에 변화라도 생긴 거야?”
“글쎄. 그에게 직접 물어봐. 이제 곧 만날 거잖아.”
어깨를 으쓱이는 남자를 따라 한참을 걸었을까, 다시 눈 앞에 나타난 ‘파랑새’에 홀린 듯 따라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를 안내하던 남자는 사라지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예쁘게도 물들여진 정원의 빛깔은 보라색, 분홍색. 그도 아니면 노란색. 그 중에서도 단숨에 눈에 들어오는 가장 익숙한 건 정원 한 가운데에 서있는 그의 뒷모습이다. 난 한 달, 그는 얼마만일까.
“태형아!”
내 목소리 덕에 뒤를 돌아본 그는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 말갛게 웃어보였다. 이 곳에서 뛰는 사람, 아니 뛸 수 있는 무언가는 나뿐이지 않을까, 따위의 생각이나 해대며 넓은 정원 한 가운데로 뛰어가니 언제나 같은 미소로 나를 반겨주는 얼굴을 보며 따라 웃었다. 왜 이제 왔냐며 핀잔을 주기는커녕 언제 봐도 같은 얼굴로 나를 맞이하는 그의 뒤로 보이는 잔디, 아니 연두빛의 물길에 붉은 달빛이 비추어 눈길을 사로잡는 색을 띄고 있었다.
“안녕.”
“안녕.”
“못 보던 물 길이네.”
“응. 마음에 들 지 모르겠다.”
“마음에 들지. 너무 예쁘다. 네가 만들었어?”
“응. 이번엔 네가 좀 늦을 것 같아서.”
“미안. 얼마나 기다렸어?”
“글쎄. 6개월쯤? 모르겠어. 여섯번째 달까지는 세었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잘 안 나.”
“더 일찍 왔어야 되는데. 미안해.”
사과에도 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나른한 얼굴로 눈을 느릿하게 감은 채로 바람에 살랑이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꽃은 언제 피운 거야?”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았어. 이번엔 틀림없이 네가 올 것 같았거든. 내가 맞았네.”
“너는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나는 네가 만들었는 걸.”
가끔은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뱉는 그이기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이 곳에서 만큼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고개만 끄덕였다. 내 머리카락과 같이 바람에 흔들리는 노을 빛깔의 풀들에 허리를 숙이고 손을 뻗어 만지려다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깐 망설이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여주는 그를 눈에 담고 나서야 풀을 쓰다듬자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이 절로 기분을 들뜨게 만들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닿았던 풀이 진한 주홍빛으로 반짝이는 걸 눈에 담았다. 저 끝에 드리운 붉은 달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