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친의 정석
(부제: 소꿉친구 아닌 소꿉친구)
“...와, 지금 몇 시지?”
나 웬일이래. 그렇게 중얼거리는 말이 생소하게 느껴질 만큼, 간만에 정말 여유롭게 눈이 떠졌다. 물론 졸린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 나가면 지각할까 노심초사하며 버스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미련 없이 이불 속에서 꼼지락대던 몸을 일으켰다.
씻고 나왔음에도 아직 졸음이 완전히 깨지 않은 눈으로 와이셔츠 단추를 꿰어 입으면서도 괜히 길어진 소매를 한 번 확인해 보았다. 벌써 여름의 끝자락에 서서 가을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진다.
바뀐 교복이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매번 하복에서 춘추복으로, 춘추복에서 동복으로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성큼 다가온 계절의 경계는 늘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교복을 입고 맞이하는 마지막 가을이라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여러 모로 새로운 느낌이었다.
넥타이와 명찰, 학생증까지 모두 챙겼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집 밖으로 걸음을 뗐다. 밖으로 나오는 나를 반기기라도 하듯 길게 펼쳐진 하늘이 파랗게 색을 입은 모습이 예뻤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적당히 선선한 날씨가 계절이 바뀌었음을 다시금 실감하게 한다.
오늘따라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고, 그에 맞춰 기분도 붕 뜨는 것만 같았다. 간만에 여유로운 등굣길이라 그런 건지, 그게 아니면 화창한 날씨 탓인지는 몰라도 괜히 실실 웃게 되는 날이었다. 물론 그 웃음은 멀리서 오는 버스를 보자마자 찌그러졌지만.
“...그냥 늦게 탈 걸.”
억지로 몸을 구겨 넣자마자 출발하는 버스에 휘청이며 겨우 자리를 잡은 내가 뱉어낸 말이었다. 늦게 탈 걸. 그냥 좀 더 밍기적대다 나올 걸.
일곱 시를 넘긴 후부터 아홉 시 직전까지 거의 두 시간에 달하는 출근 시간대에는 언제 버스를 타도 만원일 거라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많은 학생들 사이로 불편하게 낀 몸이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느낌에 한숨을 쉬었다. 이럴 거면 침대에 더 누워 있을 걸.
불편한 자세로 몇 정거장을 지나니 어정쩡한 자세로 오래 서 있느라 아파오는 허리를 두들기며 상체를 살짝 숙였다. 어째 평소에 타는 시간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은데. 그렇게 투덜대자마자 어깨 위로 얹어지는 손 때문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놀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내 눈가를 부비며 씩 웃는 얼굴의 주인은,
“눈 부었다, 잠탱아.”
권순영이었다.
*
“꼬맹이, 아직 잠 덜 깼어?”
“꼬맹이라고 하지 말랬지.”
“꼬맹이잖아. 잠 덜 깬 게 아니면, 걷기 싫어?”
“잠 다 깼거든? 걷기 싫다고 하면 뭐, 업어 주게?”
“뭐래. 허리 부숴먹을 일 있냐.”
“어디 하나 부러지고 싶지?”
투덜거리는 제 말에도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약간 앞서 걷는 권순영의 뒤통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쟤 처음 봤을 때는 저런 이미지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뺀질거리는 성격과는 달리 동글동글 귀여운 뒷머리를 보며 걸으려니, 녀석을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이 났다.
권순영을 처음 마주한 것은 막 중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다. 선생님이셨던 어머니의 주도 하에 고등학교 선행 학습이라는 명목의 과외를 받고 있던 시기였는데, 간만에 친구들과 만나서 놀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갑자기 학생이 셋이나 늘어나 있었더랬다. 물론 권순영도 그 중 하나였고.
씻고 나오자마자 방문 앞에서 쭈뼛대는 시커먼 남자 셋을 보고 뭐냐는 듯 엄마에게 눈짓하자마자 돌아오는 대답이 굉장히 그럴싸했다. 아빠 친구 아들이랑, 엄마 친구네 아들들. 그러려니 하며 녀석을 올려다보았다가 눈을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 이 새끼 존나 일진이구나.
‘야.’
‘......어?’
‘나 지우개 좀 빌려가도 되냐.’
‘아, 어. 갖다 써.’
‘고마워.’
센 인상에 지레 겁을 먹고 멀찍이 떨어져 앉으려던 내 다짐과는 다르게 내 옆자리를 차지하게 된 녀석은 생각보다 얌전했고, 낯을 꽤 가리는 듯 말이 없었다. 아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본 두어 시간 동안은 지우개를 빌릴 때 말고는 정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으니까.
그게 수업 중이라 그랬던 거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정도도 정말 조용했던 거지. 친화력 대장 권순영 성격이 어디 가겠냐고.
“꼬맹이, 자꾸 뒤처진다? 기껏 일찍 나와서 지각하고 싶냐.”
“...어?”
“이게 또 걸으면서 한 눈 팔지.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예전 일들을 생각하느라 멍하니 걷고 있는데, 불쑥 뻗어진 손이 팔을 잡아끌었다.
뜬금없이 팔이 붙들려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니, 살짝 인상을 쓰며 나를 내려다보는 권순영의 모습이 딱 첫인상을 떠올리게 해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쫄기는, 하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살짝 밀어낸 녀석이 팔을 잡은 손을 떼지 않고 그대로 올려 내 어깨에 두른다.
이건 또 뭐 하는 짓이래. 어깨에서 내려갈 생각을 않는 녀석의 팔을 보고 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올려다보니, 어딘가 좀 신난 얼굴로 걷고 있던 권순영이 내 쪽을 내려다보며 능청스레 웃었다.
“뭐가 또 불만이야. 오빠 타겠다.”
“오빠 같은 소리하고 있네. 안 치워?”
“안 치워.”
“아, 무겁다고!”
무겁다는 내 말은 고이 씹어 드신 것도 모자라 나를 더 약올리려는 모양인지 어깨에 올린 손을 제 쪽으로 당겨 더 붙어오는 녀석이 얄미웠다. 정강이든 배든 한 번 까고 튀어버릴까, 생각하다가도 100미터 달리기 기록이 20초였다는 걸 상기하자마자 일찌감치 포기하고 축 처진 채로 걸었다. 어차피 이 새끼랑 반 다르니까 조금만 더 버티자, ㅇㅇ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
“꼬맹이, 오늘도 수업 잘 들어라. 놀러 올게.”
“학교가 노는 곳이냐? 헛소리 말고 가기나 해.”
“하여간 앙탈은. 간다.”
“아, 진짜 이 새끼가. 야!”
능청을 떨며 머리를 헝크러트린 녀석 때문에 짜증스레 머리를 정리하며 노려보자 실실 웃는 낯으로 그대로 제 반이 있는 층으로 올라가버린다.
진짜, 권순영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 약간 엉킨 머리를 빗어내리며 투덜투덜 궁시렁대다 자리에 앉으려는데 친구 영희가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오늘도 깨가 쏟아지네?
“넌 이게 깨 쏟아지는 모습으로 보이냐?”
“아니야? 애칭도 있잖아. 꼬맹이.”
꼬맹이이, 하며 말꼬리를 늘려 놀리듯 이야기하는 영희의 모습도 나를 놀리며 신나게 웃는 녀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것들은 나 놀리는 걸 왜 이렇게들 좋아해.
투닥거리다가도 어느새 나란히 앉아 조잘거리는 영희와 내 사이로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야아, 너네 또 둘이 무슨 이야기 하는데!
수업 직전의 왁자지껄함 사이에서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뒤늦게 끼어들게 된 하연이가 괜히 투덜거렸다. 권순영 저건 왜 맨날 우리 반에 있다가 자기 반으로 올라가는 거래?
“얘 때문이잖아. 맨날 얘 데려다 주고, 놀러 오고. 몰랐어?”
“아, 뭘 데려다 줘. 우리 반이 중앙 계단 바로 앞에 있어서 그런 거구만.”
“에이, 아닌 것 같은데? 권순영 우리 반에 친한 여자애 없잖아.”
“이지훈 있잖아. 전원우도 있고.”
“나 왜.”
갑작스레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깨를 감싸 잡는 손길에 위를 올려다보니 상체를 살짝 빼어 우리를 훑어보는 전원우가 보였다. 무슨 이야기 하는데? 녀석의 말에 놀란 표정이던 아이들이 앞 다투어 입을 열었다. 권순영이 얘 보러 오는 거, 사실이잖아.
“솔직히 권순영 친한 여자애 얘 하나 아냐? 얘 맨날 보러 오고.”
“아, 진짜 얘네 설레발 오져. 야, 해명해 봐. 빨랑.”
“우리 보러 오는 건데? 이거 뭐 예쁘다고 보러 와, 보러 오길.”
“...?”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순간적으로 욱한 마음에 전원우를 향해 주먹을 들어보이자 녀석이 장난이라며 내 주먹을 감싼 채 웃는다. 여전히 저들끼리 떠드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니 흥미가 떨어졌는지 또 다른 주제를 꺼내는 아이들은 아침 자습이 끝난 쉬는 시간에도 여전했다. 그새 졸음이 찾아와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두고서도 시끌시끌 떠드는 소리에 인상을 쓰자마자 미간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찼다.
“주름 생겨. 더 못나지려고?”
“이게 또 시비 걸지. 다른 애들은 어디다 버리고 혼자 와?”
“매점 갔겠지. 너도 갈래?”
“귀찮아.”
“그럴 줄 알았다. 왜 안 자.”
왜 안 자고 있냐는 물음에 어느 새 몸까지 동원해 신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영희를 가리키자 녀석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멍하니 아이들을 보고만 있자 조용히 옆에 있던 권순영이 잠깐 어디론가 사라진다. 지네 반으로 갔겠지, 귀찮은 마음에 엎드리려 하니 책상 위로 무언가 툭 떨어졌다. ...우유?
거의 던져지다시피 놓인 우유를 집어 들고 고개를 들자마자 보인 것은, 뛰었는지 헉헉대며 제 앞에 선 권순영이었다.
“야, 먹고 자. 아침 안 먹고 왔잖아, 너.”
“입맛 없어.”
“누가 밥 먹으랬냐? 괜히 힘 없다고 칭얼대지 말고, 이거 먹고 자.”
녀석의 퉁명스러운 말에 달리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아침을 안 먹고 다녀서 늘 오전에는 기운이 없는 나를 이렇게나 잘 아는 사람은 권순영 뿐일 거다.
안 먹으면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닦달할 녀석임을 알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우유 곽을 고쳐 잡았다. 생각보다 잘 안 뜯기는 건지, 졸려서 힘이 안 들어가는 건지 잘 안 뜯기는 입구를 붙들고 끙끙대자 한숨을 쉰 녀석이 우유를 낚아채 입구를 뜯고 빨대까지 꽂아 물려주고는 아프지 않게 딱밤을 놓는다. 손 많이 가게 해, 하여튼. 투덜거리는 건 덤.
“투덜거릴 거면서 왜 사 와?”
“아침 안 먹었다고 징징거릴 거 보기 싫어서. 700원이다.”
“달라고?”
“그럼 맨입으로? 누군 돈이 썩어나냐?”
“와, 대박. 누가 사달랬나. 돈 뜯는 거 봐.”
양아치 새끼. 투덜거리며 초코우유를 입에 문 채 치마 주머니를 뒤적거려 동전을 찾자 제 팔을 잡은 권순영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돈 달라며?
퉁명스레 뱉어낸 말에 슬쩍 웃음 지은 녀석이 선심 쓴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꼬맹이 돈 뜯어서 뭐 해. 그걸로 이따 하나 더 사먹던가.
굳이 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야 개이득이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웃으며 주절대는 권순영의 허세는, 뭐...
“나한테 빌린 돈이나 갚고 말해, 병신아.”
어느새 다가온 이지훈의 차가운 말에 의해 빛을 잃었지만.
안녕하세요, |
순영이 글로 돌아온 정석입니다! 제목부터 제 필명이 들어가 있으니 거 참 좋네요. (코쓱) ㅋㅋㅋㅋㅋㅋㅋ 오랜만인데 핵노잼 글 들고 와서 죄송해요... ㅋㅋㅋ... 겨울에 가을 글이라니, 몰입 1도 안 될 것 같은데 답이 없네요. 콘티 하루만에 짜고 바로 글 쓰려니 겁나 퀄리티 엉망... 안 그래도 엉망인 글 솜씨인데... (울뛰) 음, 순영이랑은 그리 오래된 친구는 아니지만 서로의 버릇이나 뭐 이런 건 대충 다 꿰고 있을 만큼 친한 사이를 베이스로 잡았어요. 겪었던 일 중에 괜찮은 에피 넣고 싶어서... 실제로 여기 나온 순영이 말투에서 오빠병만 빼면 제 남사친 말투랑 똑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단 길게 10편 이상으로 빼 보려고 쓰긴 했지만 다시 봐도 노잼이네요. 설렘이 1도 없는 설렘글이라니... 급하게 써서 그런가... 8ㅅ8 나름의 재정비 시간이었는데 정리가 안 된 것 같아서 죄송할 따름이에요. 더 노력해서 설레는 글 가져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반성) 아, 그리고 암호닉은 새로 받아야 하나 원우 글에 이어받아야 하나 고민 중인데, 일단은 분리해 둘게요. 혹시 신청해주실 분이 있으시면 대괄호 안에 예쁘게 넣어서 신청해주십사... 네... 댓글 달고 포인트 받아가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