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 밖으로 삐져나온 전정국의 와이셔츠를 붙잡았다. 뒤로 몸을 돌린 전정국이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함께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가의 근육은 움직일 능력이 없다. 다시 내가 웃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웃음을 거뒀다. 실컷 지을 미소이니 지금부터라도 얼굴을 가만히 놔두는 게 낫다. 문이 열리고, 전정국이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푹신한 보라색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민윤기를 대충 의식하고 그의 옆으로 가 앉았다. 앉기야 앉았으나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 들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고야 말았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주위를 좀 둘러보다가 세트장 밖에 있는 전정국을 손짓으로 불렀다. 단숨에 달려와 내 앞에 선 전정국이 나를 내려다봤다. 입술을 앙다문 채 구석에 있는 피자 조각을 손으로 가리켰다. 피자에 눈길을 한 번 두고 전정국을 올려다 보니 전정국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풀이 죽어 다시 세트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도저히 민윤기의 옆자리에 다시 한 번 앉을 용기는 나지 않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 곱상한 얼굴을 하고 가만히 앉아 있던 민윤기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입모양으로 욕지거리를 뱉더니 중얼거린다. ‘정신 사나우니까 앉아 있어.’
쇼윈도 부부
1
한 시간쯤 지나 토크쇼 엠씨가 세트장에 도착하고, 카메라에 빨간 불이 켜졌다. 엠씨는 부드러운 말솜씨로 쇼를 진행해 나갔다. 민윤기 역시 오랜 시간 사람을 대해 온 사람답게 사근사근한 말투로 대답을 이어갔다. 녹화가 시작된 지 한 시간쯤 지나노련한 말로 원활하게 쇼를 진행해 가던 엠씨에게 피디가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알아들은 중년의 엠씨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린 일일 호스트를 불렀다. 눈꼬리가 쳐진 일일 호스트는 갈색 생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종종걸음으로 와 쇼에 참여했다. 중년의 엠씨가 말을 이었다. 일일 호스트로 뷔 씨가 나와 주셨어요. 요즘 여고생과 여대생 사이에서 핫하다는! 여느 대세 배우들을 다 제치고 전국 천 명의 여대생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에서 일 등을 했어요, 뷔 씨.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 ‘뷔 씨’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수줍게 웃었다. 찬찬히 그의 얼굴을 뜯어봤다. 민윤기의 눈치를 보니 뷔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저 신속한 진행을 바라고 있는 민윤기의 마음을 읽어낸 중년의 엠씨가 뷔의 소개를 멈추고 나와 민윤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시 민윤기에게로 턴이 넘어갔다. 민윤기가 유창한 말솜씨로 대답을 늘어놓고 있을 때, 내 시선은 큐시트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는 뷔에게로 꽂혔다. 연차가 어느 정도 있는 것도 같은데 왜 저리도 어리숙하게 구는지. 뷔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 중년의 엠씨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여주 씨 눈이 자꾸 뷔 군한테로 가는데? 뷔 사랑스럽죠? 워낙에 매력있는 친구라. 뷔는 수줍게 웃었다. 민윤기가 영 언짢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다 뜬금없게도 손을 꼭 잡아왔다.
“지금 민윤기 씨가 여주 씨 손을 잡으셨는데. 여주 씨가 뷔 군만 좋아하니까 질투 났나 봐요.”
찰나를 놓치지 않은 중년의 진행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나이 먹으니까 자꾸 관심 받고 싶네요. 우리 집사람이 연애 할 때처럼만 사랑 좀 줬으면 좋겠어요.”
재수 없는 새끼. 인정하긴 싫어도 프로는 프로다. 어떤 대답을 주고 어떤 모션을 취해야 우리 두 사람이 더없이 행복한 잉꼬 부부로 보일지, 내가 사랑스러운 내조의 여왕으로 보일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입지를 확장시킬 수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민윤기가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기획사를 차려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 컸다.
가만히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뷔가 손을 번쩍 든다. 똘망똘망한 눈을 하고 대학 새내기마냥 구는 게 이번 쇼에서의 그의 역할인 모양이다. 엠씨는 그가 미취학 아동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더니 ‘질문이 있는데 해도 될까요?’ 하는 그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해 보세요, 뷔 군. 뷔는 웃는 낯을 유지하더니 말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분 연애 할 때 이야기가 궁금하거든요, 뭐 일화라든가. 민윤기가 사랑스러운 눈으로 뷔를 쳐다보는 체한다. 다정한 척은. 민윤기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뗀다.
일화, 글쎄요. 우리 진짜 평범하게 연애 했는데. 안 그래요, 여주 씨? 저희는 진짜 평범한…… 20대 연인들처럼. 그때는 둘 다 20대였으니까, 지금보다 훨씬 젊고 예쁠 때. 그냥 풋풋하게 만난 것 같은데. 아, 그건 있었어요. 제가 작업실에서 곡 만들고 있으면 여주가 점심 싸 와서 작업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고. 밤 늦게까지 작업할 땐 치킨 사 와서 기다리고. 작업 끝나고 같이 식사하는데 저 기다리느라 배고팠는지 여주가 너무 복스럽게 먹는 거예요. 사실 저는 먹을 거에 큰 욕심이 없거든요. 그래서 여주 먹는 거 지켜보는데 저는 그게 너무 좋더라고요. 그, 제가 이런 말 진짜 잘 안 하는데 우리 여주 평소에는 몰라도 뭐 먹을 때는 너무 사랑스러워. 아, 말하고 보니까 닭살 돋는다, 막. 저 이런 말 진짜 잘 못해요.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고 어색했던 질문을 유연하게도 넘긴다. 민윤기가 대답을 꺼내는 동안 수줍게 보일 만한 미소와 함께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뷔가 열심히 일화를 풀어놓는 민윤기를 바라보는 대신 나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민윤기와 같이 프로답게 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어린 남자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주었다. 뷔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더니 입모양으로 말한다. ’거짓말.’ 민윤기는 여전히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민윤기가 말을 끝맺을 기미를 보이자 뷔가 살짝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물고 얼굴 가득 미소를 장착한다. 아, 저 새끼도 프로였네. 민윤기가 어른다운 미소로 대답을 끝마치자 뷔가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민윤기에게 말을 건넸다, 이건 정말 개인적인 질문인데 슈가트랙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평소에 슈가트랙 너무 좋아했는데 마침 우리 프로듀서님께서 나와 주셔서. 뷔의 말에 모두가 따라 웃는다. 뷔는 엉뚱하면서도 싹싹한 이미지를 굳혀 온 모양이다. 세 사람이 함께 웃어주자 입을 벌리고 강아지처럼 웃는다. 중년의 엠씨가 웃음을 거두고 진행을 이어간다. 뭐, 뷔 군 말은 물론 농담이겠지만 슈가트랙 요즘 뜨는 기획사잖아요. 우리 소속 가수나 배우 분들께서도 많은 사랑 받고 있는데, 예를 들면 랩몬스터 씨나 김석진 씨?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젊은 나이에 이렇게나 성공한 비결?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글쎄, 제가 성공했나요? 그건 모르겠지만, 어, 아무래도 여주 씨 도움이 컸죠. 다 엎어 버리고 싶을 때마다 옆에 있어 줬으니까.”
이거 절대 여주 씨가 옆에 있어서 하는 말은 아녜요. 살풋 웃는 얼굴에 따라 웃어 주었다. 우리는 억지웃음을 지은 채 마주보고 있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람을 수없이도 대해 본 민윤기와는 달리 규모가 큰 기획사 덕에 탄탄대로를 걸어와 부러 사람과 얼굴을 마주보며 굽혀 들어갈 필요가 없었던 나는 표정 관리에 그리 익숙한 편이 아니었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버텨 보려 했지만 민윤기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공용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잡았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게 없자 급기야 입 속에 손가락을 넣어 보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화장실 칸 벽에 머리를 기댔다. 민윤기의 가증스러움이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민윤기의 명의로 된 집에 살고 있다는 것도, 카메라가 돌아갈 때면 민윤기와 세상에 또 없는 잉꼬 부부 행세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죽을 만큼 싫었다. 계속해서 마른 기침이 나왔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천천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다가 소리가 점점 거세지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숨을 쉬며 칸의 문을 열었다. 수척한 내 얼굴 앞에는 웃는 얼굴의 뷔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그가 인사를 건넸다. 대충 고개를 꾸벅이니 입가에 더한 미소가 차오른다.
“옛날부터 노래 즐겨 들었어요.”
아, 예. 건성건성 대답을 하며 초라한 낯을 보이기 싫어 그대로 등을 돌리고 화장실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다. 뻗은 손이 그대로 뷔의 손 안으로 먹혀 들어갔다. 방실방실 웃는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말했다, ‘손 놔 주세요.’ 그는 그대로 손을 놓았다.
“제 이름 알고 계세요?”
“뷔요.”
“김태형이요.”
필요하면 정국이한테 물어봐 주세요, 번호. 가끔씩은 친분도 없고 사정도 모르는 사람한테 고민 털어놓고 싶을 때 있잖아요. 그리고 여주 씨는, 인기 많으니까. 삶이 왠지 빡빡할 것 같아서. 김태형이 그대로 나가 버렸다. 벙찐 얼굴로 그대로 화장실에 남아 있었다. 세트장으로 들어가니 김태형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민윤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한 민윤기가 눈을 마주쳐 왔다. 삼 초도 민윤기의 얼굴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었다. 뜨거운 이마를 꾹꾹 누르며 전정국에게서 물을 받아 마시고 민윤기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민윤기의 손가락이 열심히 화면을 두드린다. 엄지손가락이 바쁘게 놀려진다.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띄우는 것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다시 관심을 돌려 휴대폰 잠금을 풀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를 클릭하니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고개를 돌려 민윤기의 휴대폰 화면을 보니 같은 소식을 보고 있었다.
“이 누나 열애설 떴네.”
“그러게요. 당신이랑 놀아날 땐 언제고.”
민윤기가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내려다본다.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휴대폰 화면을 두드렸다. 민윤기와 놀아났던 여배우의 열애 소식에는 이내 흥미가 떨어져 다른 소식을 찾아 보았다. 민윤기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민윤기가 천천히 입을 연다. 말을 꼭 그렇게 해야 돼? 그 말에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말로 이겨먹어도 결국에는 내가 지는 게임이었다. 놀아난 걸 놀아났다 하지 뭐라 한담.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고 있던 민윤기는 자리를 떴다. 그리고 쇼의 다음 코너가 시작될 시간이 다가오자 민윤기는 말끔한 얼굴로 다시 세트장에 발을 들였다. 우리는 그 가증스러운 토크쇼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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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새오 삼빵입니다 또 하나의 노잼글을 들고 왔어요! 단편병이 있어서 장편을 정말 징그럽게도 못 찌는데 글잡에서만큼은 장편을 쪄 보고 싶어서 꼭 한 번 써 보고 싶었던 소재를 가져 왔습니당 남편이 왜 윤기냐면 저 짤 보고 슥슥 발렸기 때무애... 줄글이 길어서 읽다가 포기하시면 어떡하조...;ㅁ; 그럼 혼자 쓰고 혼자 읽는 자급자족 글 하조 머....... |
노잼글 읽으셨으니 댓글 달고 포인트 받아 가세요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