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의 미학
04
"그, 어제.."
"알아."
"응?"
"안다고, 오해잖아."
"아, 다행이다. 백현이가 네 옆집 살.."
"백현이라고 부르지마."
"..."
"나 질투 나."
김종인의 어린 애 같은 말에 슬쩍 웃으면, 김종인은 왜 웃냐며 내 볼을 늘어뜨렸다.
"질투났어? 애네, 애야."
"쪼그만게. 누가 누구보고 애래."
투닥투닥 거리다가 김종인을 반으로 돌려보내고 곧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라 교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변백현은 어디갔지.. 교실을 두리번거리고 운동장을 쳐다봤다. 남자애들이 모여있는 쪽을 꼼꼼히 살펴봐도, 변백현이 안보여서 그냥 알아서 오겠거니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름아, 너 종인이랑 사귄다며."
설렁설렁 걸어와 내 앞에 우뚝 서있는 김윤주였다. 중2병이 늦게 돋았는지, 고등학교 3학년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아치 행세를 하고 다니는 애였다. 3학년에 올라오자마자 변백현에게 고백했다가 차이기도 하고, 욕도 몇 번 먹었는데. 이제 김종인이라도 좋아한다는건지, 뭔지. 김종인 이름을 왜 저리 친근하고 다정하게 부르는지 모를 일이였다.
"응."
"근데, 왜 백현이가 너를 집에 데려다줘? 김종인이 네 남자친구라매."
"뭐?"
"와~ 모르는 척 오졌다."
"모르는 척이 아니라,"
"너 능력 핵좋다? 역시 얌전한 년들이.."
변백현이 날 데려다줬던건 어떻게 알았는지, 내 말을 뚝뚝 끊고 자기 하고싶은 말만 이어나가는 김윤주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으면, 변백현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옆에서 김윤주를 내려다봤다.
"야."
"..어! 백현아."
"듣자듣자하니까 입 뚫렸다고 막 씨부리는데."
"..."
"그러다 나한테 한 대 맞아, 너."
"..."
"빨리 꺼져. 내가 치워주기전에."
김윤주는 입을 삐죽이며 울먹거리다 나를 한 번 째려보고 교실을 나갔다. 변백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변백현은 몇 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너는 왜 그딴 말을 듣고만 있어?"
"..걔가 말을 뚝뚝 끊는데 어떻게 말해?"
"무시하고 욕이라도 하던가, 때리던가."
"뭐?"
변백현은 진심으로 나를 답답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왜 때문인지 화라도 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존나 짜증나게."
"..."
"앞으로 그냥 때려. 내가 책임질테니까 그냥 패."
변백현과 눈이 마주쳤다. 변백현의 동공이 내 눈에 머물러 흔들리는게 보였다. 변백현은 곧바로 핸드폰으로 눈길을 돌렸다.
학교가 끝나고, 교실을 나오는데 김종인네 반 학생으로 추정되는 여자애가 와서 내 팔목을 붙잡았다.
"너 김종인 여자친구, 맞지? 성이름."
"응. 왜?"
"김종인이 오늘 미술 때 자다가 걸렸거든.. 그래서 미술실 청소하고있어. 걔가 전해달래서."
"아.. 고마워."
또 잤어? 그렇게 반에 들어가기전에 자지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는데. 고3이나 됐으면서 잠은 줄이지를 못 해요.. 하는 수 없이 3층으로 후다닥 내려가 미술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건 김종인이 아니였다.
"아, 왔네?"
내가 들어오는걸 보자마자 미술실 책상에서 내려오는 김윤주였다.
"너, 지금 뭐하자는거야?"
"종인이랑 집에 같이 가야지, 빨리 나랑 얘기 끝내고."
"너랑 할 얘기 없어."
"내가 서로 윈윈하자고 너 부른 것 같애?"
"그런 거 할 생각도 없어."
"너 변백현 좋아해?"
인상을 찡그리고 김윤주를 쳐다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 행동들이, 변백현을 좋아하는 행동이였나? 아니, 전혀. 내가 변백현을 안 좋아하는데 그런 행동을 했을리가 없다.
"나 김종인 여자친구야. 걔를 왜 좋아해."
"당연히 그렇겠지."
"..."
"그러니까 변백현한테 쓸데없이 착하게 굴지마."
"..."
"아까는 내가 표현을 너무 격하게 했나봐, 미안.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거라 믿어."
"..."
"또 마주하는 일 없길 바래. 내 소문 그대로의 내 성격 보기 싫으면."
김윤주는 미술실을 나갔다. 김종인에게 부재중전화가 4통 와있었다. 그냥 힘이 쭉 빠졌다. 미술실을 나가려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미술실 문을 활짝 열어버리는 변백현이 보였다.
"..너가 여기 왜 왔어?"
"너 변백현 좋아해?"
"너, 괜찮아?"
"당연히 그렇겠지."
"너가 여기 왜 왔냐고."
"그러니까 변백현한테 쓸데없이 착하게 굴지마."
"김윤주가 옆반 애 시켜서 너 불렀다고 어떤,"
"너가 그걸 왜 걱정 해?"
변백현의 동공이 아까보다 심하게 흔들렸다. 자꾸만 나쁜 말이 나왔다. 그런데, 변백현 표정을 보니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았다. 이런 타이밍에, 고맙게도. 내 핸드폰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응, 종인아."
변백현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 전화를 받아들고 변백현을 지나쳤다. 변백현의 익숙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뒤를 돌아볼 자신은 없었다. 마치 큰 죄를 짓고 가는 것 마냥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