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의 미학
06
"그런게 아니라,"
"그런게 아니면."
"..."
"피한게 아니면, 뭔데."
말문이 턱 막혔다. 가만히 변백현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할 말이 없어서. 따지고보면 내가 피한게 맞으니까.
변백현은 따라오지않는가 싶더니 어느새 내 옆에서 같이 걷고 있었다. 옆을 힐끗 쳐다보다가 변백현과 눈이 마주쳤다. 왜 따라오는거야. 괜히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는 봉투 소리가 거슬렸다. 계속 집 방향으로 걷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왜 따라와?"
"따라가는거 아니야, 데려다주는거지."
"그러니까 왜. 혼자 있던 것도 아니면서..."
"집에 먼저 가 있으라고 했어."
"..."
"사촌동생."
아, 추워. 변백현은 자기 손을 호호 불었다. 사촌동생이라고 말하는 변백현의 말투는, 마치 오해하지 말라는 듯한 말로 들렸다. '여자친구 아니야. 안심해.' 라고 말해주는 것 처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비몽사몽 준비를 했다. 내가 뭘 입고있고, 뭘 들고있는지도 모를만큼 멍했다. 오늘따라 띵한 머리에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어디 아파? 오늘따라 좀 안 좋아 보이는데."
"..."
"열도 좀 있는 것 같고."
"아프긴, 멀쩡하네요."
괜히 걱정할까봐 밝게 웃어보이며 김종인 옆구리를 툭 쳤다. 김종인은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아침부터 다들 눈꼴사나웠는지, 지나가는 아이들마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등교할 때는 자제하지, 좀.
김종인을 옆으로 밀어내니 입이 대빨 나와서는 학교로 가는 내내 투덜거렸다. 자기가 쪽팔리냐며, 남자친구가 어깨동무 하나도 못하냐며...
교실로 올라와서도 계속 중얼거리는 김종인을 애써 무시하고 교실 안으로 밀어넣었다. 김종인은 뭐가 그리 좋은지 내가 교실로 돌아갈 때까지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를 한다. 아마도 내가 멀어질 때까지 인사를 하고 있겠지.
정말이지, 김종인은 바보같다.
머리가 띵하다.
아침부터 어질어질 하더니, 누가 내 머리를 내려치는 것 같기도 하고... 속도 메스껍고. 어제 저녁을 먹고 바로 자버려서 그런건지 계속 속이 불편했다. 그래서 계속 엎드려서 잤는데, 이제는 하도 자다보니 잠도 안오고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성이름, 어디 아파?"
"어?"
"너 지금 식은땀 엄청 나."
"...아,"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보건실 가자."
"..."
"업혀."
이번에는 군말없이 업혔다.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이 속에서 뭐가 올라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보건실에 도착해서 변백현은 나를 침대 위에 눕혔다. 보건 선생님께서 챙겨주신 약을 받아 먹고, 가만히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누워있으니 조금 가라앉은 것 같기도 하고.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옆을 슬쩍 보니 아니나 다를까, 변백현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안 가고 뭐해?"
"고맙다고도 안 하냐, 이제?"
"...고마워."
"화난다."
"어?"
"존나 짜증난다고, 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변백현에 눈만 데구르르 굴리다 시선을 피해버렸다.
갑자기 훅 다가오는 변백현 얼굴에 놀라 눈이 크게 떠졌다.
"..."
정적이 흘렀다.
1cm밖에 안 될 것 같은 거리에 숨을 제대로 뱉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있었다.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변백현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눈을 마주치고 있던 변백현은 눈길을 피하고 일어나 한숨을 쉬었다.
"너가 아플 때마다"
왜 나는,
"속상해."
조금만 앞으로 다가오면 입술이 닿을 것 마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변백현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몰라. 속상해서 뒤질 것 같아."
밀어내지를 않았을까.
"그러니까 사람 신경 쓰이게 아프지마, 좀."
변백현이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그대로 뒤를 돌아 보건실을 나갔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뭘 한 것도 아닌데, 종인이한테 괜히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지금만큼은, 눈치가 없어지고 싶었다.
변백현이 나한테 왜 저러는지,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