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균과 여주가 한국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었다. 일주일 간 날씨는 더더욱 쌀쌀해져만 갔고, 이건 저녁에만 목도리를 하던 여주가 낮에도 목도리를 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
민현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카페 창가자리가 아닌 구석자리에 앉은 여주가 음료에 손 하나 대지 않고 있었고, 그저 휴지로 비행기를 접어 댈 뿐이었다. 우웅-. 그때 여주의 휴대폰이 밝게 빛나고, 그 속엔 얘기가 끝나면 데리러 가겠다는 창균의 문자였다. 그 문자를 눈으로 훑은 여주가 결국 테이블에 제 오른팔을 벤 채 엎드렸다.
무슨 말을 먼저 건네야하지? 얼굴은 볼 수 있을까? 난 눈 마주칠 자신도 없는데.
...보고싶은데, 보기싫다.
여주가 눈을 꽉 감았다가 천천히 떴고, 곧 여주의 앞에 있던 의자가 뒤로 끌리더니 민현이 앉았다. 그 하얀 익숙한 손이 여주가 접은 비행기를 집고, 여주는 그 손을 눈으로 쫓았다. 민현이 비행기를 매만지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안갔으면 좋겠다."
"............"
"...안갔으면 좋겠어, 그냥."
"............"
"...여주야. 보고싶었어."
"............."
"..지금도."
내 눈 앞에 네가 있다는게 믿기지가 않아. 보고 있는데도 실감이 안나.
..손 잡아도 돼?
민현의 물음에 여주가 제 무릎에 올려뒀던 왼쪽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렸고, 민현은 그런 여주의 손을 큰 두 손으로 감싸더니 고개를 숙여 제 입가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여주의 시야에 민현의 얼굴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울고있는 민현이.
여주의 손을 부여잡고 고개를 푹 숙인 민현이 계속 소리없는 울음을 뱉어냈고, 여주는 그런 민현을 바라보다 제 얼굴을 자신이 베고있던 오른팔에 묻었다. 여주의 옷도 젖어들어갔다.
"..여주야. 보고싶었어 너무 많이."
"..........."
"네가 없으니까 바보같이 아무것도 못하겠더라."
"............"
민현의 울부짖음에 여주는 울음에 막혀 입을 열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연락하겠다고, 기다리지 않게 바로바로라도 연락하겠다고, 간혹 전화도 하겠다고. 입가에 맴돌던 이러한 대답은 울음에 젖어 사라져버렸다.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여주가 보기에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분별력있는 듬직하고 멋진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장 의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민현이 무너져버린 걸 본 여주는 소리없는 울음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
"....다른 애들은?"
"..안만났어, 그냥 민현이 오빠만."
"..그래?"
짧은 대화를 끝으로 창균을 멍한 여주를 바라보다 곧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이 가득해보이는 여주에 대한 배려였다. 곧 이륙하겠다는 비행기 안내 소리에 여주는 휴대폰을 내려다 봤다. 정확히는 빈 메시지 창을.
이거 내 번호야|
이거 내 번ㅎ|
이거 내 ㅂ|
이거 ㄴ
|
"............"
오랜만이ㅇ|
오랜만ㅇ
|
"............"
승무원들이 돌아다니며 곧 이륙한다는 말과 함께 안내를 하고 있었고, 그 산만함에 여주는 초조한 듯 검지 손가락을 물었다. 창균은 그런 여주를 보다 손을 들어 여주의 손을 내리고, 작게 말했다.
"제일 하고 싶은 말을 해."
"..........."
"형식적인거에 얽매이지말고, 이렇게 보내면 뭐라고 생각할까, 그런거 생각하지말고."
그냥 네가 가장 하고싶은 말. 네가 건네야 하는 말 말고.
'우리 비행기는 곧 이륙 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
보고싶어.
민규) ..........
뭐야.
석민) 뭐가. 야 티비 안볼거면 리모컨 내놔. 보지도 않으면서 아까부터-,
민규) ..김여주석
민) 뭐?
민규) 문자.
짧은 진동에 민규가 휴대폰을 보고, 곧 보고싶다는 네글자에 민규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이에 석민이 리모컨을 뺏으려다 제 휴대폰을 들었고, 민규와 동일한 문자를 읽더니 곧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할 수 없다는 기계음만이 석민을 반겼다. 석민의 눈엔 또다시 눈물이 금새 차오르고, 습관적으로 소파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여주의 방으로 향했다. 민규는 확신의 가득찬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민현이 집에 들어왔다.
- 김여주 맞지 너.
민규) 형, 문자 받았어? 김여주, 여주가-,
민현) ...받았어.
민규) .....형.
민현) ...........
민규) ...김여주 어딨어.
민현) 민규야.
민규) 형 김여주 보고 온거지. 김여주 지금 어딨어. 형 다 알고있는거잖아.
민현) ..민규야.
김여주 지금 어딨냐고!!!!!!!
덤덤하지만 힘없는, 놀라지 않는 민현에 민규는 눈치챈 듯 여주가 어딨냐고 물었고, 민현은 마른 세수를 하며 민규를 차분히 불렀다. 울며 소리치는 민규에 민현이 민규의 어깨를 잡고, 민규가 주저 앉자 민현이 그런 민규를 안은 채 민규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자 울먹이는 음성이 민현을 향했다.
그냥 갔어..? 어디 갔어. 나도 안봤잖아. 석민이도 안봤잖아. 근데 어딜 가. 왜 없는데, 왜. 형은 그걸 왜 그냥 보내, 응? 왜 보냈는데, 왜 형만 봤어 왜. 데리고 오지 그랬어. 왜 그걸 그냥 보내냐고. 어딨어, 김여주 어딨어. 벌써 다시 갔어? 형 진짜 갔어? 거짓말 하지마, 형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 ...제발.
민현) ....말 못해서 미안해. 여주가 다음에 오면 꼭 얼굴 보고 간대. 이번엔 용기가 안나서 다 못보고 간다고, 앞으로 연락하겠다고 그랬어. 이따 미국 가면 도착해서 연락 줄거야. 민규야. 지금 비행기 안이라서 못받는거야. 이따가 연락 될거야. 말 안해서 미안해, 형이 미안해.
미처 끄지못한 티비 소리가 민규의 울음 소리와 함께 이질적으로 울려퍼졌다. 민규의 통곡 소리를 여주의 방에서 듣던 석민도 울음을 뱉어냈다. 여주의 침대에 얼굴을 묻고 제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한국의 새벽 다섯시, 여주가 미국에 도착하고도 남은 시각이었다. 몇몇 아이들이 깨어있고, 몇몇 아이들이 겨우 잠에 든 시각, 민규는 여주의 책상에 앉아 책상 위에 쌓여있는 전해지지 못한 편지들을 매만졌다.
매년 1월마다 썼던 편지들, 3월이면 처음 만났던 날들이 생각나서 썼던 편지들, 매년 9월 정한이 쓴 편지들, 연말에 썼던 편지들,
3년전 여주가 택배를 보내고 나서부터 택배에 대한, 결국 가지 못한 편지들. 수백통의 편지들이 여주의 책상 위에 가득 쌓여있었다. 어느 것은 눈물 자국이 새겨져있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 구석에 쌓여있는 새 편지지들을 만지던 민규는 휴대폰을 들어 귀에 가져다댔다.
"............"
꽤 길어지는 신호음에 민규가 마른 침을 삼키고, 곧 신호음 대신 대낮의 소음이 민규의 귓가에 닿았다. 그러자 편지지를 만지던 손이 멈추고, 민규는 한참 아무말 없더니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응.'
"....김여주."
'.............'
"............"
'.....응, 민규야.'
그토록 듣고싶었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한참을 기다렸던 목소리가, 꿈에서만 듣던, 환청으로만 들리던 네 목소리가.
민규가 입을 앙다물곤 고개를 푹 숙였다. 휴대폰은 여전히 귓가에 올려둔 채 눈물을 훔치던 민규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여주를 불렀다.
"...여주야."
'...왜 안자, 새벽일텐데.'
"언제와."
'.............'
"또 언제와, 응? 빨리와."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에 여주는 말이 없었다.
절절한 목소리가 공허한 새벽을 채웠다.
“...........”
“...병원 가자.”
“....싫어.”
“김여주.”
“...나 그냥 집에 있고싶어.”
“그래 그럼.”
나도 여기 있을게.
한국을 다녀오고 나서 자멸감이 들은 여주는 휴가가 끝나자마자 연차를 썼다. 계속 오는 창균의 연락은 받지도 않은 채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았고, 습관적인 자해를 일삼았다.
여주는 자신도 여기에 있겠다는 창균의 말에 대꾸도 않은 채 창균을 등져 누웠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창균이 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적게 한숨을 뱉어냈다.
그러다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아있던 창균이 몸을 일으켜 여주의 정신처럼 더럽혀진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피가 묻은 휴지들, 데일밴드 비닐들, 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내팽겨쳐진 옷들과 캐리어. 하나 둘 치우던 창균은 이러한 방과는 달리 깨끗한 주방을 보더니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대충 정리가 끝났을 땐 제 집에서 가져온 작은 구급 상자를 들고 다시금 침대에 앉았다. 여주의 집엔 상처를 낼만한 물건들만 가득했고, 그 상처를 치료할 건 없었으니.
자신을 등돌려 누운 여주에 창균은 여주의 오른 팔목을 살며시 잡았다. 검은 가디건을 걷은 창균이 작게 미간을 찌푸리고, 곧 구급 상자를 열어 소독약을 솜에 묻히더니 여주의 상처를 톡톡 두드렸다.
“왜그래.”
“...........”
“애들 얼굴도 보고, 잘 돌아왔잖아.”
“...........”
“근데 왜그래, 응?”
“...오빠.”
“..응.”
“..........”
“..........”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뭐를,”
“..........”
“...나는 여전히 내가 싫은데,”
“..........”
“내가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행복했음 좋겠대.”
“..........”
...그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한거래.
여주의 힘없는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공백이 자리했다. 그저 구급 상자를 뒤적거리는 소음만 울리고, 창균은 곧 밴드를 꺼내들었다.
“...응.”
“..........”
“나도 네가 행복했음 좋겠어.”
“..........”
“아니다. 행복은 바라지도 않아.”
“..........”
“...여주야,”
상처에 밴드를 붙인 창균이 구급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여주의 소매를 내리며 가디건 위로 상처 부위를 어루만지더니,
”그냥 나는 네가,”
이렇게 안아팠음 좋겠어.
툭,
투둑,
창균의 눈물이 여주의 옷에 떨어졌다.
**
짧은 설명 |
글을 쓰면서 여주가 왜 저렇게 우울해야만 할까? 하고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캐릭터에 대한 부연설명을 조금 하려고해요. 여주는 아주 어려서부터 정서적으로 학대를 받으며 큰 아이입니다. 부모님이 싸우는 걸 매일 보며 자랐고, 그 분풀이 대상이 여주이기도 했죠. 그러다가 초등학교 때 석민이를 만나고, 후엔 중학교에 같이 입학하지만, 석민이가 따돌림을 당하는 상황이 다가와요. 소중한 사람이 그런 힘든 일을 겪다보니 우울감이 남들보다 많은 여주는 타격이 클 수 밖에 없죠. 그래서 전학을 갔는데, 이번엔 여주가 따돌림을 당해요. 그렇게 되면서 여주는 ‘아 나는 이런 삶을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구나. 나는 행복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에 잠겨버립니다. 항상 자신을 탓하는 말만 들어온 여주가 저런 생각을 갖게 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던거죠. 중간중간 글로 쓰여지진않았지만, 아직 미성년자라 부모님과의 교류를 완전히 끊을 수도 없었을겁니다. 덕분에 감정적으로 많이 예민한 나이대에 여주는 정서적으로 많은 학대를 받아요. 민규를 만나고, 학교에선 괴롭힘이 줄어들었지만, 한평생 쌓인 우울감은 사라질 수 없었어요. 후에 고등학교에 입학해 좋은 사람들은 만났는데도 중간중간 민현이를 좋아했던 지현이에게 또 다시 질타를 받고, 승관이와 같은 반이었던 여자아이에게도 약간의 질타를 받죠. 그때 옥상에서 여주가 말했던 대사가 여주가 한평생 끌어안고 살아왔던 말입니다. ‘어쩐지 행복하다 했어.’ 그런 사소한 일들이 여주를 한없이 작게 만든거였어요. 대학교에 올라와서는 부모님과 완전히 연을 끊었지만, 또 다시 한 번 연락이 오면서 다시금 정신적으로 갉아먹히고 말아요. 그리고 대학교를 다니면서 다가온 유학의 기회도 사실상 여주에게 딱히 좋은 것만은 아니었죠. 어떻게보면 이제서야 찾은 안식처를 떠나야만 했던거니까요. 석민의 부모님 밑에서 자란 여주는 무조건 그걸 갚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에 유학을 선택했던 것이지, 자신의 꿈, 행복, 이런 걸 얻기 위해 떠난게 아닌거죠. 아이들이 없는, 어둠이 가득한 여주의 6년은 절대로 행복하지 못했어요. 그로인해 아이들 덕에 조금 나아졌던 우울감이 다시금 가득해지고, 한국으로 돌아와 아이들이 자신 때문에 피폐해진 걸 보고 급속도로 우울해진거에요. 여주가 원했던 건 저런게 아니었으니까요. 자존감이 한없이 낮은 여주는 자신이 떠나도 아이들이 금새 자신을 잊고 잘 살거라고, 적어도 저만큼 피폐해져있을 줄은 몰랐던거죠. 그걸 눈으로 확인한 여주는, 자멸감,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게 됩니다. |
여주의 우울이 쉽게 만들어진게 아니라 누적되어서 저만큼 아프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고 늦은 밤에 장황하게 쓰고있네요.
현생과 글쓰기. 두마리 토끼를 잡고싶은 제 욕심이 자꾸 저를 괴롭힙니다 ㅋㅋㅋㅋㅋㅋ
좋은 밤 되세요 💛
넉점반의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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