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정의 : 특별 번외
(부제: 끝과 시작)
온 방 안을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서늘한 공기에 절로 움츠러든 팔이 얼마 가지 못해 다시 이불 속으로 숨어든다. 그새 차갑게 식어버린 팔이 몸에 닿자 소름이 돋아 어깨를 부르르 떨다 다시금 손을 내뻗었다.
두어 번 휘적거리고 나서야 손 안으로 들어온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어댄다. 잠에 짓눌려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치켜떠 시간을 확인했다. 열 시 십 분.
“...미친.”
약속 시간은 열 시 반이었다.
이렇게 빨리, 정신없이 준비한 적은 오랜만이었다. 학기 중에나 이렇게 허둥지둥 준비하고 택시를 탔지, 따로 수업이 없을 때 잡힌 약속에 늦은 적은 별로 없었는데.
급하긴 해도 사람 꼴은 하고 나가야 할 것 같아 빠르게 씻고 나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며 더부룩한 속을 부여잡고 한숨을 쉬었다. 종강했다고 친구들 막 만나고 다니는 게 아니었는데. 그 놈의 술, 진짜.
10시 17분. 드라이기를 끄고 점점 말라가는 머리 위로 수건을 올려둔 채 녀석과의 카톡을 다시 훑었다. 급하게 오타가 잔뜩 섞인 말을 띄우고 난 뒤 바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답이 와 있었기 때문에.
-그럴 줄 알았다. 천천히 준비해서 와. 먼저 가 있을게.
그리 길지 않은 덤덤한 대답이었지만, 키패드를 꾹꾹 눌러가며 답장하는 데에 집중했을 녀석의 얼굴을 떠올리니 괜히 웃음이 났다. 벌써 준비 끝났나보네. 저도 모르게 실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가 잠에서 막 깨어 탱탱 부은 거울 속의 나와 눈을 마주하자마자 다시 입꼬리를 내리며 일어났다. 오늘 진짜 더럽게 못 생겼네. 일단 화장하기 전에 옷부터... 근데 뭐 입고 나가지?
결국 방을 한 번 헤집어놓고 나서야 겨우 옷을 골라 입을 수 있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꺾어 신은 워커에 제대로 발을 밀어 넣으며 난장판이 된 내 방을 떠올리자니 한숨 말고 다른 말은 나오지 않는다. 고개를 저으며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버스 정류장을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간만에 한 화장이 어색해 연신 휴대폰 카메라로 상태를 살폈다. 몇 시간동안 꾸민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옷을 골라 입고, 화장을 정성들여 하고 나온 것 자체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어색하고 쑥스럽기만 하다. 어설픈 솜씨로 꾸며 본답시고 고데기로 손을 본 머리를 베베 꼬며 버스를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하얗게 부서지는 입김 사이로 멈춰 선 버스가 입을 벌린다. 올라서자마자 따뜻하게 감싸는 기운에 몸을 녹이며 자리에 앉았다.
녀석이 있을 장소와 가까워지고 있는 사이에도 내가 약속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정신없이 꾸미고 나왔다는 게 적응이 되질 않아 피식 웃었다. 고작 몇 년 친구였던 전원우 하나 때문에 아침부터 이 난리를 치다니, 내가.
며칠도 아닌 몇 주씩이나 서로를 피해 눈물길을 만들었던 힘든 나날의 끝, 그 끝에서 전원우와 나는 새로운 관계로서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오래된 친구에서, 막 시작하는 연인으로. 새롭게 정의된 우리의 관계는 생각보다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여러 의미로.
우선 과 내에서도 한 차례 폭풍이 몰아쳤다. 어쩌면 이 일이 내가 아는 관계에서의 가장 큰 파장이기도 했다. 뒤늦게 알려져 더욱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나와 전원우와의 연애 소식에 동기들과 선후배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둘 다 답답했다며 한심해하는 사람, 솔로가 떠나갔다며 울분을 토하던 사람도 있었다. 물론 과내 인기남인 전원우가 떠나감으로 인해 쏟아지는 여자아이들의 질투 어린 말들도 감내해야 했다.
아, 그렇다고 해서 진짜 폭풍은 이게 아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살면서 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곳 중 하나였던 경찰서를 다녀왔었다. 덕분에 종강하기 전에도, 종강한 후에도 한동안은 쭉 시끌벅적했다.
사실 판을 이렇게까지 벌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어디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되면 좀 좋아. 전원우와 크게 싸우고 녀석에게 내 마음을 뱉어낸 날, 그 날 있었던 그 아이들은 당시의 저급하고 악의적인 폭언에도 내가 별 반응이 없자 내심 안심이 되었었나 보다. 혹은 최승철에게 받은 그 때의 일을 내게로 화살을 돌리고 싶었던 걸지도. 어떤 이유였건 내가 모르는 새에 꾸준히 커진 소문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그 일이 터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
"...뭐야, 이게?"
"어떤 년이 또..."
사물함 사이로 욕설이 적힌 쪽지를 끼워 넣질 않나, 굳이 나한테만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질 않나, 지나갈 때마다 수군거리는 목소리와 악의가 깃든 진득한 눈초리까지. 이렇게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은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몰라 가만히 삭히는 나를 옆에서 지켜만 보던 영희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덤벼들어 따졌을 때, 그 아이들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증거 있어?
"증거? 그런 게 필요해?"
"그럼, 필요하지. 너네 지금 완전 생사람 잡고 있는 거잖아. 아니야?"
"증거 없이 이렇게 여럿이서 몰아붙이는 거,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진짜 너무한 사람이 누군데 그런 소릴 지껄여?"
너무나 태연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났다. 그리고 서러워졌다. 내 앞에서 쏟아내던 그 때의 그 표정, 그 말투 그대로 나를 바라보는 눈에서는 나에 대한 악의 말고는 그 어떤 무엇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이쯤 되니 의문이 생겼다.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내가 너한테 뭘 어쨌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네. 왜 나한테 와서 피코질이세요."
"뭘 어떻게 했는지는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나한테 왜 이러냐고 물었어."
음, 글쎄. 그냥?
이어진 대답에 분노로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며 되물었다. 그냥이라고?
"응, 그냥. 그냥, 너 같은 애가 뭐가 잘나서 그렇게 잘난 남자애들 줄줄이 달고 다니나 싶어서."
"......"
"어차피 우리가 이런다고 해서 네 옆에 있는 애들 떨어져나갈 거 아니잖아? 그렇게 되면 더 좋겠지만."
"아, 진짜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다들 알아야지. 고고한 척하는 너도 걔네 없으면 진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
주제를 알아, ㅇㅇ야. 비웃음 섞인 말투로 내게 속삭인 아이들은 다시금 자리를 뜨려 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진정하려 한숨을 내뱉은 순간, 손 위로 덮이는 따뜻한 온기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 새 옆에 서서 그 아이들을 노려보며 서 있는 사람은, 전원우였다.
"이런 소리 그냥 듣고 있지 말라고 몇 번 말했냐. 생각보다 더 쓰레기잖아?"
"...하, 이번엔 전원우야?"
"어, 난데. 너넨 나타나주는 사람도 없네. 고고한 척도 못 하고, 어쩌냐."
"...그런 건 척이 아니라 태가 나야 하는 거지."
"아."
애써 당당한 척 내뱉은 말은 전원우의 한 마디에 금세 사그라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더러운 짓 하고 다니시고?
"입. 조심해라."
"........."
"인생도 가벼워지고 싶지 않으면."
안 그래도 낮았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나직한 목소리가 좁은 공간에서 위협적으로 울린다. 당당한 척 뱉었던 목소리와는 달리 어찌 할 줄을 모르고 허공을 방황하던 그 눈동자들은 전원우를 피해 나를 노려보다 사라졌다. 아이들이 사라지고서야 진정하듯 숨을 내쉰 나는 녀석에게 꽤 오래 잔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그 일은 그대로 끝이 날 줄 알았다. 최승철에 이어 전원우에게까지 그런 쓴 소리를 듣고, 경고를 받았으니까.
근데, 생각보다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잠잠해지나 싶었던 소문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금 나를 괴롭혔고, 점점 쌓이는 스트레스에 잠은 물론 밥도 못 먹고 끙끙대는 지경에 이를 즈음, 다시금 판이 벌어졌다.
"...분명히 경고했던 것 같은데, 내가."
"......."
"입 조심하라는 말, 무슨 뜻인지 몰라서 이 짓거리 벌이는 건 아니겠고. 그치?"
또 부딪힌 것이다. 그 아이들과. 분명히 경고했던 것 같은데, 하는 비아냥거림에도 아이들은 당당했다. 좀 빌려 쓰면 닳기라도 한다니?
누가 그거 빌려준다고 했다고. 급하게 들어서며 전원우를 막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들이 손에 쥔 것은 내 전공책이었다. 바로 다음 수업에 필요한.
진짜 무슨 왕따 시키는 것도 아니고, 가지가지 하네. 어느 새 표정이 사라진 전원우의 팔을 잡아 진정시키듯 꾹 누르며 화도 꾹 눌러 내렸다. 더 이상은 죄책감도, 무서움도 없는 모양인지 턱을 치켜들고 나를 쳐다보는 그 아이들을 보다 피식 웃었다.
이제는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재미있었다. 유치한 편 가르기에 왕따 놀이. 언제까지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더 장단 맞춰 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음성)
-뭐냐?
-?
-??? 저거 뭐야
-미친... 전원우랑 ㅇㅇㅇ 이야기하는 거임?
-야 ㅇㅇㅇ, 이거 뭐냐?
아, 너네가 하도 연락을 안 받길래, 단톡에 올리면 보겠지 싶어서.
곧 서에서 연락 올 테니까 거기서 보자.
증인들 많고 모아 둔 녹취록 더 많으니까 와서 직접 들어, 꼭!
-미친, 이거 걔네야?
-목소리 들어도 딱 답 나오네. 걔네 아직도 ㅇㅇㅇ 괴롭힘?
-와 진짜 미쳤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괴롭히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쯤 되면 돌은 거 아님? 사람 맞냐 말 존나 막 뱉어
-야 나와서 얘기해봐 너네 뭐함?
-그래 단톡 지박령들 왜 안 나와~~
할 말을 다 하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채팅창을 보며 후련해진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전화해도 다 씹더니, 녹취록 조금 잘라 올렸을 뿐인데도 금세 그 아이들에게서 온 카톡으로 진동이 끊이질 않는다. 걸려 오는 전화를 차단하며 옆에서 제가 더 신나하는 영희를 보며 웃었다.
다시금 본 채팅창은 그 짧은 사이에 300개가 넘어가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연락들에 금세 휴대폰이 뜨거워졌다. 거의 매장되다시피 욕을 먹고 욕을 하는 그 난리통 사이에서 전원우가 말을 꺼냈다.
-저 둘만 해당되는 거 아니니까 찔리는 애들은 알아서 사려라. 증거 다 모으고 있으니까, 양심이 있으면 알아서 빌던지. 합의 없어. 알아두라고.
-오, 전원우~~~~
-남자친구인 줄 ㅋㅋㅋㅋㅋㅋ 멋있는 척 쩔어
-그러니까 ㅋㅋㅋㅋㅋ 둘이 사귀는 줄
-?
-나 쟤 남자친구 맞는데. 그러니까 이렇게 나서지, 병신들아.
-헐
-미친
-진짜?
-야 결국 사귀냐?
-와 미친...
"...아."
전원우, 이 미친놈이 또 사고 쳤네. 내가 그렇게 비밀로 하자고 했는데,..
*
그렇게 전원우가 입을 털어서 종강 직전까지 그 모든 장난들을 견뎌야 했지. 동기들이 그렇게 짖궂을 수 있다는 것도, 부추길 수 있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강의 직전에 뽀뽀하라고 부추기던 그 웃음소리들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어우, 징한 것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을 무렵, 목적지를 알리는 안내 목소리에 얼른 벨을 누르고 일어났다. 오늘 좀 춥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거 미련하게 밖에서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뛰어 급하게 카페 앞에 도착했을 때, 녀석은 없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거나, 늦게 나와서 아직 오고 있는 중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뭐가 됐든 추위에 떨며 기다리지는 않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됐다.
한숨을 쉬며 들어가자마자 안쪽에 자리 잡은 전원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는지, 제 손보다 작은 휴대폰을 양 손으로 꼭 쥔 채 집중해서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본대.
“야.”
“...늦었잖아.”
“네가 늦게 와도 된다며. 나 지금 엄청 뛰어 온 거거든?”
“그거 신고? 이게 발목 나가려고.”
신고 온 워커를 한번 슥 보더니 아프지 않게 딱밤을 놓으며 타박하던 녀석은 투덜거리는 말과는 다르게 조심스러운 손길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뭐 마실래. 손을 내리자마자 묻는 녀석의 말에 잠시 시계를 확인했다. 곧 있으면 열두 신데, 그냥 밥이나 먹을까.
“야, 그냥 밥 먹을래?”
“밥? 영화 보고 먹기로 했잖아.”
“그냥 먹고 들어가면 되지. 싫어?”
“배고파?”
“...조금?”
가자. 내 말에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킨 전원우가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팔을 붙들었던 손이 슬금 내려와 손을 잡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서 걷는 녀석의 귀가 발갛게 달아오른 게 보여서, 다시 웃음이 났다. 귀여운 구석이 있단 말이야, 얘도.
**
식당 안으로 들어서면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전원우가 알아보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연인들의 바람직한 데이트 코스였다. 카페에서 뭘 보고 있나 했더니 맛집과 영화를 검색해보고 있었던 것이다. 밖에서 사 먹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 전원우가 이렇게 멀리까지 나를 데리고 나올 리가 없으니 확실했다.
집 밥을 좋아하는 녀석이 내게 맛있는 밥 한 번 먹이겠다고 굳이 조금 멀리 있는 조용한 식당으로 데리고 온 것도, 휴대폰으로 계속 영화를 검색해보는 것도 다 가리는 음식이 많은 데다 입도 짧아 아무 거나 먹질 못하고, 오그라드는 건 전혀 못 보는 나를 배려한 것일 테다. 이런 녀석의 사소한 배려가 친구였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느낌이 신기했다. 그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귀엽지?
“너는 이 추위에 치마가 입고 싶냐.”
“간만에 집 밖으로 나오는 거잖아. 그래서 신경 좀 썼다, 왜.”
자리에 앉자마자 표정이 안 좋던 전원우가 제 말에도 못마땅한 모양인지 입술을 비죽 내밀면서도 이상하냐는 물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안 이상하다면서 표정은 왜 저 모양이래? 되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자 한숨을 쉬며 겉옷을 벗은 녀석이 의자에 걸지 않고 그대로 내게 내민다. 뭐?
“덮으라고. 입을 거면 긴 걸 입고 나오던가. 여자는 몸이 따뜻해야 한다는데, 한겨울에 짧은 치마가 말이나 되냐?”
“말이 안 될 건 뭐야. 나 여기다 흘리면 어쩌려고?”
“아, 지금 그게 중요해? 누가 네 다리 쳐다보면 어쩌려고.”
평소에는 입지도 않던 걸 왜 입고 나와가지고, 신경 쓰이게. 내가 녀석의 겉옷을 다리 위로 잘 덮어 가리는 걸 보고서도 투덜대는 걸 멈추지 않은 녀석이 턱을 괸 손을 풀지 않은 채 물을 마셨다. 말로는 모자란 모양인지 우리 테이블 쪽으로 오는 시선은 없나 눈을 돌려 이리 저리 확인한다. 그렇게 몇 번 두리번대나 싶더니 한숨을 쉬는 모습에 의아해졌다. 또 왜 저래.
“아.”
“...왜?”
“치마 다시는 입지 마라. 존나 거슬려.”
“아, 근데 이 새끼는 말을 해도...!”
“다 늘어난 티 입고 잠옷 바지 입고 있어도 예뻐. 그러니까 짧은 거 입고 다니지 말라고.”
“......”
“다른 새끼들 시선은 둘째 치고, 감기 걸리잖아.”
진지한 얼굴로 나지막히 말을 뱉어내는 전원우가 이제는 친구가 아니라 남자친구라는 것이 실감이 나서 괜히 가슴이 뛰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슬쩍 누르며 진정하듯 숨을 내쉬고 있자니, 그 새를 못 참고 또 주변을 살핀 녀석이 메뉴판을 내민다. 알아서 고르라고 시켜 놓고 수저와 휴지, 물까지 따라주는 모습에 괜히 열이 오르는 듯한 얼굴을 감쌌다. 이런 사소한 거에 설레면 어쩌자는 거야.
그 뒤로부터 주문을 하고 식사를 하는 순간에도,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순간에도 녀석의 사소한 배려는 계속되었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먹기 좋게 썰어서 넘겨주질 않나, 물을 챙겨 주며 천천히 먹으라고 아가 어르듯 머리를 쓰다듬질 않나. 내가 자꾸 묻히고 먹는다고 계속 닦아주고 쳐다보느라 제 음식은 거의 먹지도 않았다. 또, 지갑을 꺼내는 나를 굳이 말려 계산을 하기도 하고, 제 쪽으로 다가오는 여자들을 가차 없이 쳐내기도 했다.
전원우가 이런 놈이었나, 싶을 정도로 다정하고 세심한 모습에 자꾸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 시키느라 정신없었던 식사를 마치고 간 곳은 근처의 영화관이었다. 언제 예매해 뒀는지 모를 표를 받고 난 후 넉넉하게 남은 시간에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으려는데, 저 멀리 있는 뽑기 기계가 눈에 띄었다. 나도 모르게 뚫어져라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내가 보는 쪽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전원우가 어깨를 톡 친다.
“애도 아니고. 뭐 해, 일어나.”
“왜?”
“갖고 싶은 거 아냐? 인형.”
팔을 잡아끈 전원우가 뽑기 기계 앞에 서자마자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냈다. 뭐 갖고 싶은데.
녀석의 목소리에 기계 안을 들여다보았다.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여우 인형이 눈에 띄었다.
“야, 나 저거.”
“뭐, 여우?”
“어, 그거. 뽑을 수 있겠어?”
“당연하지. 이것도 못 뽑겠냐.”
자신 만만하던 녀석은 몇 번을 돈을 쏟아 붓고 나서야 결국 인형을 뽑아낼 수 있었다. 몇천 원은 날려 놓고 저렇게 뿌듯해하는 전원우라니. 이 짓을 하느니 차라리 돈을 들여서 사 줬을 전원우가 이러는 걸 친구들이 보았다면 분명히 웃음바다가 되었을 일이었다. 전원우의 성격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인 나 역시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으니 그제야 민망함이 몰려오는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인 녀석이 저도 실 웃는다.
“...아, 왜. 어쨌든 인형 뽑았잖아.”
“그래, 그래. 잘 했어, 우리 원우. 오쪼쪼.”
“이게 어디서 애 취급을. 꼬맹이 주제에.”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토닥이다 제게 뱉어지는 얕은 투덜거림에 등을 세게 때리고서 팝콘을 사러 나섰다. 품에 안은 인형을 꾹 쥐고 먼저 걸어가려니, 맞아 놓고도 뭐가 그리 웃긴지 호탕하게 웃던 녀석이 내 쪽으로 뛰어 온다. 야 꼬맹이, 같이 가!
전원우와 나는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친구를 할 수 있었는지 물어볼 만큼 성격이 다르다. 그만큼 좋아하는 것도, 식성도, 싫어하는 것도 반대였다. 그래도 영화만큼은 달랐다. 둘 다 오그라드는 건 안 좋아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코믹이나 액션 영화를 즐겨 봤으니까.
오늘 선택한 영화 역시 우리의 취향을 가감 없이 보여줄 만한 액션 영화였다. 취향대로 주전부리를 사서 자리에 앉았을 때까지만 해도 장난을 치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는 집중하느라 옆에 있는 전원우를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던 영화에 신이 나 집으로 가는 내내 영화 내용에 대해 종알거리는데, 왜인지 저보다 더 신이 나 있어야 할 전원우가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어 녀석을 살폈다.
“왜. 재미없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영화 내용이 기억이 안 나서.”
“헐. 너 잤냐?”
“진짜 자서 기억이 안 나는 거겠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 어떡하지. 이거.
“너 보느라 못 봤다는 거잖아, 이 답답아.”
“...영화를 봐야지 나를 왜 봐.”
“좋아하는 애가 옆에서 계속 꼼지락거리는데 신경이 안 쓰이고 배겨?”
미친, 좋아하는 애래. 녀석의 투덜거림에 얼굴에 열이 확 몰리는 느낌이 들어 급히 고개를 돌렸다. 투덜거리다 말고 나를 본 전원우가 피식 웃는다.
“나도 한 번 봐 주고 그래야지, 어떻게 그렇게 정직하게 영화만 보는지.”
“...아니, 그게에.”
“뭘 또 눈치를 봐. 잘 봤으면 됐어.”
푸스스 웃은 녀석이 머리를 쓰다듬고는 다정스레 어깨를 감쌌다. 어깨를 두른 팔을 살짝 쥐자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 깍지를 낀다. 제 어깨를 감싼 손을 붙드느라 어정쩡하게 올라가 있는 손에 불편함을 느낄 새도 없이 괜히 간질거리는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말없이 집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 어색하지 않다. 어느 새 숨어버린 해를 대신해 주변을 감싼 어둠 속에서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웃기도 하며 거리를 걷다, 주머니를 울리는 진동에 의아해하며 폰을 꺼냈다. 이 시간에 전화 할 사람이...
“...아.”
“왜.”
없진 않지.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최승철이었다. 전원우와 내가 사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던 날의 최승철이 떠올라 입술을 살짝 물며 대답을 피하니, 대충 누구인지 안 것 같은 전원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 날 이후 정말 간만에 온 연락이라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내 휴대폰을 가져간 녀석이 액정을 한 번 흘끔 보더니 제 주머니 속에 휴대폰을 넣어버린다.
“아, 야...!”
“걱정 돼?”
“어?”
“최승철, 걱정 되냐고.”
네가 찬 거잖아. 두 번이나. 녀석의 나직한 목소리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이렇게 앞에 있는 전원우를 생각하면 아니라고 부정했어야 하는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물대며 대답을 망설이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녀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다.
괜히 미안해져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내 시야 아래로 들어찬 것은, 녀석이 끌어 온 손이었다. 깍지 낀 채 맞잡고 있는, 전원우와 나의 손.
“솔직히 대답 바로 못하는 거 좀 괘씸하긴 한데, 이래저래 마음 고생했을 거 생각하면 화도 못 내겠고.”
“......”
“하여간 이 애물단지. 전화는 나 없을 때 해. 그래도 지금은 남자친구랑 있는 거니까.”
“...응. 미안.”
미안하면 좀 잘 해. 남자친구, 라는 말을 강조하듯 힘주어 말한 녀석이 아프지 않게 이마를 톡 쳤다. 풀어진 표정에 마음을 놓고 실 웃어보이자 녀석도 따라 웃는다. 한참을 묵묵히 발 맞춰 걷던 녀석은 시야에 우리 집이 들어차기 시작할 즈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야.
“이제 생각이 좀 바뀌었어?”
“뭐가.”
“우리가 예전에 했던 대화.”
“뭐... 아.”
“어때, 좀 달라진 것 같아?”
뜬금없는 녀석의 물음에 피식 웃었다. 전원우가 말하는 예전의 대화는 이미 몇 주가 지난 그 때의 밤을 말하는 것일 테다.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느냐는, 녀석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한 그 날의 밤.
한참을 돌아 다시 돌아온 질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 때처럼.
옅게 웃고 있는 녀석을 한 번 쳐다보고 시선을 땅으로 내리려다, 맞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붙든 단단한 손과, 과거의 전원우가 겹쳤다. 젖은 목소리로 호소하면서도 나를 놓치지 않으려 한가득 끌어안았던 녀석의 품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 때처럼 다시 되물었다. 너는?
“아, 진짜. 이러기야? 분명히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대답 안 하면 나도 안 해 줄 거야. 너는 어떤데?”
“...나는, 뭐. 그 때랑 똑같지.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어.”
“...그래?”
“어.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
“음, 나는...”
안 가르쳐 줄 거지롱. 혀를 쏙 내밀어보이며 맞잡은 손을 풀고 몸을 저 멀리 뺐다. 순식간에 벌어진 거리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녀석이 허탈한 듯 바람 빠진 웃음을 뱉는다.
“야, 진짜... ㅇㅇㅇ, 자꾸 이럴래?”
“어차피 대답이 의무는 아니잖아?”
“저게 진짜. 야, 너 이리 와.”
약올리는 투로 장난스레 대답하는 내 말에 녀석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성큼 성큼 걸어왔다. 아닌 밤중에 추격전을 벌이면서도, 우리 둘 다 그 때와는 다르게 웃음을 건 채였다.
야, 야. 앞 좀 보고 뛰어, 다쳐! 뒤쫓아오면서도 걱정하는 투로 내게 소리치는 녀석을 흘끔 뒤돌아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솔직하게 대답하게 되었을 때,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도 그렇다고, 나한테 너는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고 대답하면, 저렇게 예쁘게 웃어주려나.
특별편을 한참 뒤에야 가져온 저를 매우 치새오 8ㅅ8 |
안녕하세요, 정석입니다! 미루고 미루던 번외를 새해 맞이 특별편으로 둔갑시켜서 가져와 봤어요. 원우 번외를 들고 올까 하다가, 특별편이라는 생각에 그냥 새로 하나 더 썼네요. 새해 맞이라기엔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새해 맞이랍니다 돌은 던지지 말아주새오... (사림) 이번 편에서는 사이다도 좀 마시고, 꽁냥거리는 것도 좀 보고 하시라고 몇 자 끄적여 봤는데, 마음에 드실 지는 모르겠어요. 사실 쓰면서도 의식의 흐름대로라 진짜 노잼이다...ㅎㅎㅎ... 이러면서 써가지고 저도 어떤 지는 잘 모르겠네요. 흐름도 뚝뚝 끊기고... 여러 모로 제가 쓴 글 중에 제일 답이 없다는 것만 알겠어요 ^!^ 엇 오 분 남았...! 또 일주일이 가기 전에 얼른 마무리하고 도망가보겠습니다. ㅎ 쓸 데 없이 주저리가 길었지만 여기까지가 관계의 정의 번외였구요, 다음 번에 또 다시 관계의 정의로 찾아뵐 때에는 진짜 원우 번외를 들고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승철이 시점이라던가 뭐 에피소드가 좀 더 남아있지만, 그건 언젠가 다시...! 혹 원하시는 분이 있다면 새로 한 번 들고 오던지, 텍파에 넣던지 하도록 할개오! 오늘도 별 거 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몇 분 남지 않은 오늘도, 곧 시작될 내일도 즐겁게 보내세요! 사랑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