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다 깨지 않은 잠에 눈을 비비며 한 손으로 카트를 밀었다. 이태일은 이것저것 검사할 게 많다며 사라졌고 나는 우지호에게 식사를 주러 가야한다. 아니, 나도 이태일도 똑같이 박산데 왜 이태일은 간지나는 연구를 하고 나는 연구 대상 시중이나 받드냐고요. 이태일보다 몇 년 늦게 들어온 게 이렇게 한이 될 줄이야. 나는 투덜대며 카트를 밀어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유리벽 너머로 하얀 벽과 바닥이 보인다. 하얀 방에 사람을 가두면 미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혹시 미치지 않을까? 근데 가만 보니 녀석이 보이질 않는다. 놀라 카트를 내버려두고 유리벽 가까이 다가가 손을 찰싹 붙이고 둘러보니, 바닥 한 구석에 쓰러져있는 모습이 보인다.
"야, 야!"
놀라 유리벽 구석의 버튼을 눌러 문을 열고 들어가 하얀 옷만 걸친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천천히 눈을 뜨는 녀석. 단순히 잠든 것이었을까. 괜히 허탈해졌다. 녀석의 눈은 한동안 초점이 없더니 몇 번 깜박인 후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를 알아보기라도 하는 것인지 빤히 바라보면서 한 손을 뻗어 내 손가락을 툭툭 치기까지 한다.
"너 나 누군지 알아보냐?"
그러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끄덕인다. 괜히 웃겨서 푸흐흐 웃으며 녀석을 일으켰다. 내 팔에 의해 일으켜지는 몸이 다시 보니 정말 말랐다. 마른 몸 위에 걸쳐진 하얀 면옷은 헐렁하게 느껴졌다. 문득 보인 녀석의 검은 눈이, 때묻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무슨 오글거리는 표현이냐 할 지 몰라도 정말로. 정말 아무것도 묻지 않은 얼굴.
이태일이 남겼던 메시지("우지호 데리고 박경한테 가서 대충 신체검사 받아. 귀찮다고 안 하면 죽을 줄 알아")에 따라 녀석에게 대충 카트에 실어 왔던 스프와 우유를 먹게 한 후 의무실로 향했다.
"그냥 보통 사람하고 똑같아. 약간의 영양실조랑 몸이 너무 마른 것 빼곤."
우지호는 방금 또 피를 뽑힌 팔을 문지르고 있고, 박경은 화면에 나오는 우지호의 정보를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화면이 넘어가 이태일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복잡한 문서가 뜨자 박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불순물질 90%가 가능한 걸까?"
"인간이 아니니까 가능하겠지."
"인간이 아니면 뭐지. 아무리 봐도 인간인데."
박경이 키득거리며 어제만 해도 내가 누워있었던 침대에 앉아 팔을 문지르고 있는 우지호를 바라보았다. 흰 옷 아래로 드러난 다리고 팔이고 모든 게 하얗다. 손에 든 펜을 까딱거리던 박경의 입이 열리며 나온 말은, '어린 새끼가 존나 뭐같이 생겼어'.
"뭐 이 새꺄?"
놈의 멱살을 붙잡고 들어올리자 두 손을 들어올리며 "미친 놈아, 내려 놔"하고는 사람 좋게 웃는다. 내가 씩씩대다가 풀어주자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화면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을 지어댄다.
"이태일 박사가 저 녀석 맡은 거지?"
"그렇지 뭐. 적어도 여기선 제일 실력 있는 사람에 속하니까."
"내 생각으론 말이다, 절대 이태일이 대충할 것 같진 않거든."
"뭐?"
박경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펜 끝을 씹어대기 시작했다.
"이태일이 저 놈에 대해 흥미있어 하는 게 이 객관적인 문서만으로도 딱 보이거든. 그니까 평소에 맡았던 자질구레한 일들처럼 대충 처리하진 않을거란 말이야. 제재를 가할 때까지, 아니면 제재를 가해도 파고들 거라고 분명. 좀 걱정되네."
하긴, 이태일 그 또라이라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로, 매일 해맑게 웃으며 자신의 아래에 있는 내게 담배 던지는 게 취미인 이태일을 생각하자 갑자기 소름이 돋아 인상을 썼다. 다른 인간들보다 이태일이 더 무서워. 어쩌면 방사능 피폭 괴물 중 하나인 X구역의 '컬테로'보다도 더 무서운 게 이태일일지 모른다. 생긴 것만 봐서는 애기애기거릴 것 같은 인간이, 귀염성이라곤 하나도 없다.
[어쨌거나 저 녀석은 연구하면 무진장 재밌을 것 같거든. 나 지금 진짜 설레 죽겠다.]
어제 이태일이 했던 말을 생각하니, 새삼스레 우지호가 걱정된다.
"아, 근데. 저 녀석 네가 갖고 있던 책으로 한국말을 대충 알아들었다고 했지?"
"응? 아, 어."
"그러면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의사소통이라도 하게 말이라도 가르치는 게 어때. 교본이야 많으니까 보여주면 지 혼자서 배울 수 있을 것 같은데. 괴물 중에서도 지능높은 괴물이잖아."
"지능 높단 증거는 어디에도 없네요."
"말이 그렇단 거지."
킬킬대며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숭늉 마시듯 후룩 들이킨 박경은 묘한 표정으로 우지호를 바라보았다.
"과연 저 놈은 득일까, 실일까."
"응?"
"우리 인류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궁금하다 이말이다."
그럼 난 나가니까 불 좀 끄고 나가라,하고 손을 휘휘 흔들며 나가버린 박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침대로 다가가 여전히 팔을 꾹꾹 누르고 있는 우지호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숙였다. 아무 표정 없는, 생김새와 달리 순진해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 언밸런스하다. 우지호는 까만 눈을 깜박이며 내 눈을 바라 보았다.
"넌 득이냐, 실이냐?"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알아들을 거란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놀랍게도 녀석의 입에선 바로 대답이 튀어 나왔다.
"아무것도."
감춰둘 내용을 여기에 입력하세요. 분량이 개구지네요^^ 화내지 마여...그르지 마thㅔ여....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