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
앗, 뜨뜨. 종대가 입밖으로 나올뻔한 말을 집어삼키며 살짝 돌아 누웠다. 벌써 따듯하다 못해 뜨끈뜨끈해진 핸드폰이었다. 핸드폰이 뜨거워짐과 동시에 익을듯한 볼을 한손으로 문지르며 지금까지 누워있던 방향과는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으응, 하고 답하니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이야기들이 다시 주욱 늘어진다. '아, 그래서 완전 짜증났어. 무슨 가족모임이 전국사촌자랑도 아니고… 할말이 그렇게들 많은지.' 불퉁하게 뱉어지는 말들이 귀여워 그랬어, 하고 푸스스 웃으니 작게 한숨을 쉰다. 아, 몰라ㅡ.
야, 나 살쪘어? 하고 조심스레 물어오기에 아니이, 너 아직도 말랐어. 살 좀 찌라니까. 하고 덧붙여 답하니 그치? 하고 금새 한톤 목소리가 높아진다. '근데 자꾸 이모랑 사촌언니가 살쪘다는거 있지. 내가 살빼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ㅡ.' 이어지는 말에 경악스럽기 그지 없었다. 아직까지도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다니. 세달 전쯤이었나,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내게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했던 너였다. 사실 날이 갈수록 안그래도 뼈가 툭툭 튀어나와 있던 팔뚝, 손 마디마디가 점점 더 비쩍 말라가는것을 보며 언제 한번 아직도 다이어트 하냐고 물어봐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만날때마다 하얗게 되는 머릿속에 잊어버리기 일쑤였지만.
- 으으, 지금 몇시지? 우리 통화 얼마나 했어?
직접 시간을 확인하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어두운 방안에 눈을 감고 조근조근, 가끔은 발끈하며 느릿하게 말을 이어가는 걸 보니 잠이 몰려온 상태겠거니, 싶어서 어두운 방안에 꺼져있던 핸드폰 액정을 켜 통화 시간과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우리 두시간 통화했어, 오래도 했네. 지금ㅡ 세시반. 안 졸립냐? 이미 잠이 올대로 온듯한 목소리에 넌지시 물으니 그제야 아까부터 잠이 와 비몽사몽했다며 웃는 너였다.
- 하여간 김종대, 둔팅이. 나 아까부터 잠왔는데, 그것도 몰랐냐?
삐지지도 않았으면서 삐진척 불퉁한 목소리를 잠결에 연기하는 모습이 꽤나 귀엽다. 그에 내가 먼저 끊자는 말을 하지 않으면 배려한답시고 밤이 새도록 전화를 끊지 않을 너를 생각해 아아, 잠온다. 끊자. 하고 목소리를 깔았다.
- 그러게에, 너 목소리 잠겼네? 자야겠다. 내일 올라가서 연락할게. 잘자든지 말든지..
괜히 쑥쓰러움에 잘자라는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대는 네가 그려져 웃음을 흘리고 그래,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나저나, 둔팅이. 김종대 둔팅이. 어딜가나 눈치로는 빠지지 않는 이 김종대가 둔팅이. 하루종일 있던 일들을 조곤조곤 말하는 네 목소리가 좋아, 한마디라도 놓칠까 귀를 쫑긋 세운채, 숨소리도 고르게 내려 노력하는 나였는데. 두시간이건 세시간이건 잔뜩 과열된 핸드폰에 한쪽 볼이 익을지경인데도 티조차 내지 않고 맞장구를 쳐주는 나였는데. 둔팅이라니. 말도 안되지만 괜한 서운함이 들었다. 친구라는 이름때문인가….
*
개강 전 마지막 주말이었다. 가족 모임이 있다며 연락도 없이 시골로 내려갔던 네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방학중 만난 선배에게 난생 첫 소개팅을 부탁했던 너의 소개팅 날이었다. 그리고 김종대 사상 최악의 날이었다. 소개팅이라니, 소개팅이라니, 소개팅이라니…. 말도 안된다. 나는 지금껏 되도 않는 짝사랑을 이뤄보겠다고, 첫사랑을 이뤄보겠다고 이렇게 고군분투하는데. (보이지 않는 노력이었다.) 상대 남자는 잘생겼을까, 키는 클까, 성격은 좋을까.
소개팅은 뜬금없이 왜 하는데? 선배에게 네가 소개팅을 부탁한 날, 내가 너에게 건넨 말이었다. '그냥, 외롭잖아. 다들 커플인데ㅡ.' 항상 나한테 둔하다며, 둔한건 내가 아니라 너였다. 매일 커피는 누가 사주고, 같이 먹어줬는데. 웃기지도 않는 네 말에 배를 잡고 넘어가주는건 누구였는데. 고마운줄도 모르고 다른 남자를 찾아? 아무것도 모른채 소개팅에 설레이고 있을 너를 생각하니 괘씸함이 일었다. 네가 하는 소개팅, 나는 못할것 같냐. 내가 나한테 고백해오는 수많은 여자들을 왜 거절했는데.
[박찬열 나 소개팅 좀]
# 01
지루함에 말간 하품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꾸욱 참아내고 부자연스럽게 말아올려진 입꼬리를 자연스럽게 말아올렸다. 네, 그러셨구나ㅡ. 사실 친구 찬열에게 소개팅을 주선해달라며 조르긴 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주선이 될 줄은 몰랐다. 말을 꺼낸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약속을 잡았다며 닦달하는 찬열에 너의 소개팅이 있을 그 카페에서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 여자를 만났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내심 상대방 여자가 어떤 사람일까, 하고 상상은 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내가 말했던 이상형에 전혀 맞지 않을뿐더러 향수병을 들이부었는지 짙은 여자 향수 냄새가 주변에 그득했다. 후우, 여자 모르게 숨을 들이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음을 지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었죠? 너를 향한 괘씸한 마음이 든다고 했어도 이런 자리에는 나오는 게 아니었다. 후회가 깊게 일었다.
여자는 방금 뭐라고 하셨죠? 하는 내 물음에 지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머쓱한 웃음을 흘리자 여자는 잘 정리된 머리를 흩트리며 처음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개팅 하기 싫으세요?' 순간 당황해 아, 그게…. 하고 이어질 말을 생각하는데 여자가 여전히 짙은 향수냄새를 풍기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또 박찬열한테 한소리 듣겠네, 친한 후배랬는데.
…아아. 지루하기 그지없던 여자가 일어서자 건너편 테이블에는 네가 수줍은 듯 웃고 있었다. 여자는 거칠게 일어서 카페를 나섰고, 나는 말없이 벌떡 일어서 쿵쾅 거리는 발걸음으로 카페를 벗어나는 여자를 따라나서 붙잡기보다는 맞은편에 앉은 네 모습을 관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늘따라 웃는 네 모습이 예뻤다. 딴에 소개팅이라고 꾸미기는 했는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귀 뒤로 넘기는 모습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 귀걸이, 어디서 많이 봤는데…. 눈을 가늘게 떠 ○○의 귓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종대가 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했다. 저 귀걸이, 내가 선물한 건데. 언제나 한껏 올라가 내려올 줄 모르던 종대의 입꼬리가 축, 하고 내려왔다. 내가 선물한 귀걸이를, 감히, 외간 남자랑 하는 소개팅에 하고 나와? 또 한번 괘씸함이 일었다.
제 앞에 가지런히 놓인 물컵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킨 종대가 조금 전 자리를 박차고 나간 여자마냥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개팅이고 뭐고, 내가 알게 뭐야. 소개팅에 나온 걸로도 모자라 제가 사준 귀걸이까지 번듯이 하고 나온 네가 괘씸해 입술을 꾹, 감쳐물고 여태껏 묵묵히 바라만 보던 맞은편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툭툭.
그래도 소개팅이라고 차려입길 잘했네, 하고 고갤 끄덕이다 느릿하게 고개를 드는 너에 축 처졌던 입꼬리를 원상복귀 시키며 잔잔한 미소를 그려냈다. 자기, 여기서 뭐 해. 그리곤 다시 입꼬리를 추욱, 내렸다. 맞은편에 멍청한 표정으로 굳어 무의미한 시선을 주고받는 너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남자가 보란 듯이. 아아, 오늘은 박찬열로 모자라 너한테까지 한소리 듣겠네. 그치만, 뭐.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종대였다. ○○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크게 서렸고, 종대의 입가에는 기분이 좋은 듯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
김종대 진짜 미쳤어? 결국엔 나란히 카페를 나서며 네가 한 말이었다. 좋지 못한 소리를 들어도 얼굴 가득 웃음이 번졌다. 한참을 옆에서 투덜대기도 하며, 아프지도 않은 주먹으로 내 팔뚝을 작게 때리기도 하며 생각없이 걸음을 옮기는 너와 나였다. 툴툴거리며 때려오는 주먹이 한두번쯤 아플법도 한데, 종대는 여전히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채 '내가 잘못했네.' 하고 장난스레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김종대, 오늘일 용서해줄테니까 하나만 묻자.' 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던 다리를 멈추고 길가에 멈추어 서 물어오는 너에 고개를 갸웃했다.
"너 오늘 소개팅했지?"
"뭐야, 그거 물어보려고 무게 잡냐?"
"소개팅했어, 안 했어."
"보시다시피."
"그래놓고 왜 나한테 심술인데, 나쁜 놈아!"
이번에는 핸드백이야? 뭐가 그렇게 잔뜩 들었는지, 무거운 핸드백으로 내려치자 아까와는 다르게 꽤나 아팠다. 그에 아아, 아파. 진짜, 진짜! 하고 살짝씩 피하니 이번엔 꼼꼼히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문 채로 핸드백을 내게 던지다 시피 하는 너였다.
어어?
종대가 저를 향해 내려쳐지는 핸드백을 살짝 막는 동시에 얇은 팔목을 휘어잡아 내렸다. '이러면 내가 아니라, 네가 아파. 여자애가, 팔 안 아프냐?'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잡힌 팔목을 빼내려 끙끙대는 너에 스읍, 하고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이거 무슨,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찍는 기분이다. 종대가 살풋 웃으며 몸을 살짝 숙여 시선을 맞췄다.
"왜, 왜. 뭐, 뭐… 뭘 보는데."
"내가 사준 귀걸이 하고 소개팅하니까 좋냐?"
"네가 사준, 뭐?"
"이젠 내가 선물한 것도 잊어버리냐, 서운하네."
"아, 아냐! 그런 게 아니라아…."
사실 서운하긴 했다. 아니, 서운했다. 진짜 서운했다. 완전 서운했다. 그럼에도 장난기를 가득 섞어서 말한 이유는, 혹시나 또 제가 준 선물 하나 기억하지 못했다고 의기소침해할게 뻔했기 때문에. 그냥, 의기소침한 네가 보기 싫어서 그랬다. 조심스런 눈길로 올려보는 너의 눈길이 느껴졌다. 서운한 마음에 잘 지어지지 않는 미소를 입가에 살짝 걸쳤다.
"됐어, 김종대가 그런거 하나 가지고 삐지는 쪼잔한 남자냐?"
오늘도 눈치없는 너를 위해 새로운 김종대를 만들었다.
+
우리 죠대.. 부쨩...
소개팅남... 부쨩... 소개팅녀... 부쨩...
이 글이 느리게 가는 이유는.. 내가 굉장히 아끼는 글이기 때무네.
개인적으로 이런 종대를 좋아해여..(울먹) 종대..(울먹)
오랜만에 시간 남을때 톡이나 할까.. 우리 암닉도짜님들이랑 주제 만들어서 함 해보까?
나 종대톡하고싶은 주제 많은데 완전완전 많은데! 지금 접속해있는 암닉도짜있으면 해야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