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 그리고 우리 04
w. 솦이
일훈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답장에 핸드폰을 꾹- 쥐고 화면만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바탕화면 속 환하게 자리 잡고 있던 설이의 사진이 흐려졌고, 곧이어 배터리가 20%도 남지 않았다는 문구가 보였다.
짧은 한숨을 뱉고, 소파 위로 신경질 적이게 핸드폰을 던졌다.
답장이 빠른 편인 설이 이렇게 보지 않는다면, 아마 그 녀석과 같이 있다는 이야기겠지.
일훈은 자신의 머리를 한번 신경질적으로 비비고는, 소파와 한 몸이 된 듯 풀석- 눕다 싶이 앉아버렸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부푼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더 이상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쓸데없이 밀려오는 예전 생각에, 일훈은 눈을 감았다.
*
중학교 1학년, 중학생이 되었다는 설렘보다 지루함이 가득했던 나는 시끄러운 반을 박차고 음악실로 달려갔다.
그곳은 유일하게 학교에서 내가 좋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피아노도 칠 수 있고, 뭐 그런 이유 때문에
어김없이 창문으로 올라가 잠겨 저 있는 문을 열고는 폴짝-하고 뛰어 들어왔다.
맨 뒤쪽에 자리를 잡고는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구경하며 오늘은 아빠가 집에 들어오실까- 생각에 잠겨있던 중이었다.
그때 널 보았다. 내 무료한 삶의 한 줄기 빛처럼, 화단에서 방긋방긋- 나비보다 더 예쁜 몸짓으로 물을 주고 있는 널.
뭐가 그렇게 행복한 것일까. 뭐가 그렇게 좋아서 말도 못하는 식물 따위에게 물을 주며 무척이나 행복하다는 듯이 웃고 있을까.
빛이나 보였다. 그녀는. 상대적으로 나는 흑빛이였고 그녀는 밝은 햇빛이었다.
일훈은 일 때문에 바쁜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를 당연히 여기고 있으면서도, 항상 바라왔다. 언젠가 아침에 일어날 때
방금 지은 고소한 밥 냄새와 함께 '잘 잤어? 아들- '하며 애교 있게 웃어 보이는 어머니와 식탁에 앉아 신문을 펼치며 '일어났구나, 앉거라' 하며 자신을 반겨주는
아버지를, 하지만 현실은 식탁에 올려진 오만 원짜리 한 장이 전부였다.
일어나면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식사를 차려주었고, 난 먹지 않았다.
일 년에 한 번은 볼 수 있는 것일까. 날 기억이나 할까. 날... 가족이라고 생각은 할까.
7살 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바쁘신 분이 이후 나라며 깨달은 것은, 그럼 난 얌전히 기다리는 착한 아들이 돼야지! 그때의 생각이었다.
몇 년이 지나 알게 된 건 얌전히 기다리건, 시끄럽게 기다리건, 마찬가지였다. 돌아오는 건 식탁에 있는 오만 원짜리 한 장과, 내가 때린 아이들과의 합의 정도.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학교를 갔다가 태우러 오는 차에 몸을 싣고 다시 집에 와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차려준 식사를 대충 치워놓고, 아침이 되면 똑같은 일상.
내 나의 14에 깨달아버린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상, 그리고 돈으로 만드는 세상. 무료했다. 마치 죽어있는 것처럼.
그런 나에게 그녀의 출연은 대단했다. 잠깐 스쳐 지나갈 줄 알았던 아이의 행동은, 흥미로웠다.
만나고 싶었다. 묻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냐고, 무슨 생각을 해야 너처럼 예쁘게 웃을 수 있는 거냐고.
내가 그런 표정을 지으면, 엄마 아빠도 날.. 바라봐주지 않을까... 하고
#
다음날, 그 다음날도 너를 보러 음악실에 왔다. 아침에 잠깐 들린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너의 생김새를 말하며 너의 대해 물어보았다.
나의 어눌한 설명에도 아이들은 단번에 너인 줄 알 정도로, 넌 꽤나 유명했나 보다. 이름은 김설.
바로 옆 반이었는데 왜 몰랐을까. 그날 이후로 매일 화단에 물을 주는 너를 보러 음악실을 왔다 갔다 했다. 어김없이 심장을 찌르는 너의 웃음에
내가 언제 무료한 삶을 생각했나 싶을 정도로 모든 걸 잊게 만들었다.
바라만 봐도 좋다는 게 이런 것일까. 자그마치 2년이었다. 학년이 올라가고 반이 바뀌어도 넌 한결같이 화단에 물을 주었다.
그 화단이 점점 화려해지고 예뻐졌을 때 너와 난 같은 반이 되었다.
꿈에 그리던 너와의 대면에 난 심장이 멈춰버린 것처럼 숨을 쉬지 못하였다. 옆에서 창섭이 정신 차리라며 어깨를 치지 않았다면, 아마 호흡곤란으로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가까이서 본 넌, 더욱 예뻤다.
"아.. 안녕? 우리 처음 보는 것 같지? 2년이나 같은 학교였는데 이상하네."
".. 난 너 매일 봤어."
"응? 아 정말? 어디서?"
"화단 "
수줍게 말을 먼저 걸어오는 너에 몸이 굳어 제대로 말을 하지 못 했다.
떨리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너의 예쁜 눈동자도 보지 못 했다. 이게 지금까지 한이 된다.
화단에서 봤다며 짧게 말을 하는 나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환하게, 내가 좋아하는 그 웃음을 지으며 그렇구나! 꽃이 정말 예쁘지? 그렇게 말을 했다.
그리고, 난 이때 물었다. 2년 동안 꼭꼭 숨겨뒀던 내 오랜 마음의 소리를.
"어떻게... 하면......"
"응?"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예쁘게 웃을 수 있는 거야?"
"응?.. 내가 예쁘게 웃어?"
"응. 살아있지도 않은 식물 따위에 물을 주면서,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어?"
어린아이같지 않은 날카로운 나의 말에 너는 잠시 나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내 갑자기 나의 손을 덥석- 잡더니 교실 밖으로 날 이끌었다.
힘을 주어 내칠 수도 있었지만, 사실 더 잡고 있고 싶었다. 그 손이 너무 따뜻했기 때문에..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기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네가 한 뼘이나 큰 나를 힘겹게 이끌고 온 곳은 2년 동안 멀리서만 바라보던, 너의 가녀린 뒷모습에 잘 어울리는 화단이었다.
너는 나의 손을 놓고 무릎을 굽혀 꽃의 향기를 맡았다.
"살아 있어. 그리고 난 그런 꽃을 보는 게 좋아"
"어째서 살아있다는 거야? 말도 하지 못해"
"향기로 말을 해, 난 그런 꽃의 말을 듣는 게 즐거워.
내가 하루라도 물의 온도를 잘못 맞춰 주면, 그 다음날 어찌나 심통을 부리는지! 잔소리 쟁이 인걸?"
진심인 양, 얼굴 한가득 예쁜 웃음을 짓고 있는 너에게 어떠한 말도 못할 것 같았다.
너무 예뻐서,.. 나와 다르게 빛이 나서 눈이 부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넌 잠시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리곤 내 앞에서 나의 식어버린 양볼을 감싸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살아있어. 너와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저 꽃들도 살아있어."
내가 2년 동안 보았던 티 없이 맑은 웃음을 머금은 채, 넌 내게 말했다. 그런 너의 말에 마치 내가 살아있다는 걸 증명받은 것 같은 기분에
눈물이 고였다. 내가, 살아있다. 이 무료함 끝에 네가 있었다.
".. 나도 웃고 싶어.. 너처럼"
"그래, 내가 웃게 해줄게! 매일 나랑 화단에 오자."
울먹이는 나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작은 손으로 나의 손을 잡으며 씩씩하게 말했다.
그 뒤로 우린 매일 화단에 가서 물을 주었다. 설이는 꽃을 보며 웃었고, 난 너를 보며 웃었다.
서로 다른 시선으로 그렇게 우린 웃음을 찾았다.
그리고, 여전히 난 너를 보며 웃는다.
너는 내 웃음이니까.
*
무거운 눈꺼풀에 천천히 감긴 눈을 떴다. 잠이 들었나 보다. 갑자기 예전 꿈은 왜 꾼 것인지, 더욱 설이 보고 싶어졌다.
꺼진 핸드폰에 젠장- 한숨을 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둑한 집안의 공기가 설이를 더욱 그립게 했다. 빛이 필요했다.
-띵동, 띵동
크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일훈은 눈을 찌푸리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올 사람이 없는데, 이 시간에 대체 누구야.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보니 밤 12시가 다 되었다.
인터폰을 보지도 않고 문을 턱- 하고 여니, 보이는 하얀 얼굴에 일훈은 잠시 내가 꿈에서 덜 깬 것인가 의심을 했다.
"일훈아, 너어- 폰도 꺼놓고! 걱정했잖아. 나 추운데 들어가도 돼?"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양손을 호호-불며 말하는 너는 정말 눈물 나게 예뻤다.
보고 싶었다. 나는 너를 보자 나오는 웃음에 들어오란 소리도 못하고 너를 꼭- 안아버렸다.
그런 나의 모습에 놀란 듯 굳어있는 몸으로 나의 등을 토닥토닥 쳤다.
".. 일 훈아, 무슨 일 있었어..?"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너의 목에 내 얼굴을 비볐다. 어떤 꽃향기보다 좋은 너의 냄새 틈에 창섭의 향기가 났다.
지우고 싶었다. 내 향기로, 조심스럽게 나를 올려다보는 너의 손을 잡아 집 안으로 끌었다. 힘없이 딸려오는 너의 뒤에 있는 문을 닫고는 그대로 밀쳐
입을 맞췄다. 놀랜 너의 손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에 떠 있었다. 안된다는 걸 알았다. 얼마나 혼란스러워할지도 알았다.
그 녀석도 나도 서로 때문에 마음 편히 설이를 바라보지 못 했던 것도, 그런 우리를 받아들이지 못할 설에도 잊고 싶었다. 이 순간만큼은.
#
분명 난 삐져있을 일훈이에게 사온 치킨을 주며 같이 먹자며 애교를 부릴 참이었다.
진지한 표정에 무언가 일이 있나 걱정했던 것도 잠시, 일훈이 손을 거칠게 잡아끌고는 문으로 밀쳐 키스를 했다.
거칠던 손과는 다르게 그의 키스는 한없이 부드럽고, 간절했다.
당황해 허공에 떠있는 내 손을 무시하곤 일훈은 나의 목덜미를 쓸고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정신을 차린 내가, 바둥대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더욱더 진하게 이끌어 갔다.
그것도 잠시, 일훈이 입술을 살며시 때고 날 지긋이 바라보았다. 살짝 풀려 내려다보는 눈이 섹시해 보였다.
"눈 감아"
낮게 깔린 허스키한 목소리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곤 그는 다시 입을 맞췄다.
이렇게 강압적인 일훈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휘둘리는 나도 처음이었다. 문뜩 아까 악보를 바라보던 창섭의 얼굴이 생각이 났다.
일훈은 내가 창섭이 생각을 하는 것을 알았는지, 내 손을 꾹- 잡고서는 내 눈을 마주쳤다.
"나랑 있을 때, 그 새끼 생각하지 마. 설아. 나도 안 참을 거야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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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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