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 그 불완전한 나이.
23
너와 같이 보내온 시간도 벌써 아득하다.
하지만 난 너를 처음 봤던 그날을 아직도 기억해.
*
아버지가 이직을 하시게 되면서 우리 가족은 뜻하지 않은 이사를 해야 했다. 아버지는 다시 새롭게 시작할 것이라며 좋아하셨지만, 나는 좋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여기 있던 친구들이랑 헤어져야 했으니까. 어린 마음에 그때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가기 싫다고 엉엉 울고 있으면 갓난 아이였던 내 동생도 나를 따라 울었다. 그런 우리 둘을 달랜다고 부모님께서는 애를 좀 먹으셨지만, 나는 그게 그렇게나 슬플 수가 없었다.
엄마가 나를 어르고 달래서 겨우 간 초등학교는, 솔직하게 말하면 별로였다. 애초부터 이곳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학교도, 운동장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3학년 끝 무렵에 전학을 간 거였기 때문에 친구 사귀기에도 되게 애매할 것 같아 더 별로였고. 몰라. 친구 못 사귀면 그냥 혼자 살면 되지, 뭐. 반갑다며 내게 인사를 하는 선생님을 보고도 나는 퉁명스러운 마음에 대충 고개를 까닥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끌벅적했던 교실은 나의 등장으로 조용해졌다. 아이들이 나를 보며 누구냐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은 오늘부터 같이 공부하게 된 김민규라고 한다며, 비록 4학년으로 올라가기까지 얼마 남진 않았지만 그래도 친하게 지내라면서 나를 소개해주셨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에는 낯섦이 가득했다. 나도 낯설은데 애들이라고 오죽할까. 어느 정도 예상했던 거라 아무렇지 않았다. 선생님은 뒷자리에 혼자 앉아있는 여자아이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내게 저기에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안녕?"
"……."
뭐야, 얘는…. 모든 게 달갑지 않던 상황이라 내게 인사를 해오는 여자아이도 그렇게 달갑지만은 않았다. 대꾸도 않고 책상에 엎드리는데 여자아이가 왜 제 인사를 무시하냐며 나를 툭, 툭 건드려왔다. 에이. 진짜 귀찮게. 내가 고개를 들고 그 여자아이를 보니 여자아이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김여주. 네 이름은 민규랬지?"
"어."
"친하게 지내자!"
그때의 나를 생각하노라면, 왜 이렇게 바보 같은지 모르겠다. 이미 이사를 온 이 시점에서 예전 친구들은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러면 나도 그 상황에 맞춰서 적응을 해나가야 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기엔 나는 너무 어렸었다. 내게 호의를 보이며 인사를 해오는 여주를 보고도 나는 그냥 인사를 씹고,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옆에서 뭐야… 하며 자꾸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려오길래 그 목소리가 듣기 싫어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묶고 있던 여주의 머리끈을 풀어버렸다.
"야!!!!"
나 머리 묶을 줄 모른단 말이야! 울상이 되어버린 그 표정이 왜 그렇게 재밌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때부터 그 아이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머리를 묶고 있으면 풀어버리고, 책에 낙서도 하면서 여주의 신경을 살살 긁어댔다. 그때 여주를 괴롭힌 것에 대한 변명을 조금 해보자면, 나는 이사에 대한 설움을 그 아이한테 풀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만 둘 수가 없었던 게, 그 애 반응이 꽤나 웃겼었거든.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도망가는 나를 어떻게든 잡겠다며 뛰어오는 애가 귀엽기도 했었고.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처음과는 달리 나를 싫어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나는 그 짓을 멈출 수가 없었다.
수업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갑자기 눈이 내렸다. 밖으로 나가자고 징징대는 아이들에 선생님은 조금만 참았다가 이번 수업만 끝나면 나가자며 아이들을 설득했다. 애들을 대충 달래놓고 수업을 진행하긴 하는데, 아이들의 시선은 모두 창밖으로 쏠려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몇 번이나 집중을 하라며 교탁을 두들기긴 했지만, 애들이 집중을 할 리가 있나. 얼른 수업이 끝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수업 종이 울리는 순간에, 아이들은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줄로 맞춰서 조심히 나가라는 선생님의 말씀에도 아이들은 그저 신나 운동장으로 뛰어나가기 바빴다.
운동장에는 곧 다른 반 아이들도 하나둘씩 나왔다. 아까부터 많이 내리던 눈은 바닥에 은근 쌓여있었고, 아이들은 그 눈들을 긁어모아 서로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맨손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때는 '눈' 이라는 것에도 즐거워하던 순진한 애들이었으니까. 손이 시렵다며 방방 뛰면서도 아이들은 서로를 맞추기 바빴다. 나도 눈덩이를 하나 만들고 김여주가 어디 있나 막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였다.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미안하다고 말하면 다야?"
어디선가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덩치 큰 남자애와 김여주가 서 있었다. 남자애 머리에는 눈이 묻어 있었고, 화가 나서 씩씩대는 걸 보니 아무래도 김여주가 그 남자애한테 눈을 잘못 던진 것 같았다. 옆에 서 있는 여러 명의 사내들은 덩치 큰 남자애의 친구들인지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부추기고 있었고. 원래 귀찮은 일에는 끼지 않자, 가 내 신조 같은 거여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약간 겁을 먹은 듯 그 남자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흠칫 놀라는 그 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에이씨, 이거 저 남자애한테 던지려고 만든 거 아닌데.
"야."
김여주에게 던지려고 정성스럽게 만든 눈덩이를 그 남자애에게 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그 남자애의 등에 맞은 눈은 그대로 바스러졌고, 그런 내 행동에 넌 또 뭐냐며 남자애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내게 다가왔다. 김여주는 그런 나를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김여주를 한 번 봤다가, 나는 그 남자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쟤는 나랑만 싸울 수 있어."
"뭐?"
"쟤는 나랑만 싸울 수 있으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아무도. 내 말에 남자 애는 약간 황당한 듯 말이 없었다. 말을 잃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일지도. 뭐야, 이 또라이는. 헛웃음을 날리던 남자애는 그 말을 끝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그 남자아이랑 어떻게 싸웠는지 모르겠다. 그냥 눈밭을 구르며 나를 때리는 이 애를 따라 나도 막 때리고 있는데, 허겁지겁 달려온 선생님이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소리를 버럭 지르셨다. 뭐야, 누가 부른 거야! 선생님의 등장으로 당황을 한 건지 남자애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도 그를 따라 일어나 몸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고 고개를 돌려 옆을 보는데, 그곳에는 선생님 옆에서 울먹이고 있는 네가 서 있었다.
"민규 너는 전학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이렇게 싸우면 어떡해?"
수업이 다 끝난 후에, 나랑 그 남자애는 교무실로 끌려가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있었다. 그 남자아이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교무실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폭풍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저러니까 내가 더 잘못한 거 같잖아, 젠장. 나는 그냥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죄송하다는 말만 연신 했다. 선생님은 한숨을 푸욱 쉬시더니 다음부터는 싸우지 말라며, 이만 나가보라고 하셨다. 훌쩍이며 먼저 나가는 남자애 뒤로 교무실을 나서니, 그 앞에는 네가 서 있었다. 내 가방은 언제 챙겼는지 제 어깨에 메고는.
"…괜찮아?"
"뭐가."
"너 얼굴에 피…."
아, 그러고 보니까 아까 피나던데. 엄마한테는 뭐라고 설명하지…. 딱지가 진 내 얼굴을 보더니 너는 또 울먹이기 시작했다.
"야, 야. 울지 마…!"
히끅대며 울먹이던 너는 결국 엉엉 울기 시작했고, 나는 그게 너무 당황스러워 어떻게 해야 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여자애가 우는 거라곤 본 적이 없다. 내 동생을 제외하고는. 내 동생은 까꿍! 하면 멈추던데. 얘한테는 그런 거 안 먹히겠지? 아오, 어떡해…! 울지 말라고 말을 하는데도 그치지 않는 너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다가 나는 그냥 아무 말이나 질렀다.
"아, 울지마! 가뜩이나 못난 얼굴 더 못나지니까!"
…아, 나 바본가. 나는 내가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달래준답시고 한 말이 저거라니. 하도 놀리는 게 익숙해져가지고 이런 순간까지도 나는 너를 놀리고 있었다. 잘못 말을 한 거라고 변명을 하려고 하는데, 희한하게도 이 방법이 먹힌 건지 너는 울음을 멈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뭐? 못 나?"
"그래, 몬난아. 그러니까 그만 울으라고."
"…너 진짜 죽을래?!!!"
죽을래? 라는 말은 끝으로 나를 막 때리기 시작하는데, 생긴 건 그렇게 안 생겨가지고 때리는 힘은 왜 이렇게 센지. 몇 번 맞아주려다가 너무 아파서 나는 그만 때리라며 네 손목을 잡았다. 아까 그 남자애한테 이렇게 때렸으면 이기고도 남았겠다! 내 말에 너는 이거 안 놓냐며 막 바둥거리는데, 내게 화는 났어도 어느새 울음을 그친 너를 보고 있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쳤네."
"……어?"
"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네 어깨에 메여져 있는 내 가방을 가지고선, 앞장 서라며 턱짓을 하니 너는 흥! 콧방귀를 뀌고는 계단을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야, 같이 가! 우다다다 뛰어가는 너를 따라가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너를 지켜줘야겠다고.
항상 내게 소리를 지르고, 나를 때리던 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여렸고, 또 약했다. 울먹이던 네 모습을 볼 때 가슴이 얼마나 철렁 내려앉던지. 다시는 오늘 같은 날이 일어나지 않도록, 옆에서 너를 지켜줘야겠다고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리고 그때는 어렸을 때라 잘 몰랐었는데…
나는 그렇게 다짐한 순간부터, 너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 같다.
*
집 방향이 같다는 걸, 그리고 가깝다는 걸 안 후로는 우리는 매일 같이 다녔다. 그러다 보니까 나는 김여주네 오빠랑, 그리고 김여주는 내 부모님이나 동생이랑 잘 아는 사이가 되었고. 그날 이후로 급속도로 친해지게 된 것 같다. 운이 좋은 건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계속 같은 반이었고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모두 같은 곳으로 배정받았다. 대체 너랑은 언제 떨어지냐며, 징글징글해 죽겠다면서 너랑 떨어지게 얼른 남자친구라도 만들어야겠다고 말을 하는 너에게 나는 말했다.
"그거 아냐? 너한테 남자는 나 하나밖에 없을 거라는 거."
"아,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소름 끼친다는 듯이 제 어깨를 쓸면서 말하는 김여주에 진심으로 섭섭해지려고 했다. 야, 내가 어때서! 나 정도면 괜찮지! 내 말에도 김여주는 응, 그래- 하며 영혼없는 대답을 하고는, 밥이나 먹자며 나를 식당으로 끌고 들어갔다. 진짜 나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나 나름 인기도 많은데, 흠. 진지하게 나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김여주가 내 앞으로 젓가락을 흔들어 보이며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어왔다. 아, 아니. 별거 아니야. 나는 애타는 속에 냉수만 들이켰다.
각자 시킨 메뉴가 나오고, 밥을 먹고 있는데 정말 뜬금없이 초등학교 때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때의 일을 먼저 꺼냈던 건 너였다. 그때 눈 오던 날을 기억하냐며 내게 묻는 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나지."
그때부터 내가 너를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뒷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그저 기억이 난다고 말을 하자 너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이내 픽 웃더니, 원래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하며 운을 떼기 시작했다.
"그때 너 약간 등신 같긴 했는데, 그래도 멋졌어."
"오빠 멋진 거 이제 알았냐, 몬난아."
"그 놈의 몬난이 소리 진짜 그만 안 할래?"
이게 기껏 멋있다고 말해주니까. 지겹지도 않냐? 주먹을 쥐는 너의 모습에 미안하다고, 얼른 밥이나 먹자며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 나도 할 말 있는데."
내 말에 너는 뭔데? 하고 물어왔다. 내가 말하던 것을 멈추고 가만히 너를 쳐다보고 있으니 내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러운지 '왜, 왜 그렇게 보는데.' 하며 묻는 너에게 나는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뭔데! 말해 달라고! 빨리 말하라며 나를 닦달하는 너에 나는 밥 한 숟갈을 크게 퍼서 네 입에 집어넣곤 밥이나 먹어, 하고 말았다. 내가 하려던 말이 뭐였냐면….
너 예쁘다고, 그 누구보다도.
하지만 그 말을 하기엔 내가 부끄러워서 항상 반대로 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안녕하세요, 작가입니다.
2부가 시작된만큼 분량이 많기를 기대하셨을텐데
분량이 짜서 죄송합니다...8ㅁ8
하지만 흐름상 여기서 이야기를 끊는 게 낫다고 생각을 했어요.
본격적인 2부에 들어가기 앞서 보시는
프롤로그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네요..ㅎㅎ...
다음부터는 분량 많이 써서 오도록 노력할게요!
암호닉은 2월 29일 자정까지, 1부 후기 글에서 받습니다!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12시로 보시면 맞을 것 같네요.
저 감동받았잖아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암호닉을 신청해주실 줄은 (왈칵)
우리 독자님들은 다들 왜 이렇게 말도 이쁘게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ㅠㅠㅠ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리고...
신청하실 분은 어서 신청해주세요....♡
암호닉은 29일 이후부터 쓰도록 할게요!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ㅎㅎㅎ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독자님들 제가 정말 많이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