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석은 도어락 앞에서 10분 째 서 있는 중이었다. 루한과의 연락이 끝난 후 한강둔치를 거닐 던 발걸음을 돌렸다. 버스 창문에 기대어 빠르게 변하는 도시의 풍경에 잠시나마 폭풍같은 일상을 잊을 수 있었다. 한 때 정말 남들 못지않게 예쁜 연애를 했었다. 한 때. 지금 돌이켜보면 다 한 때 였다. 감정소비를 열심히 해댔던 지난 날이 무색해졌다. 아파트 단지를 들어오면서 민석은 다시 고민했었다. 들어갈까, 말까. 이미 고갤 들었을 땐 4층에 있는 한 익숙한 현관문 앞이었다. 그 로부터 10분 째. 계속해서 답을 찾을 수 없는 내면의 싸움을 하던 민석은 덮개를 위로 올렸다. 비밀번호를 누를 때마다 띡- 띡- 거리며 경쾌한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긴장되는지 조금씩 떨리던 손이 덮개를 내리곤 문을 열어제꼈다. 움직임에 자동으로 센서가 반응하여 신발장 위의 불이 켜졌다. 그와 대비되게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 민석이 서 있는 현관을 빼곤 너무도 칠흑같아 섬뜩하기까지 했다. 루한의 반응은 어떨까.
"루한." 떨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입까지 틀어막은 민석은 조심스럽게 거실로 발을 내딛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민석은 달빛으로 인해 밝은 베란다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루한이 있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금발이 아름다웠다. 담배를 피는 모습조차 아름답다고 느껴져왔다. 그건 아직도 루한에게 씌인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아서 일까. 이런 상황에도 루한의 외모에 감탄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민석은 베란다 문을 열었다. 서늘한 밤 바람에 옅게 섞인 담배 냄새가 났다. 몸을 틀어 민석의 존재를 확인한 루한은 옆에 있던 종이컵에 담배를 비벼껐다. 둘은 대화 없이 서롤 바라 볼 뿐이었다. 서서히 찰랑이는 민석의 눈과 다르게 루한은 전혀 감정의 동요 따위를 보이지 않았다. 차디 찬 바람이 그 둘을 지나가고 먼저 입을 연건 달빛만큼이나 아름다운 그였다. "늦었네." "응..." "그 동안 많이 힘들었지?" "응... 어?" 예상치 못하게 그 입에선 다정한 말이 나왔다. 제 2의 동거를 시작한 이래 자신에게 차갑게 굴던 그가 갑자기 낯간지러운, 걱정하는 듯한 어조를 보인다. 맙소사. 민석에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루한은 민석의 목덜미에 손을 댔다. 아기다루듯 쓸어대는 손길에 고양이처럼 갸르릉 거려야 할 것만 같았다. 민석의 마음에선 태풍이 몰아쳤다. 격해지는 감정에 눈시울이 붉어져왔다. 루한도 그런 민석의 두 눈을 주시하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미안했어. 결국 민석은 두 볼로 뜨거운 방울들을 흘려보냈다. 시야가 흐릿해져 가까이 서 있는 루한의 얼굴이 보였다, 안보이기를 반복했다. 심장이 터져도 좋다. 귓 속까지 둥둥거리는 울림이 들려왔다. 루한의 사과를 직접 들을 수 있다니. 민석은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던 루한의 손목을 잡고 고갤 끄덕였다. 고마워.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하는 소리가 내면에 침식되었다. 마음이 전해졌을까. 민석은 작은 기대를 하며 다시 고갤 들어올렸다. 루한은 그런 민석의 행동에 곧바로 손에 힘을 주어 휘둘렀다. 철컹- 차가운 금속이 민석의 등허리에 아프게 닿아왔다.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다시 한번 철컹- 쇠창살이 민석과 부딪히는 소리는 날카롭게 밤하늘을 부유했다. 뼈가 나갈 듯한 고통에 아! 하며 악을 지른 민석의 입은 단단한 손에 의해 닫혀졌다. 루한은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쥐어잡혔던 목과 우악스럽게 막혀있던 입이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민석의 머리채가 잡혔다. 두피까지 찢어질 듯 아파왔다. "안미안해" 루한은 그대로 손을 휘둘러 쇠창살로 내리꽂았다. "아깐 미안했어. 하지만 지금은 안미안하다고." 다시 한번 쿵. "어?" 민석은 살려달라는 듯 루한의 팔을 잡아당겼다. 또 다시 머리채를 휘두루는 손길에 마른 체구지만 단단했던 민석의 팔이 남자라는게 무참해질 정도로 힘없이 내쳐졌다. "나가지 말랬잖아." "미, 미안해... 응? 루한, 미안해..." 감동으로 시작했던 눈물은 공포로 변해 흐르고 있었다. 고르게 숨을 쉴 수 없던 연이은 상황에 말하는 중간중간이 끊겨왔다. 이미 두개골이 깨질 듯한 아픔은 자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용서를 구하는 민석의 애절함은 보이지 않는 듯 그는 손아귀에 힘을 주어 감긴 머리카락을 들어올린 채 뺨을 내리쳤다. 철썩- 피부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얼얼해졌다. 젖은 볼에 한 차례 또 닿아오는 재빠른 움직임이 이어졌다. 이미 루한과 살면서 뺨 맞는 건 너무도 익숙했지만 항상 아픈 건 변함없었다. 고통은 익숙해지지 못하는 건가. 민석은 입안이 터졌단 걸 알았지만 신경쓰이지 않았다. 우선은 자신이 살아야 한다. 그는 루한의 옷깃을 붙잡았다. 제발, 미안해. 하지만 루한은 그 처절한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민석이 돌아올때까지 화를 참고 얘기를 들어주자 결단했지만 막상 그를 보니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점차 마음 한 구석이 찌릿해짐을 느꼈다. 루한은 머리채를 붙잡았던 손을 풀고 거실로 걸어나갔다. 그 뒷 모습을 멍하게 보던 민석에게 그제서야 등 허리와 두개골의 아픔까지 몰아쳤다. 몸 뚱아리 전체에서 웅웅거림이 느껴진다. 이미 많이 울어서 두 눈가는 뜨거웠다. 자신의 추락한 자존심에 화가 났다. 그래서 멈출 기미가 보였던 눈물은 허릴굽혀 머릴 감싼 채 더 뿜어졌다. "진짜 개새끼..." 아팠다. 마음도, 몸도. 루한과 한바탕 소동이 끝나자 모든게 자연스러워졌다. 민석은 익숙하게 욕실로 들어가 씻었고 루한은 불 꺼진 거실 소파에 앉아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주인공들이 하하호호 웃고 떠드는 영화를 시청했다. 수건으로 머릴 털어대며 힐끗 본 부엌 싱크대는 티비 불 빛으로 희마하게나마 텅 비어짐을 알 수 있었다. 분명 밥을 안먹은 것이다. 평소같았으면 동정심이 생겨서 간단히라도 챙겨줬을테지만 오늘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가출했다가 돌아와서 당한 폭력 중에선 그나마 약한 강도였다. 전이었다면 발길질에 주먹질까지 당해 피를 봤을 것이다. 그것으로 민석은 약간의 위안을 했다. 루한은 전보다 자신에게 감정이 더 기울었단 뜻이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던 민석은 하루를 곱씹었다. 어느새 켜진 거실 불빛이 민석의 닫힌 방문 틈 사이로 간간히 비춰 들어왔다. 시작은 달랐지만 결국 끝은 지독하게 일상스러워졌다. 다시 눈가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울면 안돼, 지는 거야. 먼 옛날 어눌한 한국어 발음으로 위로를 건냈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 때의 넌 세상 그 어떤 누구보다도 햇살같은 사람이었는데 왜 지금은 달빛보다도 더 차가워? 꿈 속에서나마 물어볼 수 있게되서 다행이었다. 자고 나면 어제와 같이, 적어도 그저께같은 일상이 반복되겠지. 민석은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깊이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 4시가 지나고서야 루한은 보고있던 DVD를 빼냈다. 민석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연 그는 한 발, 두 발, 혹시나 민석이 깰 새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민석의 머리 맡에 앉은 그는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찾았다. 민석의 노트북 옆에는 연애 할 시절 자신이 사다 준 곰인형이 놓여 있었다. 몰래 민석의 방에 들어온 루한의 모습을 지켜보는 듯 곰인형의 시선은 곧았다. 루한은 고갤숙여 민석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간을 찡그리기도하고 입을 오물거리기도 한다. 다람쥐같은 그 모습에 절로 손은 머리로 향했다. 아까와 같이 우악스럽게 휘잡던 손길이 아니라 털 많은 강아지를 만지듯 머릿결을 정돈해 줄 뿐이었다. 얇고 찰랑이는 머리카락들은 루한의 손가락 사이 하나하나에 감겨왔다. 우리 둘 같다. 그는 작게 속삭였다. 아무도 들어 줄 수 없는 한마디였지만 만족한 듯 계속해서 민석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이대로가 좋았다. 덜도 말고 더도 말고 이대로. 그 새벽 루한의 방에선 불이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저 정말.... 독자님들 때문에 감동 억수로 받은거 아세요?ㅠㅇㅠ 다들 제 사랑둥이들♥ 몇몇 분들이 암호닉 신청하고 싶다하셨는데.. 이번편에서 받아볼까 합니다ㅎㅎ 아 저번에 미리 말해주신 조무래기님? 감사하고 샤댱해요~ 첫 댓을 달아주신 독자님도 샤댱하구요~ 다 사랑해서 기억하고 싶으니까 얼른 암호닉신청 해주세요.. 황송...저같은 찌질한 작가에게..흑 월요일의 시작이네요 독자님을 행복한 일주일의 첫 날 보내세요!!♥ 이번 편은 좀 짧게 느껴지시겠지만.. 담부턴 달달함이 보일거같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