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션 로즈
죽게? 들리는 목소리에 뒤로 돌아본 그는 태형이였다. 여기서까지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는 여전히 잘생겼다. 사실 입만 열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왜 안 죽어?”
“…”
“제발 죽어줘.”
“야.”
“오, 드디어 말을 하네.”
“그렇게 내가 싫어?”
“어. 요즘 게이는 괜찮아 졌는데~ 니가 너무 싫어.”
“도대체 왜…”
태형이 가까이 다가와 지민이 들고 있던 컵의 내용물을 지민의 머리 위로 부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니까 니가 없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지민의 머리로 하얀 액체가 뚝뚝 흘러내렸다. 지민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태형을 보고 말했다.
“쓰레기 새끼.”
“나 쓰레긴거 이제 알았어? 대단하네.”
“내가 싫으면 니가 나가.”
“내가 왜?”
“…”
“평생 괴롭힘 당하고 싶으면 계속 버텨 봐.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
“뭐 계속 잘 버티는 거보니 취향이 그 쪽인가?”
“…닥쳐.”
태형이 지민의 손목을 들어올려 색을 확인했다. 초록색이였다. 실소를 내뱉으며 “미친 새끼.”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먼저 옥상을 벗어났다. 지민이 젖은 머리와 옷을 손으로 털고 사무실로 내려갔다.
“팀장님, 저..”
“지민씨 머리랑 옷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죄송한데 오늘만 조기 퇴근 시켜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요. 오늘 푹 쉬세요, 일이 많았던 것 같네요. 내일은 괜찮은 모습으로 봐요.”
사무실 직원들의 친절한 호의에 둘러싸인 채 회사를 빠져 나왔다.
발길이 닿은 곳은 시내의 한 타투샵이였다.
“어서오세요. 일반 타투 하시게요? 생각해 둔 무늬는..”
“로저 채워주세요.”
“네?”
“로저 채워달라구요.”
그 타투이스트는 이런 요구를 처음 듣는 지 놀란 듯이 되물었다.
"일단 먼저 여기 앉으시고, 지금 바로 하시겠어요?"
"네."
"여기 팔 올리세요. 재료 들고 오겠습니다. "
지민이 침대 위에 팔을 올렸다. 타투이스트가 지민의 팔을 수건으로 닦았다. 라인이 잡혀있는 탓에 바로 로저 안을 검은색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지민이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이름이 뭐예요?”
“박, 지민이요.”
“저는 전정국. 로저는 왜 채우는 거에요?”
“제 감정을 들키기 싫어서요.”
“그럼 보호대 하시면…”
“너무 깊이 알려고는 마세요. 보호대로도 어림이 없어서요.”
“그러시구나.”
조금의 시간 동안 둘은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작업을 진행했다. 거의 완료되자 정국이 타투 관리법을 설명해주었다.
지민이 타투 가게를 빠져 나와 손목을 확인했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새까맸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감정조절불치상태인줄 알겠지.
가던 길에 로저 보호대를 하나 구입해 착용했다. 26년동안 착용하지 않던 걸 착용하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익숙해질 수 밖에 없었다. 태형에게 이렇게 새까매진 로저를 보여줄 수 없었다.
집에 가서 진득한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를 시작했다. 굳어버린 진득한 우유가 머리에서 녹아나왔다. 샤워를 깔끔하게 마치고 타투를 한 로저 위에 약을 가볍게 바르곤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우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로저를 칠했으니 이걸로 괴롭힘 당하지는 않겠지. 이제 태형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였다.
사실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태형의 얼굴을 이제 보지 못 할 것 같았다. 그냥 혼자 어딘가로 떠나서 몰래 살다가 죽어야지.
지민이 끙 소리를 내며 얼굴을 양 손으로 감쌌다. 괴로움에 발버둥을 치다가 잠에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5시 반이였다.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지만 평소처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준비를 하고 보호대를 잊지않고 착용했다.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집을 나섰다. 생각보다 차가 많이 막혔다. 도착한 시간은 비슷하게 도착을 했다.
엘레베이터를 타려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누군가 우뚝 섰다. 고개를 돌려 보니 태형이였다.
태형이 지민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무척 온순한 표정으로 지민에게 인사를 하자 지민이 당황하며 네, 네 대답을 연발했다. 엘레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지민이 먼저 탔다. 뒤 따라 태형이 타고 엘레베이터에 탔다. 엘레베이터의 문이 닫히자마자 태형의 태도가 급변했다.
오늘은 어때? 내가 잘 해주니까 설레고 그래? 존나 더러워. 태형이 지민의 손목을 잡았다. 오늘은 보호대도 했네? 처음 보는 것 같다? 태형이 그 보호대를 힘으로 벗겨내었다. 지민은 최대한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연기 해야 했다. 기분이 나빴지만,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무표정으로 태형을 쳐다봤다.
태형이 지민의 로저가 검은색으로 변한 모습을 보더니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거 왜 이래? 너.. 병원 안 갔냐? 단단히 미쳤네. 힘 없던 지민의 팔을 아래로 떨구곤 태형이 혼이 빠진 듯이 엘리베이터를 떠났다. 지민이 무표정으로 8층에서 내렸다.
사무실에 들어가 밝은 미소를 짓자 직원 분들이 안도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지민이 자리에 앉자마자 사직서 서류를 인쇄했다. 천천히 작성하면서도 주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가려가며 썼다. 그 종이를 예쁘게 접어서 봉투 안에 넣었다. 이 직장도 참 좋았는데, 내 직장은 아니였나보다. 지민이 봉투를 서랍 안 쪽 깊은 곳에 넣어두고 새 종이를 꺼냈다.
종이에 길게 글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A4용지를 3분의 일 정도 채운 이 종이를 쓴 부분만 잘라 예쁘게 접어 다른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디자인 부 좀 다녀오겠습니다, 팀장님.
디자인 부에는 태형이 없었다. 소정이 귀띔해주었다. 그가 오늘 사정이 생겨 잠깐 나간다고. 소정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지민은 그 봉투를 태형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다시 8층으로 돌아왔다. 지민은 깊숙이 넣어둔 사직서를 가지고 팀장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팀장님, 저.. 이거."
"..이게 뭐야?"
"사직서..에요. 이제 못하게 돼서요."
"무슨.."
"갑작스럽게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해요.."
"..."
"어딜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모아온 돈이 있어 그 돈으로 떠나려구요."
"...진심이야?"
"네. 어제 내내 고민 했습니다. 죄송해요, 정말로요."
"..꼭 이래야 돼?"
"죄송해요."
"..그럼 오늘 짐 싸서 나가는 거야?"
"네, 지금 급하게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어떻게 이래, 지민씨."
"...죄송해요 진짜."
모든 직원의 시선이 쏠렸고 사정을 아는 소정이 지민에게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소정씨, 나중에 팀장님이랑 다른 분들께 다 말씀 드려주세요. 그리고 그건 꼭 비밀 지켜 주세요. 그 친구 귀에 들어가면 안되니까요.
지민이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박스에 차곡차곡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지민은 꿋꿋히 눈물을 참고 짐을 챙겼다. 얼마 없던 짐을 다 챙기고 입구에 서서 외쳤다.
"감사했어요. 너무 잘해주신 것 같아 너무 죄송스러워요. 이 직장은 제 삶에 가장 행복했던 직장 이였습니다. 다음에 다른 인연으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팀장님, 대리님들, 그리고 소정씨도. 모두들 사랑했습니다. 감사했어요 정말로요. 이렇게 나가게 돼서 아쉬워요. 죄송해요. 안녕히 계세요."
지민이 꾹 참았던 눈물을 투둑 하고 떨구었다. 직원들도 지금까지의 정에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지민이 흘리는 눈물을 팔로 쓸어 닦았다. 그리고 커다란 박스를 든 채로 회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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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