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태형. 적막이 감도는 진료실에 앉아 만년필을 느릿하게 돌리던 정국이 작게 읊조렸다. 혀 위에서 굴러가는 세 글자가 꽤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병원을 자주 찾던 환자 중 한 명인 태형은 정국에게 그저 환자의 불과했었다. 진료실을 나가던 태형에게서 우연히 마주한 웃는 얼굴에 시선을 빼앗기기 전인 어제까지만 해도.
의사와 환자의 관계라는 게 한없이 형식적이어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공유하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여느 환자들에게 대하는 것처럼 태형을 대하는 정국의 얼굴에는 항상 온화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고, 그 맞은 편에 앉아있는 태형의 얼굴은 항상 무표정이었다. 의사에게 생글거리며 웃어 보인다고 자신을 더 신경 써서 진료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가 무표정이라고 한들 안 듣는 약을 주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태형의 얼굴에는 딱히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물론 그런 태형에게 정국은 더더욱 관심이 없었고. 제게 웃어 보이지 못해 안달인 계집들이 널린 정국에게 무표정한 태형이 당연히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정국의 타겟은 언제나 아름다운 여자였다. 물이 흐르듯이 부드러운 곡선을 품고 있는 몸을 가진, 웃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
정국은 언제나 드러나 있는 가시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그 이면을 더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번져나가는 고통에 일그러지는 얼굴, 그는 한 떨기 꽃처럼 피어난 화사한 웃음보다, 그 웃음이 고통 속에서 일그러지는 걸 사랑했다. 손 위에서 빠르게 원을 그리던 만년필이 정국이 손을 멈추자 속도를 늦추다 이내 천천히 멈췄다. 굳이 계획을 뒤로 미룰 필요는 없겠지. 정국의 손 위에 위태롭게 올려져 있던 만년필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떨어지며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어떤 이에게는 즐거움이, 또 다른 이에게는 고통이 될, 새로운 시작을.
" 김 태형 환자. 진료 차트 어딨어요? "
" 잠시만요, 찾아서 진료실로 가져다 드릴게요. 아, 여기 있네. 여기요. "
" 고마워요. "
이름, 생년월일, 주소, 핸드폰 번호까지. 의사란 직업이 자신의 환자에 대해서 알아내기엔 한없이 간단하구나, 하며 웃음을 터트리곤 태형의 거주지를 확인한 정국이 그 위에 쓰여진 전화번호를 바라보다 병원 전화기를 집어 들고는 차트 위에 쓰여진 전화번호를 하나하나 눌렀다.
" 여보세요? 김 태형 씨 전화번호 맞으시죠? 여기 한마음병원인데, 김 태형 씨한테 드린 처방전에 문제가 있어서요. "
「 네? 뭐라구요? 잘 안 들려서 그런데, 다시 한 번만 말씀해주시겠어요? 」
" 오늘 받아가신 처방전에 약 하나가 잘못 처방돼서, 내일 다시 한 번 방문해 주실 수 있으세요? "
「 지금 바로 갈까요? 」
" 지금은 진료시간이 끝났고, 내일 시간 되시면 아무 때나 방문해주세요. "
「 네, 그렇게 할게요. 」
북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리는 태형의 목소리에 정국은 전화를 끊자마자 가운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네. 코트를 걸쳐 입은 그는 웃는 얼굴이었다. 진료실을 나서 간호사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정국에게서 평소엔 느낄 수 없던 들뜸이 느껴졌다. 아마 그 이유가, 그 가벼운 발걸음이 태형을 향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네비게이션에 태형의 주소를 찍은 정국은 평소보다 더 속도를 올려 차를 몰았다. 골격이 작고 힘이 약한 여자와는 다르게 꽤나 키가 커 보이던 태형을 제압하는 일은 분명히 신중해야 했다. 그래서 정국은 부러 고전적인 방법을 골랐다. 마취제를 묻힌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는 방법은 코와 입으로 들어가는 공기를 확실하게 차단할 수 있다면 가장 단시간에 누군가를 기절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급소를 치는 건 죽을 위험이 있고, 그렇다고 약을 먹이자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어느새 도착한 태형의 집 앞에서 차 안에 구비해놓은 마취제를 손수건이 축축해질 정도로 들이부은 정국은 의자에 기대어 백미러를 살폈다. 몇십 분이 지나지 않아 태형의 인영이 백미러를 통해 반짝였다. 먹이를 기다리던 굶주린 하이에나의 사냥을 알리는 신호였다.
" 여기 사시나 봐요. "
차에서 내린 정국이 이어폰을 끼고 걷던 태형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청각이 차단된 상태에서 어깨에 올라오는 묵직한 감각에 흠칫하며 놀란 눈으로 뒤돌아본 태형의 시야에 정국이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에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늘어뜨린 태형이 이어폰을 빼며 긴장이 풀리는 지 허헝, 하며 웃었다.
" 전 선생님? 아, 네. 저 여기 살아요. 이 동네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
" 제 친구가 여기 살거든요. "
" 아…그러시구나. "
몇 마디를 주고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세 끊겨버리는 대화에 멋쩍은 듯 웃는 태형을 바라보던 정국이 코트 주머니에서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닿아오는 축축함이 인상을 절로 구기게 만드는 듯했다. 이어지는 정적을 깬 정국이 넌지시 부드러운 경고를 태형에게 속삭였다. 정국이 불을 밝힌 경고등에는 빨간빛이 반짝였고, 안타깝게도 그 불빛을 태형만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 태형 씨, 밤에 혼자 다니는 거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에요. "
" 이렇게 전 선생님 같이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으니까 괜찮아요, 뭐. "
때로는 아는 사람이 더 위험한 법이죠. 흘리듯 뒷말을 내뱉은 정국에게로 시선을 돌릴 새도 없이 축축하게 젖은 손수건이 태형의 시야를 차단했다. 젖은 손수건은 야속하게도 태형의 얼굴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놀란 듯 휘적거리는 손과 몸부림마저 정국의 억센 손길에 뭉개졌다. 크게 반항을 할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힘없이 늘어져 무너져 내리는 태형을 부축한 정국이 만족스러운 듯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 으으… 새된 신음을 내며 한참을 바르작 거리던 태형이 영원히 들어 올려지지 않을 것만 같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얀 천장, 하얀 벽, 하얀 협탁… 심지어 태형의 몸을 휘감고 있는 이불마저도. 온통 새하얀 색으로 점령되어 있는 공간에 굳어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 이게 무슨… "
엄마를 찾는 아이마냥 두려움을 잔뜩 머금은 표정을 하고 태형은 연신 주위를 둘러봤다. 팔랑이며 공중으로 흩뿌려지는 머리칼 밑에 자리 잡은 눈, 코, 입의 제각기 다른 위치가 한데 어우러져,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정경이라면 정경이었다. 깨질 듯이 아파오는 머리를 붙잡으려 손을 들어 올렸다.
잘그락-
귀에 닿는 뭉툭한 쇳소리가 머리에 전해지는 생경한 고통마저도 집어삼켰다. 수갑이었다. 영화에서 볼 법한, 그런 수갑이 태형의 손목을 옥죄고 있었다. 수갑 끝에 또 다른 수갑이, 또 다른 수갑 끝에 다른 수갑이 끝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방금 잠에서 깨어나서 그런 건지, 처음으로 겪는 일이어서 그런 건지. 태형은 한참 자기 손목에 자리 잡은 수갑을 바라봤다. 일어났어요?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지자 손목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끌어올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 하도 자길래 죽은 줄 알았잖아요. 아직 죽으면 안 되는데. "
" …전 선생님? "
하얀 문에 비스듬히 기댄, 온화한 미소를 걸친 남자의 얼굴은 처음이 아니었다. 아니, 지독하리만큼 익숙했다. 익숙한 감정이 익숙지 않다고 무뎌졌을 만큼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제서야 어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방 안 가득 메웠다. 지금같이 온화한 미소를 띠며, 우악스럽게 자신을 제어하던 모습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보여졌다.
정국은 그런 태형이 따분했다. 공포에 일그러지는 색정적인 표정을 보고 싶었다. 어찌해야 될지 몰라 처참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자신이 아닌 허공을 바라보며 이렇다 할 표정 없이 멍한 태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빳빳한 미간을 주름잡으며 태형에게 다가갔다.
태형이 지금과 같은 표정을 짓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정국의 보폭에 달렸다. 그러니까, 딱.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어떻게 해야 더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을까, 뭐 그런 생각? "
여덟 발자국이었다. 태형의 턱을 우악스럽게 쥔 정국은 비릿한 웃음을 띠며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로 태형과 마주했다. 영화에 취해있던 태형은 영화 스토리를 어지럽힌 정국에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정국과 마주했다. 정국의 달뜬 숨결이 태형의 콧잔등을 간질였지만, 잔뜩 찌푸려진 표정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구겨졌다면 더 구겨졌다. 정국은 고통이 아닌, 다른 감정에 찌푸려진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롯이 고통에만 일그러진 표정이 좋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저로 인해 만들어진 표정만을 사랑했다.
정국은 태형의 콧잔등을 숨결뿐만이 아니라 입술로도 간질였다. 팔랑이며 가벼운 날갯짓을 하는 나비처럼 콧잔등에 내려앉은 입술이 태형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형은 나비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둘 중에 굳이 꼽으라면 좋아하는 편이었다. 정국은 나비를 닮았다. 정국이 싫었다. 나비가 싫어졌다.
"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주셨으면 좋겠는데. "
태형은 의외로 차분했다. 어색하리만큼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엔 두려움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지만, 태형은 그걸 애써 숨겼다. 정국에게 아무것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이 빠르게 오르내리던 가슴팍을 정국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하얀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린 채 까만 눈동자와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