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형은 고개를 들어 협탁 위에 놓인 접시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손목에는 수갑을 채워놓고도 배고프지 않냐며 먹을 것을 가져오는 정국의 친절은 그저 태형을 더 깊은 공포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었다. 티비 속이나 영화에서 봤던 납치 장면과는 확연히 달랐다. 태형에게는 입을 막고 있는 청테이프도, 손과 다리를 묶어둔 밧줄도 없었다. 창고같이 어두운 방에 묶여있지도 않았고. 길게 늘어진 수갑은 생각보다 넓은 자유를 허용했으며 태형이 있는 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협탁 위에는 붉은 꽃이 꽂혀있는 꽃병까지 놓여있었다. 정국은 여유로웠다. 우발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경우는 없었다. 항상 계산된 범위 내에서 일을 벌이고, 행동했다.
알맞게 익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고기가 올려진 접시를 보고 있던 태형이 손을 뻗어 접시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자신을 죽일 사람이 주는 음식을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는 게 아이러니했지만, 정국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숨을 붙이고 있으려면, 이 공간에서 정국의 말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태형의 목숨을 틀어쥐고 있는 건 정국이었으니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는 시각과 후각을 동시에 자극했다. 평소였다면 기분 좋게 받아들였을 냄새가 비어있던 속을 뒤집어놨다. 이 상황에서 고기라니, 물끄러미 접시를 내려다보던 태형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잡아 작은 고기 조각을 집어 입속으로 욱여넣었다.
" 맛은 괜찮은가, 먹을 만 하죠? "
입을 오물거리던 태형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뭘 먹는다고 한들 맛이 느껴지지 않을 것만 같았지만, 정국이 가져다준 고기는 이제껏 먹어봤던 고기들보다 다른 매혹적인 맛임에는 틀림없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고소한 향기와 비례하듯 육즙은 감칠맛을 냈고, 핏기가 살짝 도는 육질은 금방이라도 녹을 것처럼 부드러웠다. 입술을 촉촉이 적신 육즙을 닦아내고는 천천히 고기를 삼킨 태형은 접시 위에 놓여있는 남은 고기들을 먹는 태형을 내려다보던 정국의 얼굴에는 어느새 만족스러운 표정이 지어져 있었다.
" 잘 먹네요. 말도 잘 듣고 착하네. "
" 굶어 죽을 생각은 없어요. 그쪽한테 죽을 생각은 더더욱 없고. "
그쪽 배 속에 있는 여자도 죽을 생각은 없었을 텐데.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말을 찬찬히 곱씹던 정국이 살짝 웃었다. 자신이 씹고 있는 그 고기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거리를 걸어 다니던,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걸 알면 무슨 표정을 지으려나, 그 광경이 꽤나 볼 만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정국은 입가에 비식비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 난 내가 죽일 사람한테 쓸데없는 호의 베푸는 짓 안 해요. 호의는 살아있는 사람한테 베푸는 거지, 죽은 사람한테 베푸는 게 아니죠. 죽을 일은 없을 거예요. 자의든, 타의로든. "
자의든, 타의로든. 정국의 마지막 말은 태형에게 스스로 죽고 싶을 만큼 살아있는 게 고통스러운 순간이 올 것이라는 걸 의미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목숨을 끊을 수 없다는 것도.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를 집어 든 정국은 칭찬하듯 태형의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작은 움직임에도 두려움에 물드는 눈빛은 가학심을 불러일으켰다. 왜 이걸 이렇게 늦게 알아차렸을까, 무표정한 가면 뒤에 숨기고 있던 얼굴이 이렇게나 예뻤다는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 텐데. 낭비한 시간이 아까웠다. 가장 화려한 꽃을 알아보지 못하고 길가에 널려있는 들꽃을 꺾고 있던 제 자신을 한탄하던 정국이 태형과 눈을 맞췄다.
" 축하해요. 내 정원에 발을 들인걸. "
정국은 선하디 선해 보이는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붉은 장미만 예쁘게 피어있던 정국의 정원에 하얀 꽃이 피어올랐다. 서로의 색에 익숙해져 붉은빛에 무뎌진 장미들이 하얀 장미를 주목했다. 더럽히고 싶다. 물들이고 싶다. 자신들과 다른 순백한 하얀 꽃을 시샘했다. 붉은 장미들이 하얀 꽃을 천천히 둘러싸기 시작했다. 하얀 꽃은 필사적으로 몸부림 쳤다. 하지만 이미 땅에 깊숙이 박혀 있는 뿌리를 빼내지 못하고 붉은 장미들에게 가려졌다. 더이상 하얀 꽃은 보이지 않았다. 하얀색이 사라졌다.
정국의 정원은 붉은 꽃만 가득했다.
태형은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가 느리게 내뱉었다. 더운 숨이 차가운 공기 중으로 흐트러졌다. 태형에겐 숨 쉬는 것조차 두려운 지금 정국은 한없이 들떠있었다. 어떻게 해야 더 예쁜 표정을 짓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태형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것을 꺼낼 수 있을까. 빙글빙글 연신 웃음을 짓고 있던 정국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입꼬리를 굳히며 태형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 혁명을 일으키세요. "
" …무슨, "
태형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던 손이 뒤통수를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태형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혁명. 여지껏 느끼지 못한 것들을 맛볼 수 있게 해주는 매혹적인 행위. 한 번 시작되면 멈추려 노력해도 멈출 수 없는 마약보다 더 중독성 짙은 행위. 혁명한 자신에게 취해 오갈 데 없는 눈동자를 굴리며 턱가에 타액을 질질 흘리며 더 큰 혁명을 갈구하는 태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래가 뻐근해질 정도로 선정적인 모습에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태형의 입술을 머금었다. 혁명하라. 아름다움에 질려 다른 꽃을 찾아 나서기 전에.
"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선 훌륭한 조력자가 필요하고, 큰 자극이 필요한 법이죠. "
그 조력자는 저고. 아슬아슬. 위태로이 닿는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에 태형은 혀 밑에 고여 있던 침을 삼켰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에 휩싸인 공간에 태형은 덜컥 두려움이 차올랐다. 태형은 자꾸만 차오르는 침을 조용히 삼켜냈다. 정국은 그런 태형의 목을 바라봤다. 일정한 시간을 두고 위아래로 크게 일렁이는 목울대가 어떤 행위를 묘사하는 것만 같았다. 전 선생님.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입술 사이로 애처로이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국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 네, 김 태형 씨. "
" …그 혁명이란 거. 그것만 일으킨다면, 절 풀어주시는 건가요. "
정국은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삼켜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혁명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끊어내기도 쉽지 않을 거고. 태형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수갑처럼 태형의 목을 옥죌 것이다. 정국은 이미 알고 있었다. 혁명이라는 센세이션은 태형을 가둬 정국에게서 도망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태형은 어떤 혁명을, 어떻게 일으키는지도 모른 채 혁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 집 잘 지키고 있어요. "
동그란 눈을 뜨며 자신의 움직임을 쫓는 태형이 정말 대형견 같았다. 태형의 손목과 창살을 잇고 있는 수갑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방을 나섰다. 방을 밀실로 만드는 무거운 자물쇠가 철컹이는 소리가 한참이나 울려 퍼졌다. 마지막 자물쇠가 무겁게 잠기자 정국은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태형에게 자극을 줄 타이밍이다.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큰 자극을.
애정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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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 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