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십 분 거리였는데 삼십 분은 걸린 것 같았다. 경수는 한 대 맞고서는 잠이 들었는지 온 몸에 힘을 쫙 뺀 탓에 더욱 무거워졌다. 괜히 업어준다고 미친 소리를 한 걸까, 사실은 오는 내내 조금 후회도 했다. 땀에 절어 뻘뻘대며 도착한 집 앞에서 도어락을 두 번은 틀리고 겨우 들어갔다. 신발을 대충 벗고 헥헥대며 경수의 방 문을 열고 경수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후, 종인은 한숨을 내뱉으며 침대 옆 바닥에 철푸덕 앉아 양말을 벗어 던졌다. 씨발! 존나 힘들어. 새근새근 잘만 쳐 자는 얄미운 경수의 얼굴을 한 번 노려보고 일어나 방을 나와버렸다. 대체 누구 좋자고 간 놀이공원인지. 종인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씻어야 되는데…. 머릿 속으로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에이, 내일 씻지 뭐. 내일…. 지금은 너무 피곤했고 충분히 힘들었다.
* * *
그로부터 몇 일이 지났다. 경수 그리고 종인 사이에 왠지 모를 이상(?)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무서워만 하고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종인은 생각보다 강단이 있고 듬직했고, 답답하고 바보같이 멍청하기만 한 것 같던 경수가 귀여워보이는 이상 현상이 서로에게 일어난 것이다. 직접적으로 말을 한 적은 없으나 평상시에 툭툭 던지는 말들로 서로를 위해주는 것이 조금씩 늘어갔다. 사소하게는 반찬 투정이 줄은 것 부터 집안일에 손 하나 까딱 안하던 종인이 가끔 설거지를 돕기도 했고. 또 예를 들자면,
"김종인, 끝나고 당구 짜장면 내기. 콜?"
"야, 오늘은 안 됨."
"왜? 배신자 새끼가. 너 아무것도 안 하는 거 다 알아."
"도경수가 피자 먹고 싶다그래서 오늘 피자 먹기로 했다."
이렇게 말 하고 쌩 하니 사라져 버려서 찬열을 외톨이로 만든다던가 하는? 찬열은 그런 종인이 너무도 못미더웠다. 전에는 자기를 들들 볶으면서 귀찮게 한다고 그렇게도 호박씨까던 경수에게 갑자기 이렇게 잘 해주니 당연히 의심스러울 수 밖에! 결국 찬열의 머릿 속에서 나온 결론이라는 게.
"너 연애 하냐?"
"무슨 개소리. 김세희 이후로 여자 만난 적이 없는데."
아냐. 연애를 하니까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게 틀림 없어. 그러니까 저 불한당같은 놈이 단군마냥 모든 이들에게 인자해진 거야. 눈은 모니터를 향해있지만 입으로는 대답하는 종인이었다. 이상해, 너 요즘. 아님 썸이라도 타냐? 그 순간 열심히 마우스를 휘젓던 종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곤 갸우뚱대기 시작했다.
"썸. 썸? 썸인가. 아닐 걸. 그냥 일방적인듯."
저 말만을 남기곤 다시 게임에 몰입했다. 그래, 이건 백퍼다. 오세훈이 김종인한테 넘어간 게 분명해…! 내가 그렇게도 충고했건만, 말도 안 돼! 찬열의 머릿 속엔 거센 토네이도가 일기 시작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금껏 종인이 무슨 일이건 찬열에게 숨기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까지 숨기는 것을 보면 분명 뭐가 있긴 있다는 얘긴데. 씨, 나도 몰라! 자꾸 줄어만 가는 피씨방 시간을 보며 찬열이 고개를 저었다.
* * *
종인과 헤어진 찬열은 찝찝한 기분으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지네끼리 알아서 하라고 해. 집 앞에 있는 대형 마트에 들러 아이스크림이나 사먹으며 열을 식혀야 겠다고 생각한 찬열은 주머니를 뒤져 짤짤이를 찾고 있었다. 분명 아까 컵라면을 먹고 받았던 거스름돈이 있을텐데 언제 흘리기라도 한 건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쉣뜨. 피스타치오 먹고 싶은데.
"어?"
그 때 저 멀리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맞다, 쭈쭈다! ★좌 1.2 우 1.5★의 멋진 시력을 가지고 있는 찬열은 두 팔에 짐을 잔뜩 들고 낑낑대며 걸어오고 있는 경수를 향해 두 손을 뻗어 양 옆으로 마구 흔들었다.
"쭈~쭈!"
헐, 씨발! 왠지 불길했더랬다. 장을 보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던 경수는 찬열을 마주치자마자 재빠르게 뒤돌아 오던 길을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씨발! 절대 잡히면 안 돼! 그러나 두 손에 든 무거운 봉지들 덕분에 곧바로 찬열에게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에이! 왜 쌩까고 그래요. 치사하게. 나 봤으면서."
"하하, 안녕! 오, 오랜만이다!"
응, 그야 널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거든…. 게다가 우리가 밖에서 마주치면 이렇게 반갑게 웃으며 인사할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게다가 넌 방금 날 쭈, 쭈라고….
"그 놈의 쭈쭈 좀 그만 불러주면 안될까, 찬…열아?"
"제 애칭이잖아요~. 아, 맞다. 방금까지도 종인이랑 놀고 있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네. 장 봤어요?"
"어. 그럼 우리 서로 마저 가던 길을 갈까? 하하."
경수는 지금의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을 뿐더러 두 손에 든 장거리들 덕분에 두 손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구겨지는 경수의 인상을 보고 찬열은 그제야 눈치챈 건지 손을 뻗어 봉지 하나를 자기가 낚아챘다.
"할 일도 없는데 배달 서비스 해드릴게요. 대신 천원만 빌려줘요. 아이스크림 사먹게."
결국 한 손엔 아이스크림을, 한 손엔 봉지를 든 찬열의 옆에서 나란히 집을 향하게 되었다. 어색해 죽어 버릴 것 같은 경수를 아는지 모르는지 찬열은 지금 자신이 먹고 있는 피스타치오맛 아이스크림의 멋짐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경수는 옆에서 아무 연락도 없는 휴대폰을 괜히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 지금 무척 손해보고 있는 거 같아…. 새로운 방식의 삥뜯기♪를 당한 느낌이랄까…?
"이게 다 먹고 나면 입 안이 상쾌해 진다구요…. 아, 내 말 듣고 있어요?"
"어? 응. 물론이지. 듣고 있어…."
"거짓말. 아, 헐! 맞다. 나 물어볼 거 있어요. 김종인에 관한건데…."
응? 무슨…? 찬열이 갑자기 진지하게 물어오자 경수는 보고 있던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뭐길래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거지?
"그냥, 그냥 물어보는 건데! 별 건 아니고. 음. 그냥 요즘 김종인 좀 이상하지 않냐구요."
"어떤 면에서?…."
"막 갑자기 사랑에 빠진 것 같다거나, 아님 그런 기미라던가…."
사랑에 빠져?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잠시 생각하던 경수가 대답하자 찬열이 그런가,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왜 그런 걸 물어보느냐고 되묻고 싶었던 경수였지만 괜히 오지랖인 것 같아 꾹 참았다. 근데 듣고보니 요즘 부쩍 나한테도 잘 해주는 것 같고, 혹시 진짜 연애하나? 연애하면 사람이 변한다던데…. 그런데 연애하는 사람치곤 외출이 아예 없는데? 요즘 주말에도 집에만 있고 평일에도 학교에서 바로 집으로 곧잘 들어오고.
그 새 집 앞에 다다라 찬열이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경수는 다시 두 손에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따 저녁먹으면서 종인에게 꼭 사건의 진상에 대해 물어보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 * *
지글지글, 고기를 굽는 소리가 온 집에 울려 퍼졌다. 오늘 저녁은 삼겹살이야! 라고 하자 종인이 방방 뛰며 난리를 치는 바람에 아랫층에서 인터폰이 왔었다. 무슨 4살짜리 애 키우는 것도 아니고. 경수가 종인의 등짝을 한 대 후려주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오늘 학교에서 있던 일들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종인을 빤히 바라보던 경수가 괜히 밥을 깨작댔다. 쌈을 싸서 제 입에 집어 넣던 종인이 그런 경수를 보고 그제야 조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뭐야. 뭐 할 말 있어?"
"응? 아, 아니. 절대 없는데."
와, 갑자기 목이 마르네. 뜬금없이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경수에 종인은 인상을 구겼다. 이거 분명 뭐 있는 거 맞는데 말이야. 기분이 확 상한 종인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빨리 말해. 뭐 있잖아."
"삼겹살이 생각보다 맛있다. 싸길래 그냥 사 온 건데…."
진짜 다 좋은데 이렇게 뜸 들일 때가 제일 싫어. 종인은 답답함에 주먹을 꽉 쥐고 이를 꽉 깨물었다. 안 돼, 참아야 돼…. 참자, 참아…. 忍忍忍忍忍忍忍忍忍忍忍忍忍…. 항상 이렇게 협박식으로 얘기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았다. 야,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말해.
결국 분위기가 험악해지고야 만다. 지글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가 무척 크게 들렸다. 적막이 흘렀다. 아우씨, 별 것도 아닌데 괜히 뜸은 들여서 일을 키운 것만 같은 경수가 두 눈을 한 번 질끈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이…, 그냥. 너어. 여자 친구 생겼어?"
고개도 채 들지 못하고 조그만 목소리로 웅얼대는 경수의 질문에 종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 덥다. 더워!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재끼며 손으로 마구 부채질을 해대는 경수였다.
"뭐야, 겨우 이거 물어본다고 이렇게 뜸 들인거야? 난 또 저번처럼 또 집 나간다고 선언이라도 하는 줄 알았잖아. 씨발."
"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난 너의 보호자니까 저 정도의 알 권리는 있다고 생각해…."
근데 왜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는데? 고기를 질겅질겅 씹던 종인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고 맞은 편의 경수를 쳐다봤다.
"어땠으면 좋겠는데, 너는."
짜증나 김종인 나쁜넘ㅠㅠ로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