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칠봉입니다."
"안녕하세요. 최한솔입니다"
그러니까 너를 처음 만난 건, 눈이 소복히 오던 20살의 2월 어느 날이었다. 일찍이 연애와 인맥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던 친구가 니네 캠퍼스 로맨스, CC 이런 거
기대하지 말라고. 좋을 거 같지만 헤어지는 순간 지옥이라면서, 이렇게 가까운, 다른 대학 다니는 또래친구 만나는 게 최고라는 명언과 함께 만들어 준 소개팅 자리였다.
널 보는 순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진짜 잘생겼다.' 라는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사람이 저렇게 생길수도 있겠구나 하며 뒤이어 든 생각은 '제발 나한테 영어로 말 걸지
마라'였다. 아마 최한솔이 알면 엄-청 비웃겠지. 솔직히 그 얼굴로 그렇게 한국말이 유창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난 원래
그렇게 이목구비 주장 뚜렷하고 진하게 생긴 사람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친하게 지낸다고 나한테 해가 될 건 없으니까. 친하게 지내자는 한솔이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알면서도, 밀어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번호 교환을 했었지. 진짜 ##김칠봉 못 됐다!
"##김칠봉~"
"나 심심해.. 너 오늘 수업 끝난 거 다 알아. 나랑 놀자"
한솔이가 학교를 안 다닌단 사실을 난 좀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냥 나랑 다른 학교를 다니는 줄만 알았지, 안 다닐 줄이야. 그동안 얘는 도대체 학교 생활을
어떻게 하길래 맨날 심심하다, 놀아달라 하나 궁금했었는데, 학교를 안 다녀서 그랬던 거였다.
그걸 언제 알게 되었냐면, 오후 수업을 마치고 행복한 마음으로 귀가하려는데 한솔이에게 전화가 왔었다. 그 때 내 기분이 좀 하이텐션이었는데, 왜냐면 짠돌이 최한솔이
맛있는 걸 사 준다고 했기 때무니지!! 학교 앞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최한솔이 무슨 범죄자 마냥 모자에 마스크로 중무장을 해서 날 잡으러, 아니 데리러 왔다.
일단 사 준다니까 따라는 가는데 뭔가 식당가 느낌이 아니라 어디 가냐고 물었더니 '원래 맛집은 구석에 숨어있는거야. 조용히 따라 와' 하고 단호히 말하길래, 조용히
따라갔다. 그...그렇지. 그러더니 데려간 곳이 자기 작업실 (겸 집)이었다. 그 날 처음으로 한솔이가 얘기 해 줬었다. 자기는 이미 진로가 정해져 있어 굳이 대학을 가지
않았고, 부모님도 인정 해 주셨다고. 그래서 일찍이 독립을 해 작업실 겸 집에서 거의 하루종일 생활한다고 했다.
"와.. 누가 봐도 남자애 혼자 사는 집이다. 진짜"
"그래도 이정도면 깨끗하지 않냐? 완전 깔끔한거지-"
남자 혼자 사는 집을 가 볼 일이 있었어야지. 딱히 비교대상이 없어서 다 이런 거 아니냐고 했다가 '내 친구 중에 부승관이라고 있거든? 걔네 집 장난 아니야. 너 보면 욕할 걸?' 하며 정색한 표정을 하길래 '아, 그래. 그렇구나' 하고 쌍엄지를 치켜세워줬다. 그래, 우리 한솔이 참 대견하구나.
아, 그래서 최한솔이 그렇게 기대하라던 '맛있는 것'은 다름 아닌 최한솔 표 라면이었다. 이 라면을 먹어본 건 엄마랑 동생을 제외하곤 니가 첫 여자라면서 온갖 수식어를
다 갖다 붙이는데 진짜 때리고 싶었다. 엄마가 집에 고기 있다고 했는데! 내가 그 고기를 버리고 너한테 왔더니 너는 지금 나한테 줄 게 이 라면뿐이냐! 최한솔 이 나쁜 놈아!!
"야.. 너 내가 진심을 다 해 때려줄테니까 가만히 맞고 있어라. 어? 아쉽게도 전공책이 없긴 한데 그래도 내 가방 안에 무기 많거든?"
"최한솔 표 라면 이게 어디 가서 쉽게 먹어볼 수 없.. 야, 그건 아닌 것 같다. 그거 내려놓고, 응? 대신 내가! 선물 줄게! 진짜로."
그러면서 너한테 처음 공개하는 곡이라면서 미완성곡을 들려줬는데 그게 또 딱 내 취향을 저격해서 그 때 처음으로 한솔이에게 심장이 떨렸었다. 역시 자기 일에 집중하는
남자는 다 멋있는 건가.. 하는 생각과 함께. '아직 덜 완성 된 거긴 한데.. 괜찮아?' 하고 묻던 목소리가 그렇게 섹시한 건줄 처음 알았네.
그리고 나중에 그 노래를 완성시켜서 프로포즈 송으로 딱! 지금 생각해도 최한솔은 진짜 고단수였다. 그러니까 애초에 모든 걸 다 노리고, 설계해서 시작한거였다. 내
플레이리스트를 조사하고, 좋아하는 장르를 파악해서 이런 느낌이면 얘가 쓰러지겠구나를 정확히 조사해서 내 심장을 제대로 조준, 저격! 훌륭하십니다! (짝짝짝)
"와.. 대박.. 야 이 사기꾼아!"
"내가 뭘!"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안 물어봤잖아"
"이씨... 어쩐지! 술을 안 마시는 게 아니라 못 마시는 거였구만?"
"그거 뭐 좋은 거라고 굳이 찾아 마실 필요가 있어? 정 안 되면 자기가 사 와서 마시면.."
"시끄러! 조용히 해! 나 너 꼴도 보기 싫으니까!"
"아, 왜. 그래도 나 빠른이야"
"어쩌라고! 그래도 98이잖아! 이 사기꾼아!"
최한솔이 깔아 놓은 밑밥을 제대로 물고 낚시질에 허덕일 때, 얘랑 같이 술이라도 마시고픈 마음에 한솔이를 소환했었다가 의도치 않게 최한솔이 숨기고 있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친구들끼리의 술자리에 한솔이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술을 싫어하는구나, 못 하는구나 여기고 있었더니 안 마신 게 아니라 못 마신 거였구만?
98이라서?
그리고 하는 말이, 소개팅 때 자기 생일 지났었다고, 자기나 나나 만 18세인 건 똑같았으니까 동갑 맞지 않냐고 뻔뻔하게 얘기하는데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진짜 저 날의 충격이란.. 솔직히 말해서, 빠른인 것도 맞고 대학교를 선택했으면 분명 나랑 같은 학년으로 입학했겠지만, 그래도 그냥 분했다. 나는 니가 97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렇게 사람 뒷통수를 때리다니! 쓸데없는 배신감이 들어서 진짜 한 3일간을 삐쳐있었다. 그것도 나한테 말한 게 아니라 걸린 거여써.. 저 때 안 걸렸으면 혼인신고
할 때 알았으려나.. 와.. 그럼 나 진짜 제대로 사기결혼할뻔했네. 도장 찍다가 '야! 너 뭐야! 98이야?' 이랬으면.. 동사무소에서 큰일 한 번 날 뻔 했겠다.
"좋았어. 그럼 게임해서 점수 낮은 사람이 저녁 쏘기?"
"야, 아까 점심 내가 사 줬잖아. 저녁은 니가 사"
"아 왜- 그래서 내가 음료수 사 줬잖아. 게임 해!"
"와~ 진짜 치사해. 야, 너 안 봐 준다. 각오해"
고백도 없었고, 사귄다는 의식도 없이 어느새 우리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얘랑 놀러다닌건데, 정신 차려보니 그건 데이트였고 우린 그저 놀러다닌 게 아니라
연애질을 하고 있었다. 먹고 싶은 게 생기면 당연한듯 서로에게 얘기해서 먹으러 가고, 재밌는 영화가 나오면 같이 보러 가고 뭐 그런 것들.
물론, 최한솔은 이 모든 걸 알고 날 조종하고 있었던 거겠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 끼치네.. 최시윤이 자기 아빠 이런 거 닮으면 어떡하지?
"솔아, 나 OT..."
"안 되는 거 알면서 물어보지?"
"동아리 친목 다짐을 위해...1박 2일인데..."
"나랑 1박 2일로 부산 가자. 아는 형한테 물어서 이미 코스 다 짜 놨어"
아메리칸의 피를 물려받았으면서 왜 그 마인드는 물려받지 못 한 건지 모르겠다. 이건 뭐 학교 생활'만' 하라는건지, 과 OT는 물론이거니와 동아리 내에서 친목을 다지기
위해 가는 캠프도 싹 다 못 가게 막았다. 외박이 말이냐 되냐먼서. 아니 우리 엄마 아빠도 허락한 걸 니가 뭔데 왜 그러는데 나한테!!! 이 단속 심한 남자야!! 뭐가 이렇게
다 안 되냐고!!
그래도 그런 것 따위에 굴하지 않고 꼬박꼬박 다 갔다. 물론 거의 10분 단위로 보고를 해야 했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덕분에 내가... 술도 못 마시고ㅠㅠㅠㅠ. 98
남친이랑 만나는 죄로 이런 기회에 술 많이 마셔야 되는데!! 니가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이 나쁜 최한솔넘아!!!
"최한솔 나 MT 간다! 이틀 뒤에 보자! 마중 나와 있어!"
"야! ##김칠봉!"
"내가 잘못한 건 없지만 사죄의 의미로 누나가 맛난 점심 사 줄테니까 기대하고 있고! 알았지? 사랑한다-"
나중엔, 아예 의사를 물어보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저게 내 처음이자 마지막 MT였는데(그 땐 마지막이 될 줄 몰랐지...또륵) 저렇게 대책없이 홀랑 떠나버린 건 지금 생각
해도 신의 한 수였다. 저 때는 술을 신명나게 마셨었다. 한솔이한테는 잔다고 뻥 쳤는데 사실 밤새 게임하고 술 마시고.. 그 때 안주가 참 맛있었지. 게임 상품으로 양주도
얻어서 아주 그냥 신명나게~ 캬아~
물론, 후폭풍은 꽤 셌다. 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정문에서 눈 부릅 뜨고 대기 타던 한솔이를 낚아.. 고기 무한 리필집을 가 실컷 먹였다. 사람은, 주도면밀 해야 할 필요성이 좀 있다. 샤워도 하고 왔고, 해장은 아침에 라면으로 일찍이 깔끔하게 끝냈지- 얘 데리고 국밥집 갔다가 무슨 잔소리를 들으려고...
"아이구- 우리 한솔이 잘 먹네. 맛있어? 여기 무한리필이니까 맘껏 먹어. 배 터질 때까지 먹어"
"너는, 술 배 터질 때까지 마시고 왔어? 어? 잔다고 거짓말 치고 계속 마신 거 아니야?"
"에이- 내가 무슨 술 못 마셔서 죽은 귀신이 붙은 것도 아니고. 나 술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눈치는 빨라가지고.. 그래도 거짓말은 안 했다. 술을 즐기지 않을 뿐, 한 번 마시면 잘 마시는 거니까.. 한 번 마실 때 죽어라 마시는거지! 엉? 알잖아요 우리? 모르나?
"우와! 사진 진짜 잘 찍었다. 완전 예뻐"
"내가 고생 좀 했지. 안 쓰던 포토샵까지 썼다"
"##김칠봉, 내가 니 친구지만 솔직히 얘기할게"
"응? 잠깐만, 나 이거 치우고. 왜, 뭔데?"
"한솔이가 너보다 훨씬 예뻐. 진짜"
"그건 알고 있지. 얘도 알 걸?"
"최한솔, 득츠르... 야, 넌 굳이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뭐냐? 싸우자고?"
너와 처음으로 벚꽃을 같이 보러간지 꼭 1년이 지난 그 날, 우리는 그 밑에서 웨딩 사진을 찍었었다. 대학생 1명이랑 미래 유망한 프로듀서님(이라 쓰고 잠정적 백수라 읽는다)이 무슨 돈이 있다고 으리으리하게 결혼식을 하고, 스튜디오에서 웨딩 사진을 찍을 수 있겠는가. 사진 잘 찍는 친구와 스튜디오에서 빌린 예쁜 옷 한 벌, 그리고 어느새 하나 둘 쌓여있던 커플 아이템들로 소박하게 우리들만의 웨딩앨범을 만들고, 거창한 결혼식 대신 양 쪽 친구들과 (매우 초딩스러운) 파티를 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최찬솔의 프로포즈는, 진짜 최한솔 같았다. 내가 그렇-게 서프라이즈로 감동 팍팍 받게 해 달라고 눈치를 줬는데, 아니 그럼 눈치 있거나, 입이 무거운 사람을 선택해야지,
나한테 '##칠봉아! 넌 무슨 꽃 좋아해?' 라고 묻는 사람한테 도움을 요청할 일이니..? 갑자기 뜬금없이, 전화 와서 무슨 꽃을 좋아하냐는데 의심 안 할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살짝 김이 샌 것 빼고는 그래도 정말 감동적인 프로포즈였다. 언젠가 들었던 그 노래가 완성된 채로, 최한솔의 목소리가 담겨 흘러져 나오고 있었고 귀여운 글씨로,
한 자 한 자 진심이 꾹꾹 담겨있는 편지도 받았다. 중간에 영어로 하는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그 때 네 표정과 눈빛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말이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해. 진짜 잘 해 줄게. 고마워"
종종 들어왔던 말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무거운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어서, 세상 그 누구의 프로포즈보다 더 완벽하고 멋있었다고 나는 당당히 말 할 수 있다.
그 때의 그 노래와 편지를 보면 아직까지도, 나도 몰래 웃음이 저절로 새어나오니까. 그걸 생각할 때마다 ##김칠봉은 어느 여자보다 더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누나! 누나는 남자친구 있어요?"
"아니"
"어, 얘 남자친구는 없고"
"남편 있어."
"네? 진짜요? 벌써?"
"혼혈이라 진-짜 잘생겼어. 난 사람이 그렇게 생길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니까?"
"걘 얼굴이 다야. 얼굴 빼곤 니가 걔보다 나은 게 많을 걸?"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였던 나는 어느새 '언니, 누나' 소리를 듣는 2학년이 되어있었고, 누군가의 '딸'이 아닌,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어있었다. 잘생긴
후배님들을 볼 때마다 왠지 가슴 한 쪽이 아려오는 건... 아니야, 우리 한솔이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 그럼 그럼! 세젤잘 최한솔! 리틀 디카프리오가 제 남편입니다!
"여보- ##칠봉아-"
"미쳤어, 진짜!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그냥 들어왔지. 와~ 너네 학교 좋다~"
가끔은 시키지도 않은 이벤트로 사람을 놀래켜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수업 마치고 내려오니까 로비에 니가 앉아있었다던가, 전화를 끊자마자 눈 앞에 나타난다거나 하는.
덕분에 연애를 하는건지, 결혼 생활을 하는건지, 그것도 아니면 육아 생활을 하고 있는건지 헷갈렸다. 아, 그리고 아무래도 최한솔의 원래 목적이었던 것 같은 '##김칠봉
임자 있는 거 온 대학에 알리기' 도 성공했다.
당연히 그 사람이 엄청나게 잘생겼다더라 하는 이야기도 뒤따라와서 어딜 가면, 어떻게 하면 그런 남자를 만날 수 있고 사귈 수 있냐 하는 문의 때문에 내가 몸살 날 뻔 했던
것도 절대 잊을 수 없다.
"어? 그거 커플링이야?"
"응? 아, 이거? 아니야."
"그럼 뭐야?"
"결혼반지. 걔가 돈 없다고 커플링은 안 사주더라구. 그래서 내가 돈 모아서 하나 살까 생각 중이야"
문득 커플링이 부러워져서 집에 돌아와 한솔이에게 찡찡댄 적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커플링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안 되면 내가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커플링을 살 거라고 떼 썼더니 매우 침착하게 '그래, 사. 내 반지 호수는, 알지?' 하면서 뻔뻔하게 대꾸했다. 내가 사라면 못 살 줄 알고?
의지의 한국인이자, 무서울 거 없고 못 할 거 없는 대한민국 아줌마야, 내가! 결국 커플링을 사서 박력 넘치게 '자, 오다 주웠다. 갖던지 말던지' 하고 시크하게 한솔이 손에
끼워줬었지. 내가 생각해도 그 때 ##김칠봉은 좀 멋있었다. 이 시대의 신여성!
"최한솔 죽일거야아-"
라는 말을, 이제까지 딱 2번 했다. 그리고 그 2번 모두, 최시윤과 관련이 있었다. 첫번째는 최시윤이 생긴 걸 알았을 때, 두번재는 최시윤이 태어날 때.
둘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로 시윤이가 생긴 걸 알았을 때, 나는 성실하게 근무 중인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내가 꼭 커플링을 사고 만다는 일념 하나로 열일하고 있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난
홀몸이 아니었던거지. 이 사실을 알자마자 제일 걱정됐던 건 다름 아닌 입덧이었다. 나는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동안 질리게 음식 냄새를 맡게 될 거니까. 제발 이
냄새가 우리 애 기호에 맞았으면 하고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모른다. 엄마 아르바이트 끝날 때까지만 좀 도와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엄마를 닮은건지 아빠를 닮은건지
입맛 까다로운 아드님 덕분에 본능과 이성이 갈등하느라 고생을 좀 격하게 했다.
두번째는 그냥.. 진통이 오는 순간 세상에서 내 남편이 제일 밉고 내가 왜 저 인간을 만나서 이렇게 혼자 고생해야 하는건가 생각 들고, 나는 이렇게 아파 죽겠는데 저건 아무 도움도 안 되고 그런 당연하고 복합적인 심정에서 우러러나온 말이랄까. 내 골반은 왜 이렇게 좁아서 이 고생일까. 분명 의사 선생님이 머리가 작아서 걱정이라고 하셨는데 아닌 것 같은데요 선생니임!!! 저 진짜 아파 죽을 것 같은데요!!!
시윤아, 엄마는 너를 매우 사랑한다. 이쁜 내 새끼. 사랑스런 내 새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 니가 무슨 죄가 있니. 너네 아빠가 나쁜 놈이지. 응? 우리 아가는
아무 잘못 없어요. 그럼 그럼.
"최시윤이야 나야"
"아우- 진짜. 그걸 질문이라고 한다"
"그치? 아무리 그래도 당연히"
"당연히 우리 아들이지. 뭐 그런 걸 물어"
"야! ##김칠봉!"
"뭐? 왜, 최한솔!"
우리 남편이 이렇게 질투쟁이인줄은 미처 몰랐네. 100일이 지나고 아이가 조금씩 커 갈수록 어째 남편님의 정신연령은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아이를 재우고 오면 자기도
재워달라며 제 품 속으로 나를 넣고 꼭 안지를 않나, 이유식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쟤만 입이냐며 숟가락에 밥이며 반찬이며 예쁘게 올려 놓고 아기새 마냥 입을 아- 벌리고
있었다. 아이가 조금 자라고 나서는 분명히 안 된다고 했는데 강냉이를 아이에게 줘서 여린 입천장이 헐었다거나, 돌도 안 지난 아이에게 빵의 신세계를 알려줬다거나. 질투
아니면 사고를 반복하는 큰 아들 덕분에 하루 하루가 버라이어티 쇼 못지 않았다.
"...빨리 가! 가 버려!"
"우으응~"
"어~ 어떡해~"
"와~ 이러기야? 나한테는 '갔다 올게' 하더니 아들한테는 그 눈빛, 표정 뭐야?"
"내가 얘기한 거 잊어버리지 말고! 모르는 거 있으면 연락해"
살면서 그렇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적이 또 없던 것 같다. 학교에 복학 신청서를 내고, 등록금을 냈을때도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막상 그 날이 오니 뭐가 이렇게 떨리고 무서운지... 아기 띠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아들도 눈에 밟힐 것 같고, 나 없이 이 집이 잘 돌아갈까 걱정되고, 남편은 어제보다 오늘 갑자기 확 늙은 것 같고...
그렇게 현관 신발장 앞에서 10분을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학교에 있는 시간동안 그리울 아이의 냄새를 저장하고 예쁜 이마에 뽀뽀도 진하게 남겼었다. 그리고 자기가 먼저
아니냐며 삐쳐서 입술이 한가득 나와 있는 남편의 입술에도 오랜만에 꽤 진한 뽀뽀를 해 주고 가벼운 백허그(그냥 꼭 안고 싶었는데.. 아기띠가...)를 하고서야 겨우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강의 시간 내내 아이 옹알이가 들리는 것 같고, 한솔이가 부르는 것 같고.. 도무지 집중도 되지 않고 어차피 OT 기간이라 결국, 3시간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이야 뭐.. 아들이랑 남편이 깨워주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앞으로 더 시간이 흐르면, 학생과 엄마라는 역할 둘 다를 소화 해 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를수도 있고, 한솔이가 훨씬 더 유명해져서, 모든 신경을 작업하는데에 쏟아야 할 시간이 오게 되면, 그 꿈을 지켜주기 위해 학교를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르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은, 세상에 둘도 없는 멋진 남자 최한솔, 최시윤이 다 내 편이니까. 날 응원해주니까 조금만 더 힘내고 조금만 더 욕심 내서 누릴 수 있을 때 모든 걸 다 하고 싶다.
그래서 훗날, 누군가가 어린 나이에 선택한 그 모든 결정들은 성급했다고, 그래서 너네는 분명 무언가를 잃었을거라고 얘기할 때, 당당히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우리는,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고. 오히려 남들이 누리지 못한 감정과 느낌을 느껴 본 그런 특별한 사람이라고. 우리 아이도 엄마 아빠 손길, 사랑 부족함 없이 받고 다 누리고 그렇게 컸다고 꼭 얘기해 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