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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태어날 때부터 나는 검은색

자라서도 검은색

태양 아래 있어도 검은색

무서울 때도 검은색

아플 때도 검은색

죽을 때도 여전히 검은색이랍니다

그런데 백인들은요

태어날 때는 분홍색이잖아요

자라서는 흰색

태양 아래 있으면 빨간색

추우면 파란색

무서울 때는 노란색

아플 때는 녹색이 되었다가

죽을 때는 회색이죠

이래도 나를 유색 인종이라고 할래요?

-어느 아프리카 어린이 '태어날 때부터 나는 검은색'

 

 

오늘따라 태양이 더욱 악을 쓴다. 하늘과 땅이 훅훅 불에 타는 것 같다. 등에 착 달라붙은 옷에서 냄새가 난다. 주위의 더운 입김과 합쳐지니 더욱 참기가 힘들었다.

끈적끈적한 진흙, 자꾸만 삽과 다리에 달라붙으니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감독관들의 독촉이었다.

"빨리 해! 농땡이 피우지 마! 기한 내에 마쳐야 한다! 쉴 생각 하지 말고 게속 움직이란 말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무것도 샘은 주위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쪽, 왼쪽, 앞, 그리고 그 뒤. 삽과 곡괭이를 든 손들에 힘이 들어갔다.

감독관은 호통을 치다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일제히 작업이 멈춘 것이다.

"뭐, 뭐야? 이것들이, 당장 다시 시작하지 못해!"

"못하겠다!"

"그래! 못한다!"

우우, 하는 야유 소리와 함께 저마다 삽과 곡괭이를 높이 쳐들고 감독관들 쪽으로 내달렸다.

"으아악!"

"나 살려!"

감독관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헤집어 놓았다. 삽으로 나무 상자를 부수고, 곡괭이로 벽을 찍어내렸다. 공사 현장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

"뭐라고요?"

여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먹을 너무 꽉 쥐어서 손이 하얘졌다. 얼굴은 그보다 더했다. 핏기가 싹 사라져 꼭 유령 같았다.

"그동안 큰 공사에 대동 됐던 인부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었나 봅니다. 저들은 처우 개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런... 일이..."

알베르토는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떠는 여왕의 모습을 보곤 다급히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지금은 때가 좋지 않은 것 같군. 더 자세한 상황은 라쉬 대공과 의논하도록. 라쉬 대공,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타일러가 신하들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누기 위해 다른 방으로 갔다. 알베르토는 여왕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를 침실까지 데려다 주었다. 침실에 가는 내내 그녀의 표정은

창백해지기만 했다. 알베르토는 마음이 아팠다.

"여왕님....."

"알베르토, 어쩌죠?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전혀 몰랐는데..... 내가 너무 자만했어요. 난 정말 바보였다고요. 인부들이 그런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나, 난 그동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아니었단 말이에요."

한 줄기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렀다. 이윽고 그녀는 얼굴을 손에 묻고 울기 시작했다. 알베르토는 조용히 그녀를 안아주었다.

"여왕님, 너무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제부터 그들을 돌봐 주시면 됩니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시고, 여태껏 그래 오신 것처럼 그들을 자애로 대해 주십시오. 그럼

해결될 겁니다.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알베르토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이었다. 그사이 그녀는 조금 진정된 듯 호흡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엔 아직도 눈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그녀를 끌어당겨 짧게 입을 맞추곤 속삭였다.

"My rosie."

***

첫 번째 행동을 취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다행히 군대가 나타나서 진압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아니, 대화를 들으려 하지 않으니 다행이 아닌 건가. 샘은 공사장의 매캐한

모래가 뒤섞인 찬 밤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둔 밤하늘은 옛 친구를 떠올리게 했다. 샘의 옛 친구, 새미는 스테판 왕립 학교로 떠난 후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짤막한 편지만 몇 장 보냈을 뿐이었다. 대충 잘 지내고 있다, 사람들이 다 친절하다는 내용이었다. 새미의 어머니도 새미를 따라 마을을 떠났기 때문에 새미의 소식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나쁜 자식, 돌아온다고 했으면서. 마을을 더 살기 좋게 만들어준다고 했으면서. 다 잊어버린 거냐?"

처음에는 샘도 새미를 기다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었고, 자신의 마을은 여전히 가난하고 가난했다. 샘과 가족들, 마을 사람들 앞에 놓인 하루들은

지겹도록 암담했다. 결국 스스로 목소리를 높이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이 일을 계획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뀌는 게 있을까?'

저 높은 자리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자들 중 한 명이라도 더럽고 비참한, 가난한 인부들의 말을 들어줄 이가 있을까?

"만인의 연인일까? 아니면 천사? 요정?"

***

여왕은 비틀거리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지난 일주일간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장 군대를 보내서 쓸어버려야 한다는 신하들의 의견에 반대하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평화적으로 해결해야한다는 자신의 주장은  펴보지도 못한 채,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로 달려가기 일쑤였다. 부군들도 여왕의 편에 서서

도와주긴 했지만 신하들은 고집불통이었다. 여태껏 벌레같이 여겼던 이들이 꿈틀대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싫은 것이리라. 여왕은 한숨을 내쉬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까지 된 데 이유가 있을 거야, 분명히.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야 했어, 바보 같으니. 이제부터 잘하면 된다고 말해주지만 자꾸 후회가 돼.'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탁상공론만 할 수는 없는 법. 그녀는 자신을 거들어주며 신하들과 함께 싸워준 부군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언제까지고 보호받으며 살 순 없어. 난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말로 안 된다면 이제 남은 건 한 가지야. 두렵다고 하지 않으면 안 돼."

***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리잔이 깨졌다. 유리잔 속의 물이 바닥과 주변 사람들의 바짓단을 적셨다. 소리가 꽤나 커서 문 밖을 지나가던 시녀 하나가 흠칫 놀랐을 정도였으나

새미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지금 뭐라고.....? 말도 안 돼, 거짓말이야!"

"아니, 이건 사실이야."

"제기랄, 지금 미쳤어? 나 보고 그걸 믿으란 말이야?"

"진정해. 쉽지 않다는 거 알지만 일단 진정하라고. 플로라, 여기 와서 컵 좀 치워주겠어? 아니, 지금 말고 나중에. 지금 얘기 중이야. 별 거 아냐, 그냥 떨어뜨렸어. 얘기 끝나면

부를게. 그래, 고마워."

카를로스가 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시녀에게 말하는 중에도 새미의 입에서는 게속 욕지거리가 나왔다.

"그만하고 여기 앉아, 이 친구야! 망할, 앉으라고!"

새미가 그런 카를로스를 몇 초 동안 빤히 보더니 긴 한숨과 함게 의자에 주저앉았다.

"험한 말해서 미안하군."

"됐어, 서로 했잖아. 대체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그냥, 거기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안 믿겨서. 그런 일 일으킬 힘은 전혀 없는 사람들인데 말이야."

"네 고향 사람들이야."

"그래, 내 고향이지."

"대체 왜 그렇게 삐딱하게 굴어?"

"내가 학교에서 당한 일 알잖아. 내가 그런 일을 당한 건 순전히 내 출신, 내 고향 때문이었어. 엣날엔 고향을 사랑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증오하기라도 해?"

"난 내 고향을 증오하는 게 아니야.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거지. 그래서 지웠고. 그곳에서 사는 게 행복하진 않았어. 대충 어떤지 예상할 수 있잖아. 내가 굳이 얘기해야 돼?

굳이 그러라고 한다면, 글쎄. 플로라는 며칠 동안 이 방 안에 못 들어올 거야. 왜냐하면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테니까. 그동안 저 망할 컵은 그대로 있겠지."

 쏟아내듯 말을 내뱉고 새미는 마른세수를 했다. 카를로스는 작게 한숨을 쉬고 의자를 끌어다 새미 앞에 마주 앉았다.

"새미, 네가 고향에 대해서 그런 태도 가지는 거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그걸 지지해 줄 수는 없어. 그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있으면 내 눈 앞에 내놓아봐. 젠장, 난 이제 여기서 쫓겨날 거야. 내 출신 싫어하는 작자들은 성에 많아. 더 문제인 건 그 작자들이 다

힘깨나 쓰는 양반들이라는 거지. 너나 나한테 그 엿 같은 짓했던 놈들 아버지기도 하고 말이야. 분명 이 일을 마무리하고 곧바로 나를 공격하겠지. 제기랄, 내가 이 자리를

얻으려고 온갖 고생 다 한 거 알잖아. 내가 이 자리를 원한 건 나한테 엿을 먹인 놈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요. 간신히 그놈들에게 엿을 먹였는데 이제 와서 다시 엿을

먹을 순 없어. 내가 더 참을 수 없는 건 그게 내 고향 사람들 때문이라는 거야. 나한테 추억이나 사명감 따위를 강요하지 마, 버렸어."

카를로스는 뭐라 말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이런 새미의 생각을 아예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머리가 아파왔다.

"젠장, 이 일이 좋았어. 좋았단 말이야. 처음 이 일을 얻었을 때 어머니께서 정말 좋아하셨어. 내가 이 교사직 시험 치는 날에 시험장까지 따라오시더라고. 몸도 안 좋으신데.

기억나? 그 때 겨울이었잖아. 갑자기 어디서 힘이 솟구치셨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셔가지곤.... 겨울바람 맞은 게 안 좋았지. 얼마 안 있어서 세상 뜨셨으니까."

새미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친 듯 잠시 말을 멈추더니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카를로스는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여기서 나갈 순 없어. 게다가 돌아오는 가을에 아이가 생긴단 말이야."

"이런, 이시스가 임신했어?"

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상황이 더 난처해졌군."

"더 난처해질 수도 있었나?"

"담배 좀 피워야겠어."

카를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밖에서 시녀가 숨을 들이키며 놀라는 소리를 냈다.

"플로라, 왜 그..... 이런."

"뭐야?"

"당장 나오기나 해."

새미는 교사장실의 문 밖으로 나섰다. 놀랍게도 문 밖에는 짙은 붉은색 망토를 입은 여왕이 있었다.

"여, 여왕님을 뵙습니다."

새미와 카를로스는 바짝 긴장해 인사를 올렸다. 여왕은 살짝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시녀가 허리를 숙이고 나가려 하자 여왕이 붙잡았다.

"안 돼, 나가지 말거라."

"예에?"

"새미 라샤드?"

"예, 예! 여왕님!"

"나랑 같이 성을 나가줘야겠어요. 교사장, 내가 성을 나가 있는 동안 연기를 좀 해줘야겠군요. 넌 이름이 무엇이지?"

"저, 프, 플로라라고 합니다."

"여왕님, 이렇게 묻는 것이 무례한 일인 거 압니다만, 이게 다 무슨 상황입니까? 게다가 저와 함게 성을 나가시다니요?"

"라샤드, 나를 당신 고향으로 데려다줘요. 이 성에서 빈민가가 고향인 사람은 당신 밖에 없더군요."

"어딜 가신다고요?"

"여왕님, 안 됩니다! 성을 비우시다니요!"

"밖에서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나 지났어요.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고, 귀족들은 이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조차 없어요. 아니, 해결하고 싶어 하긴 하죠.

군대로 말이에요. 하지만 난 절대 군대를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이 일을 끝낼 방법은 단 한 가지니까요. 바로 내가 그들과 직접 이야기하는 거죠. 빈민가의 사람들이

바라는 건 그거예요."

"무조건 안 됩니다, 이건 너무 위험합니다."

"맞습니다! 지금 밖에 나가신다는 건, 무례함을 용서하시지요, 완전히 미친 짓입니다."

"이게 부탁이라고 말한 적 없어요. 명령이죠."

여왕의 어조는 단호했다. 난처해하는 표정의 두 사람과 굳건한 여왕의 얼굴 사이를 시녀의 불안한 눈빛이 오갔다.

"라샤드, 날 도와준다면 당신이 일자리를 잃지 않게 해주겠어요. 당신이 제일 걱정하는 게 그거 아닌가요?"

새미의 눈동자가 심히 흔들렸다.

"새미, 무슨 생각인거야? 여왕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카를로스 고리토, 당신은 훌룡한 선생이고 내 아이들이 당신에게 교육받는다는 점을 아주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생각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내 명령을 몇 번이나 거부하는 지금의 행동은 나에게 별로 유쾌하지 않군요. 제안이나 거래를 한 사람에게 하는 걸로 내 배려는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이 방 안의 세 사람 전부에게 일일이 허가를 구해야 하는 존재였던가요, 내가?"

카를로스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건 새미와 시녀도 마찬가지였다. 카를로스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몇 초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정적을 깬 것은 새미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정말, 정말 제가 이 성에서 나가지 않도록 해주시는 겁니까?"

"물론이에요."

"저에게는 아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아이도 태어나게 됐습니다. 정말, 약속을 꼭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약속하겠어요."

새미는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고향에 안 간 지 너무 오래됐습니다. 스테판 왕립 학교에 입학하려고 마을을 떠난 이후로 한 번도 간 적이 없습니다. 아마....."

"갈 수 있나요, 없나요?"

"....갈 수 있습니다."

"좋아요, 그 대답이면 충분해요. 교사장, 나는 이 순간부터 제이콥 왕자와 마르티노 왕자의 교육 때문에 당신과 상담을 하는 겁니다. 시녀장에겐 그렇게 말해놓았어요.

그러면 부군들이 여기 오는 걸 꽤 오랫동안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두 왕자니까요. 다른 교사들이 들어오려는 것도 모두 막으세요."

"좋은 방법입니다만, 과연 얼마나 버틸지..."

"그래서 플로라가 필요한 거죠. 플로라, 지금부터 너는 교사장과 함께 방에 들어가서 열심히 얘기만 해주면 된다. 진지하고 차분하게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겠지?"

"예! 알아 들었고 말고요!"

"방에서 여자 목소리가 나면 의심을 훨씬 덜 사게 될 겁니다. 이제 군말 없겠죠?"

카를로스는 정말 여왕은 말릴 수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썼군요. 이제 가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여왕님."

새미와 여왕이 방을 나서려 할 때, 뒤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여왕님!"

"무슨 일이지?"

"저, 저, 저기 저 무사히 돌아 와주십시오! 그리고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녀가 얼굴을 붉히며 옆에 선 카를로스는 흘긋거렸다. 카를로스는 알아채지 못하고 여왕과 새미를 걱정스런 얼굴로 보고 있었다. 여왕이 미소를 한 번 짓고 방을 나섰다.

***

빈민가는 왕국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몇 시간을 말을 달려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여전히 마을은 더럽고 척박했다. 무엇보다 그 지독한

햇빛이 길과 바닥을 비롯한 온 마을에 아직도 처덕거리며 들러붙어 있었다. 얼굴에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열기는 여전했다.  열기가 마치 얼굴의

살점과  눈알을 게걸스레 파먹는 괴물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괴물은 새미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그것 보라고,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잖아?"

이젠 낄낄대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아 새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무슨 일이죠? 어디 안 좋은가요?"

"아, 아닙니다. 그냥 더워서 그렇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몇 시간 동안 말을 타고 왔으니 피곤할 만도 한데 여왕은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떠한 불평불만도 없었다. 새미는 자신이 모시는 여왕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다시금 느꼈다.

"마을 사람들을 찾아보죠."

"지금은 여기에 없을 겁니다. 공사장에서 농성을 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래도 남아 있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들과 만나서 지도자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잘 알겠습니다."

***

둘은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마을은 마치 닳을 대로 닳은 매춘부 같았다. 자신의 더러운 면과 맨몸을 타인에게 거리낌 없이 보였다. 심지어 그 타인이 여왕일지라도.

집에 남아 있는 몇몇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떤 노인은 상처가 곪아 누런 구더기가 옴질거렸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마을을 여전히 가난하고, 가난하고, 또 가난한 장소였다.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다가

익숙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두려워졌다. 저 곳에 가면 왠지 알고 싶지 않은 많은 것들과 마주칠 것 같았다.

"저, 여왕님. 여기는 가지 않으시는 편이......."

그러다 새미는 말을 다 끝낼 수 없었다. 여왕의 입술이 새파래져 있었다. 날씨가 몹시 더운데도 겨울바람을 맞고 있는 듯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분명 충격을 빋은

것이리라. 그녀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겠지만, 이만큼 참혹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잠깐이지만, 새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적어도 자신의 집에는 가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지금이라도 마을을 아주 떠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일순간 여왕은 단호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뇨, 가겠어요."

그리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새미는 그런 여왕의 뒷모습을 보고 마른 침을 삼켰다.

"게신가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새미는 안절부절 못하며 언제쯤 여왕이 발길을 돌릴까만 계산했다.

"계신가요?"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들어 가봐야겠군요."

여왕은 새미가 발릴 틈새도 없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구세요?"

웬 앳된 소녀가 경계어린 눈빛으로 여왕을 째려보았다. 여태껏 노인만 보다가 갑자기 젊은 사람이 튀어나오자 여왕은 순간 당황해 몇 초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만 가주세요."

소녀가 문을 거칠게 닫으려 하자 여왕이 다급하게 문을 붙잡았다.

"잠시만! 잠시만 얘기 좀 했으면 해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그리고 이 마을에선 비단옷 입은 사람은 누구도 믿지 않거든요. 그럼 이만."

"그냥 잠시면 됩니다, 아가씨. 저와 이분은 여러분들이..."

"가라니까! 왜 자꾸!"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멈추더니 새미를 묘한 눈길로 쳐다봤다. 그리곤 말도 안된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새미 오빠?"

"아가씨가 누군데 제 이름을.....?"

"오빠 나 기억 안 나? 정말로?"

"글쎄요, 그...."

"오빠 진짜 변했구나. 다 잊어 버렸구나.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럼 할 얘기 없겠네. 이제 가, 안녕."

"잠깐! 누구신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소녀가 소리를 질렀다. 입술을 너무 꽉 깨물고 있어 피가 나올 것 같았다.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단 말이지....."

새미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지금의 그로서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오빠, 내 율메이란 말이야. 샘 오빠 동생 율메이란 말이야."

머릿속에는 번개가 치듯 기억 속 옛 친구가 갑자기 떠올랐다. 새미는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율메이는 어깨를 들썩 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여왕이 안타까운 마음에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이내 율메이가 뿌리쳤다.

"손대지 마요! 이 여잔 누구야? 왜 데려 온 거냐고!"

"이, 이 분은 이 나라의 여왕님..."

"헛소리 지껄이지 마! 어디서 주워 왔는 지 내 알바 아니지만, 이 여자 내세워서 샘 오빠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려고 했다면 큰 오산이야!"

"미쳤...!"

"나가! 꺼지란 말야! 이... 이 배신자! 배신자야!"

율메이는 마구잡이로 새미를 때렸다. 머릿속이 마구잡이로 얽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율메이."

집 안쪽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문밖으로 또 다른 사람이 걸어 나왔다. 하얀 머릿수건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나이는 새미보다 많아보였다.

"그만 하렴."

"미니 언니....."

"그만 하렴."

율메이는 여전히 숨을 씩씩거리며 입을 앙 다물고 있었다.

"미니 누나?"

"......그래, 새미로구나. 많이 변한 것 같네. 아니, 많이 변했겠지."

미니 누나는 알 듯 말듯한 눈길로 새미를 바라보았다. 미니 누나는 율메이의 어깨를 감싸고 안으로 데려갔다.

"한 때를 오빠를 좋아했었는데."

율메이는 쏘아붙이고는 미니의 손마저 뿌리치고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율메이가 사라지고 나서야 새미는 미니 누나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분명 자신보다 겨우 네다섯이

많을 뿐인데도 훨씬 나이 들어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해온 노동이 그녀의 나잇살을 앞당긴 것이 분명했다. 피부는 더 거칠어졌고, 눈꼬리도 쳐져있었다. 옛날과 똑같은 것은

그녀의 새하얀 머릿수건 뿐이었다.

"그래, 잘 지냈니? 아니, 이건 좀 바보 같은 질문이네. 이 분은 누구니?"

"믿기 힘들겠지만, 여왕님이세요."

"정말?"

미니가 여왕의 얼굴을 놀란 눈길로 쳐다보았다. 여왕은 미니의 눈동자가 아주 맑고 또렷하다고 생각했다.

"믿기 힘든 건 사실이야.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이 분이 아주 많이 놀란 것 같구나."

"이분, 정말 여왕님이세요."

"대체 왜 온 거니?"

"이 일의 주동자를 알고 싶어서요."

미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샘인가요?"

"그 앨 기억이나 하니? 아니면 방금 율메이 때문에 떠오른 거니?"

이번엔 새미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미니는 말없이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게 누군가요?"

여왕이 조심스레 물었다.

"제 동생이에요."

미니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들어봐요, 날 믿기 힘든 거 알아요. 날 여왕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성을 대표해서 온 어떤 사람으로 대해도 괜찮아요. 그냥 그 샘이라는 사람과 만나게 해주면 좋겠군요."

"죄송하지만 그만 하셨으면 해요. 귀하신 분 같은데 여기 있으시면 안 되죠. 이만 돌아가세요."

"저기..."

"미니 누나!"

"그만하세요. 이만 돌아가 주시는 게 저희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미니 누나, 제발 믿어줘. 한 번만."

".....새미. 난 솔직히 지금으로선 잘 모르겠구나. 지금 네 모습을 봐. 너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달라졌어. 옛닐의 새미라면,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밝은 눈동자에

책에 대한 열정이 있던 너라면 난 무조건 믿었을 거야. 하지마 이렇게 비단옷을 입고 초조해하는 네 모습은.... 나로선 너무 낯설게 느껴져."

미니의 목소리엔 미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질책도 있었다. 그것이 새미를 힘들게 했다.

***

담배 꽁초가 바닥에 떨어지며 마지막 연기를 내뿜었다. 이미 바닥엔 식어 빠진 꽁초들이 열 개는 넘게 널브러져 있었다.

"망할 자식들, 끝날 기미도 안 보이는군."

감독관들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담배 때문에 입맛이 썼다.

"그래도 여기 일만 잘 끝내면 이 구질구질한 공사판을 뜰 수 있다고."

"그러니까, 군대가 있어야 한다니까."

"제기랄!"

사실 이들 감독관들 대부분은 스테판 왕립 학교 출신이었다. 좀 더 자세하게는 카를로스와 새미, 타일러에게 폭력을 가한 바로 그 무리들이었다. 집안 배경을 이용해 성적은

나름 좋게 졸업했으나 그 이후는 엉망이었다. 가짜로 만든 성적인데 그에 맞는 실력을 가졌을 리 없었다. 여왕이 즉위한 후 성과 여러 도시의 행정이 정상화되며 낙하산

인사의 횟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결국 그들은 낮고 거친 공사장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공사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확실한 공을 세우는 거였다.

"이젠 집에서 아버지 어머니 구박 듣는 것도 질려!"

"이런 개같은!"

누군가 모자를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뭐라도 해야 해."

"뭘 어쩌자고?"

"지금 위에선 군대를 보내고 싶어 해. 하지만 지나치게 자애로운 우리 여왕님께서 워낙에 완고하셔야 말이지. 그러니까 여기서 손가락 빨면서 군대를 기다릴게 아니라

우리가 먼저 저질러버리는 거야. 우리 사무실을 잘 생각해 봐. 가까운 숲에 있는 짐승들 때문에 비치해둔 무기가 있잖아. 군대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으음, 맞아."

"난 해 볼만 하다 생각하는데. 우리 각자 칼도 한 자루씩 있고."

"잠깐, 이게 정말 된다 쳐, 그 다음은?"

"우린 승진하는 거지!"

"분명히 막을 거야. 밖에서는 저 거지 놈들을 동정하고 있다고."

"바로 그거야. 동정이잖아. 동정일 뿐이라고. 그냥 아, 정말 불쌍하다는 정도지. 왜? 여기 와서 대신 저 공사일 해주겠대? 아무도 없을 걸. 원래 타인의 일이란 그런 거야.

특히 불행은 말야..."

"게다가 우린 뒷배경이 있는 몸들이잖아. 성공한다면 이번엔 어쩔 수 없을 거야. 밀어붙여야지."

"난 하겠어."

"나도."

"좋아."

"한판 해보자!"

여기저기서 동의의 목소리가 들렸고 심지어 박수소리까지 나왔다. 그렇게 수십 명의 감독관들이 사무실로 몰려갔다.

***

여왕과 새미는 아무 말 없이, 넋이 나간 채로 마을길을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더 이상 마을에 있을 이유는 없었지만 마냥 떠날 수도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여왕이었다.

"......미안하군요. 내가 너무 대책 없이 행동했던 거예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약속은 지킬 테니까."

"괜찮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저도 머릿속이 너무 혼란합니다. 정말.... 오랫동안 이곳에 오지 않았으니까요."

역시 이 마을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새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은 끔찍하도록 고요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소리가 들렸다. 비명소리 같았다.

"이게 무슨 소리죠? 비명 소리 아닌가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일단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요."

새미가 빠른 걸음으로 여왕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갑자기.... 설마 내 허락도 없이 군대를?"

두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만약 정말로 군대가 출동한 것이라면, 그것은 명백히 여왕인 그녀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여왕의 승인 없이 함부로 무력을 움직인 행동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순간, 꽤 가까운 곳에서 소리가 났다. 여왕은 숨을 들이켰다. 점점 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모두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살려줘!"

"으악!"

비명과 흙먼지, 비릿한 피의 냄새와 땀 냄새. 열기와 거친 숨소리, 욕지거리. 그 모든 것들이 덩어리가 되어 여왕을 덮쳤다. 사람들이 아니었다.

살고자 하는, 죽이고자 하는 짐승들이었다. 그들은 여왕은 밀치고 부딪혀가며 도망쳤다.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안 돼.'

갑자기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조그만 방 안. 그리고 그 높다란 탑 안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듣던 날의 기억이.

붉게 물든 하늘. 그 날도 지금처럼 여느 여름날이었다. 그날의 방 안도 오늘처럼 더웠다.

갑자기 누군가 보인다. 창백한 얼굴. 그리고 안경.

마지막으로, 문.

저 문으로 누가 들어올까?

"오빠! 오빠! 오빠아! 나 무서워, 오빠! 나 무서워! 아악!"

***

정신없이 달리던 샘의 귀에 칼로 찌르는 것 같은 비명이 들렸다. 살고자 하는 비명이 아닌, 순수한 공포의 비명. 눈앞에 웬 여자가 보였다.

두손으로 귀를 틀어막고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는 게 멀리서도 보이는 듯했다.

'도와줘야 한다.'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옆에 달리던 동료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소리친 뒤 무작정 여자의 손을 붙잡고 뛰었다. 스스로도 미친 짓이라고. 무슨 짓이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달렸다. 달리고 달려 숨으 턱까지 차오르자 아무 집이나 들어가 몸을 숨겼다. 여자는 계속 비명을 질렀다. 이대론 들킬 게 뻔했다.

"조용! 조용히 하라고!"

비명은 그치지 않았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여자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면서 소리쳤다.

"조용히 하라고! 제기랄!"

여자의 눈동자가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당신 누구야? 왜 여기 있어?"

"나, 난 그냥.... 갑자기... 오빠... 그러니까... 갑자기..."

"당신 누구냐고."

"나, 난, 나는...."

여자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한 번 숨을 고르고 샘을 향해 뒤를 돌아본 얼굴은 처음과 딴판이었다.

"여왕이에요, 이 나라의. 이 일의 지도자와 얘기하고 싶군요."

샘은 멍하니 있다가 코웃음을 쳤다.

"그걸 나보고 믿으란 소리야?"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겠어요. 그냥 얘기를 하러 온 거예요."

"좋아, 당신이 찾는 지도자가 나야. 이제 됐지? 빨리 이 마을에서 나가라고."

"당신이 바란 게 이거 아니었나요? 나와 얘기하는 거 말이에요. 난 얘기하려고 성을 빠져나와서 여기 서 있고,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거예요."

샘은 여왕을 보았다. 놀랍도록 굳건했다.

"....마을은 돌아봤습니까?"

"돌아봤어요, 그리고 당신들의 당황이 얼마나 심각한 지도 조금이나 알게 됐죠."

"그래서 해결할 방법은 있습니까? 이 마을 상황이랑 이 모든 것 말입니다."

"있어요. 방금 떠올랐죠."

"방금? 효과는 있습니까?"

"물론이죠. 이미 많이 해봤거든요."

여왕은 입매를 올려 살짝 웃었다.

***

새미는 감독관들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은 새미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 그래. 성에서 일하니까 재미 좋냐?"

"출세했네, 출세했어."

"이야, 옷 좋다. 얼마야?"

새미는 묵묵부답이었다.

"얼마야? 얼마냐고 묻잖아, 이 자식아!"

소리를 치며 새미의 등을 걷어찼다. 새미는 바닥으로 엎어졌다.

'제기랄, 이 짓을 다시 당할 줄이야.'

"야. 그만해. 이 자식도 어쨌든 지금은 성에서 일한다고. 나중에 무슨 일 생길지 몰라. 놔 둬."

"어차피 잘릴 놈이야, 안 그래? 이 옷 좀 보라고. 망할! 우리는 매일 흙먼지 뒤집어쓰면서 이 더러운 공사장에서 뒹굴고 있는데 이 자식은 궁에서 책장이나 넘기고 있었다고!"

더 열이 받쳤는지 새미의 얼굴에서 침까지 뱉고는 배에 발길질을 몇 번 했다.

"어, 어어... 잠시만. 저거 저 놈들 다시 몰려오는데?"

"뭐야, 피를 봤는데도 겁을 안 먹어? 저 거지들이!"

"저놈들 뭔가 달라진 거 같지 않아? 나만 그래?"

새미는 눈을 돌려 마을 사람들을 보았다. 서로서로 손을 붙잡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앙다문 입고 부릅뜬 눈에서 결의가 느껴졌다. 왠지 새미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신을 못 차렸구만."

"하긴 한 번만 해서 말귀를 알아듣겠어? 돼먹지 못한 놈들이라고."

감독관들은 주섬주섬 무기를 챙겼다. 새미는 필사적으로 한 명의 다리를 붙잡았다.

"안 된다, 이 자식들아. 못 가! 이..."

누군가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잠깐 아찔하더니 코에서 피가 나왔다.

"누가 저놈들 출신 아니랄까봐..."

그 사이 마을 사람들은 꽤나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맨 앞에 샘이 있었다.

"난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샘 오취리다! 난 마을 사람들을 대변한다! 나와 일대일로 얘기를 하라! 우리들의 요구를 들어 달라! 그리고 우리들에게 한 폭력을 사과하라!"

마을 사람들이 동조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 돼지 같은 놈들이...!"

벌게진 눈으로 감독관의 우두머리를 되받아쳤다. 아까 새미에게 주먹질을 한 자였다.

"닥쳐! 너희한텐 물 한 방울도 아까워! 뭐? 요구? 이게 어디서 기어올라!"

"마지막 경고다! 난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샘 오취리다! 나는 마을...."

"안 닥쳐!"

"방금 우리 마을에 쳐들어온 걸 사과해라! 당신들은 여왕님의 허락 없이 무력을 사용했다! 무섭지도 않나!"

"무서워? 하! 지금 성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인형이나 갖고 놀고 있을 걸! 그 잘난 여왕님을 움직이는 건 우리 아버지라고! 우리 아버지는 말이야. 성에서 제일

돈이 많지. 나라에서 큰 행사 한 번 할라치면 아버지한테 가서 살살 기어야 한단 말이지! 그리고...."

"그리고, 또 뭐지?"

무리 깊숙한 곳에서 어떤 여자가 걸어 나왔다. 감독관은 눈살을 찌푸리고 쳐다보았다. 깊숙이 망토의 모자를 눌러써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성큼성큼 걸어 감독관과

마을 사람들 중간에 섰다. 그리고 우아한 손짓으로 모자를 벗어 넘겼다.

"여, 여, 여, 여왕님?"

햇빛 아래 드러난 여왕의 얼굴을 확인한 감독관들은 일시에 무기를 버렸다. 얼굴은 더 이상 하얘질 수 없을 만큼 하얘져 있었다.

"어쩌나, 인형이 없어서 가지고 놀지는 못하겠는데?"

여왕의 목소리가 너무도 살벌하고 차가워 모두 변명은커녕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이 마을과 나는 며칠 전부터 얘기를 계속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기로 했지. 그 상징으로 저기 있는 샘 오취리와 결혼도 약속했다. 또한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 살고 있는지, 너희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모두 들었고. 무엇보다...."

뜸은 몇 초 밖에 되지 않았지만 여왕을 제외한 모두에게 그것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여왕인 내 허락 없이 무기를 마음대로 쓴 것."

여왕은 다시 성큼성큼 걸어 가 감독관의 우두머리의 코앞에 섰다.

"꿇어라."

그가 맥없이 주저앉았다. 다른 감독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건방지구나. 감히 나를 모욕해?"

여왕이 내려다본 그의 얼굴은 마치 절대로 도망칠 수 없는 것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자의 것과 같았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군대였다.

멀리서도 왕실의 문장인 짙은 하늘색에 월계수 문양을 새긴 깃발이 선연했다. 여왕은 순간 긴장했다.

'안 돼, 어떻게 사람들의 믿음을 얻었는데. 지금 군대가 오면....'

하지만 군대의 선봉장을 확인하자 여왕은 완전히 안도했다.

"기욤!"

"여왕님, 여기 계셨군요."

기욤은 싱긋 웃었다. 본래의 순박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제 제법 멋스럽게 웃을 줄 알았다.

"마침 잘 와주었군요. 감독관들을 모두 데려가기엔 손이 부족하던 참이었거든요."

"연행이로군요."

'연행'이란 말이 튀어나오자 감독관들은 일시에 나락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감독관들을 끌고 나갔다. 개중 몇몇은

어린아이처럼 우는 자도 있었다. 누군가는 제발 살려만 달라며 무릎을 꿇으려는 자도 있었다. 너무 몸부림을 심하게 쳐서 병사 셋이 달려들어야 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샘은 눈앞에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여왕님이셨다니. 일단 믿어보자는 마음이었는데.'

그러다 조금 전 자신이 한 행동을 떠올리자니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우선은 일단락된 것 같군요."

"여왕님!"

샘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그건 마을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서 여왕을 찾으며 살려달라고 빌었다.

"이러지 말아요, 일어나요, 어서."

여왕은 손수 사람들을 일으켰다.

"내 눈치 보지 말아요. 여러분은 단 한 번도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여기서 한 말은 모두 지키겠어요. 약속해요."

마을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여왕이 하는 말은 모두 진심이란 걸.

"여왕님, 그럼...."

"결혼 약속도 물론 지킬 거예요. 나와 같이 성으로 가서...."

"아닙니다, 여왕님. 성으로 가지는 않겠습니다."

"샘, 난 약속을 모두 지키기로 했고..."

"결혼을 하든 말든 저 이 마을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저의 목표는 이 마을과 공사 현장의 상황을 여왕님께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몸이 멀어지면 자연히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습니다. 그저 낮은 곳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신하를 한 명 들인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여왕은 잠자코 듣더니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눈길을 돌려 샘 옆의 율메이와 미니를 보았다. 율메이는 아직도 몸을 떨고 있었다. 여왕은 밝게 웃으며

손에서 반지를 빼 율메이의 손에 끼워주었다. 율메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탁이란다, 아까 내게 한 말은 모두 잊어버리려무나. 나도 모두 잊어버렸으니까. 이건 결혼 예물이란다. 네 오빠보다 너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구나. 잘 간수하렴."

율메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여왕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힘껏 끄덕거렸다. 여왕은 율메이의 볼을 쓰다듬고 미니의 손을 붙잡았다.

"초면에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눈이 정말 예쁘네요."

미니도 쑥스러운 얼굴로 조금 웃었다. 여왕은 미니의 손등을 마지막으로 쓸어주고 뒤돌아 기욤에게로 걸어갔다.

"아, 잊고 있었네요. 여러분께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요."

여왕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새미가 있었다. 샘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 얘기가 많을 것 같군요."

여왕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기욤과 함께 성으로 돌아갔다. 그날 여왕이 마지막으로 본 새미의 모습은 샘과 마을 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또, 울고 있었다.

***

성으로 돌아오고 감독관들과 그의 아비된 자들을 처리하느라 쉬지도 못한 채로 며칠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우두머리를 맡았던 자의 가문의 재산을 몰수했다.

덕분에 국고가 두둑해졌다. 당분간은 재정 문제로 신하들과 다툼을 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여왕은 마지막으로 서류를 훑어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으로 다가가니 저녁 하늘이 보였다.

'오늘은 오랜만에 일찍 잠들 수 있겠는걸.'

"오늘은 오랜만에 일찍 잠드실 수 있겠군요, 여왕님."

"아, 기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기욤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내가 그 마을에 간 걸 어떻게 알았나요?"

"여왕님께선 지난 주 내내 신하들과 그 마을, 군대 얘기로 골머리를 앓으셨죠. 그런데 갑자기 두 왕자의 교육으로 교사장과 몇 시간 째 독대를 하시다니, 뭔가 이상했습니다.

게다가 평소 여왕님게선 한 가지 일에 끝까지 매달리시는 분이시잖습니까? 하지만 제가 직접 움직이는 건 위험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죠."

"누구요?"

"맞춰 보시죠. 부군인데도 아무런 의심 받지 않고 성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게 누굴까요?"

"스눅스!"

여왕을 풋 하고 웃으며 답을 말했다.

"맞습니다. 스눅스 대공의 힘을 빌렸죠. 극 저에게 말하길, 교사장실 안에서 대충 이런 대화가 오갔다더군요. 확실히 여왕님이 성 밖에 계신단 걸 알고 있었죠."

 

"아, 그래서 여기는...."

"아아, 그러네요오!"

"아직 말이 다 안 끝...."

"으으음! 멋있어요! 아, 아니, 제 말은..... 그러니까 교사장님이 아니라 서류 봉투가 멋있다고요! 호호..."

 

여왕과 기욤은 한동안 웃었다. 분명 여왕이 왕자 문제로 독대한다고 해서 부군들을 비롯해 다른 교사들도 함부로 문을 얼쩡거리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다니엘은 달랐다.

다른 사람이 얼마나 거들떠보지 않는 것인지! 분명 긴장감을 풀려 헛기침을 한 후, 살금살금 문으로 다가가 대화를 엿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저 대화 내용이란.

"아, 정말!"

"게다가 여왕님 얘기를 꺼내자마자 스눅스 대공의 얼굴이 심하게 빨개져서 다른 사람을 시킬까 생각했지만, 본인이 적극적으로 자원하더군요. 뭐, 결과적으로 정말 잘

해냈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아, 그 새미 라샤드라는 수학 교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오늘 낮에 만났어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뒤여서, 화해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더라고요. 그게 정말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물론이죠."

기욤은 여왕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연한 살구색 드레스는 부드러웠고, 가슴팍에 수놓인 색색의 꽃들은 며칠 밤을 샌 여왕의 얼굴에 생기를 북돋워주었다.

그는 성의 예법을 익혀나가며 여왕을 대하는 태도에 자신감이 붙었다. 특히 이렇게 둘만 있을 때면 여왕도 놀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그 변화가 여왕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신선했다. 기욤은 그녀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어떠한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 크흡.ㅠㅠㅠㅠㅠ 드디어 돌아왔습니다. 여러분ㅇ유유ㅠ유ㅠ유유ㅠㅠ

하아.... 정말 글을 쓰고 싶었어요 ㅠㅠㅠㅠㅠ  갑자기 폭발해가지고 글이 겁나 길어져버렸..... 죄송합니다.

이번 화는 사랑보다는 변화나 여왕의 성장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핑크 모드 기대하신 분들 죄송해여....

다음 번엔 새 멤버로 찾아올게요! 기다려주쎄용! 모르는 거 있으면 댓글로 달아주시면 바로바로 답변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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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자까님ㅜㅜ 오래기다렸어요ㅜㅜ 힝
그동안 문체도 업그레이드 되신것같네요:)
여왕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흑인을 위해 직접 나서서 일을 해결하는 모습이 멋있네요 :)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

7년 전
난슬
으아ㅠㅠㅠㅠ 문체가 업그레이드라니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
이번 주제인 걸크러쉬를 이해하셨군요 후후.... 다음 편도 잘 부탁드립니당

7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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