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럽다고, 당신."
한심하단 눈빛으로 원우가 먼저 말해왔기 때문에. 벌떡 일어나 화라도 내려 했던 남자는 원우의 눈빛에 조용히 자리에 앉음. 경찰은 한숨을 쉬다 다른 경찰에게 남자를 넘겨 더 취조를 하게 하고, 의자를 끌어와 애꿎은 손톱만 괴롭히는 여자애의 앞에 앉음.
"학생."
"......"
"학생 혹시 가출했어요?"
"......"
"하아... 이름이라도 알려주면 안 될까요?"
"......"
"이름이라도 알아야 우리가 학생을 도와줄 수 있어요."
여자애의 입은 굳게 닫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음. 원우는 새삼, 여자애가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들음. 돈에 쪼들렸겠지. 가족에게 시달리 거나.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고.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원우가 무언가를 해줄 수는 없었음. 그냥 나중에 데려다 주기만이라도 하자, 라고 생각하는 순간 경찰서의 문이 열림. 그리고 들어온 사람은 원우의 눈에 매우 낯익었음. 그도 그럴 것이,
"칠봉아!"
"... 문준휘?"
준휘였으니까. 준휘는 입술을 깨물며 다급하게 여자애 앞으로 가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함. 여자애는 무슨 상황인 지 알 턱이 없었음. 그리고 그건 원우 역시 마찬가지였고.
"칠봉아, 오빠가 미안해. 널 혼자 두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저기, 보호자 분 되시나요?"
"보호자까지는 아니지만 칠봉이랑 친한 사이예요. 부모님들끼리도 친하시고요. 칠봉이네 부모님이 길게 출장을 가셔서 저한테 칠봉이를 맡기셨는데, 제가 한 눈을 판 사이에..."
경찰의 말에 주저리주저리 대답을 하다 스스로 감정이 북받쳐올랐는지 여자애를 안으며 훌쩍이는 준휘였음. 원우는 속으로, 저 새끼가 이제 어떡하려고 저러나, 라는 생각을 함. 그런 원우의 생각을 읽었는지 준휘는 원우에게 가 원우의 손을 꽉 붙잡고 말함.
"저희 칠봉이 도와주셔서 진짜, 감사드립니다..."
"아, 아. 네. 뭘요..."
두 손을 꽉 붙드는 준휘에 원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함. 경찰과 대화를 하던 준휘는 이제 가도 괜찮다는 경찰의 말에 칠봉이의 손을 잡고 경찰서를 나감.
원우는 속으로 생각함. 문준휘 쟤는 연기 안 하고 왜 한국 와서 이러는 걸까.
5.
결국 나란히 경찰서에서 나온 세명은 칠봉을 가운데에 두고 말없이 걸었음. 경찰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준휘는 칠봉이의 손을 놓았고 칠봉이는 준휘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함.
"... 감사합니다."
"에이, 뭘."
"... 저기, 이제 그거 주세요. 제가 가지고 갈게요."
칠봉이 말하는 '그거'는 칠봉이의 캐리어였음. 캐리어를 달라는 말을 하면서도 칠봉이는 머릿속이 복잡해짐. 다시 찜질방에 가는 건 무리고, 길거리에서 새벽을 보낼 자신은 없고. 칠봉이는 일단 24시간 카페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함. 그런데 준휘는 칠봉이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듣지 않았는지, 캐리어를 계속 끌고 나감.
"저기... 제 캐리어..."
"가자."
"네?"
"가자고."
"어딜요...?"
"우리집?"
뭐? 당연하단 듯이 말해오는 준휘에 원우는 어이가 없었음. 준휘도 그걸 알고 있는지 원우가 안 된다고 하기 전에 이런저런 말로 원우를 설득시키려 함. 딱 봐도 가출한 애라 집에 들어갈 것 같지 않다, 이렇게 큰 가방 들고 나온 거 보면 작정하고 나온 거다, 여기서 혼자 보내면 쟤 진짜 큰일 난다, 등등. 원우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걱정 하고 있던 부분이었기에 반박을 하지 못함. 야, 그래도. 원우가 입을 열려는 순간, 풀이 죽은 칠봉이의 목소리가 들림.
"... 제 걱정 안 해주셔도 돼요. 이렇게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여기서 더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허리를 숙이며 말해오는 칠봉에 원우는 마음이 조금 흔들렸음. 경찰서에서는 자세히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환한 가로등 밑에서 자세히 보니 칠봉이의 다리는 물론이고 팔 이곳저곳에도 상처가 나 있었음. 그리고 무엇보다 덤덤하게 말하면서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겨우 눈물을 참아내는 칠봉에 원우는 한숨을 쉼.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던 얇은 가디건을 벗어 칠봉이의 어깨에 걸쳐주며 말함.
"가요."
"... 네?"
"가요, 우리집."
6.
원우와 준휘가 사는 곳은 방 두 개에 서재로 쓰고 있는 다락방이 있는 집임. 어차피 남자 둘만 사는 집이라 그리 큰 편은 아니었지만, 칠봉이에게는 무척 크게 느껴졌음.
아, 칠봉이는 가지 않겠다고 극구 거절을 했지만 준휘가 캐리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게 됨.
원우와 준휘는 칠봉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다락방에서 지내게 하는 걸로 결정함. 말이 다락방이지, 칠봉이는 자신의 방보다 큰 다락방에 꽤나 놀람.
"갈아입을 옷 있어요?"
"네, 있어요..."
그 말에 캐리어를 칠봉이에게 주고 다락방으로 올려보냄. 칠봉이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들에 정신이 없어 다락방에서 잠시 멍때리다 정신을 차리고 오늘 하루만 신세를 지겠다고 생각함.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 싶어 캐리어를 열었지만 딱히 편한 옷은 없었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임. 차라리 교복을 입는 게 편하겠다 싶어 캐리어를 닫고 조심히 아래로 내려감. 아래로 내려가자 소파에 앉아있던 준휘와 원우가 동시에 칠봉을 쳐다봄. 그대로 교복을 입고 있는 칠봉에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둘은 마땅한 옷이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음. 원우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을 하다 전에 여동생이 놀러왔을 때 두고 간 옷이 생각나 자리에서 일어남. 편해보이긴 하지만 꽤 비싸보이는 여동생의 옷을 주자 칠봉이는 거절을 했지만 결국 언젠가 꼭 갚겠다고 생각하며 옷을 갈아입음. 다행스럽게도 여동생의 옷은 칠봉이에게 잘 맞았음.
원우는 침구를 다락방에 가져다 놓으며 당분간 여기서 지내면 된다고 말을 함. 칠봉이는 하루만 있을 거란 얘기를 하고 싶지만 그러면 또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임.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을 다 한 원우는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감. 낯선 사람이 제 집에 있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저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와 대화해 본 적이 자신의 저 또래였을 때와 자신의 여동생이 저 또래였을 때 밖에 없었음. 원우는 침대에 누워 안경을 벗고 한쪽 팔로 제 눈을 가림. 어떻게든 되겠지. 원우는 그대로 잠에 빠짐.
7.
이불 위에 드러누운 칠봉이는 생각함.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볼을 쭉 늘어뜨려봄. 아픈 걸 보니 확실히 꿈은 아님. 칠봉이는 그저 바람 빠진 웃음 소리를 냄. 잠은 오지 않고 정신만 놓아질 때 쯤, 똑똑, 하는 소리에 칠봉이는 벌떡 일어남.
"나 올라가도 돼?"
준휘의 목소리였음. 다락방의 특성 상 문이 없다보니 대신 벽을 두드린 거였음. 솔직하게 말해서 칠봉이는 준휘가 무서움. 그도 그럴 것이 초면부터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대질 않나(물론 칠봉이에게 그런 건 아니지만), 경찰서에서 갑자기 들어와 아는 척을 하질 않나. 그래도 칠봉이는 준휘가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걸 느낌. 오셔도 돼요. 칠봉이 대답하자 준휘는 그제야 다락방으로 올라옴.
"안 자고 있었네."
"... 잠이 안 와서요."
"그럴 만도 하지. 잠깐 팔 좀 줄래?"
준휘의 말에 칠봉이는 한껏 경계하며 제 팔을 뒤로 숨김. 그 모습에 준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제 손에 들린 구급상자를 흔들어 보임.
"치료 해야지."
준휘의 말에 칠봉이는 괜한 오해를 했다 싶어 머쓱하게 웃으며 제 팔을 내밈. 준휘는 칠봉이의 옆에 앉아 아이처럼 웃으며 팔을 잡고 조심히 칠봉이의 상처를 치료함. 치료를 하는 내내 혹여 아프기라도 할까 준휘는 연신 말을 걸음.
"그러고보니까 너는 우리 이름도 모르네. 너는 칠봉이 맞지? 김칠봉."
"... 네."
"나는 문준휘야. 아까 안경쓴 애는 전원우."
"......"
"나 사실 중국 사람이다? 한국말 잘 해서 몰랐지?"
처음 질문 빼고는 대답 없이 가끔 고개만 끄덕이는 칠봉임에도 준휘는 꾸준히 말을 걸음. 한쪽 팔을 다 치료하고 반대쪽 팔을 치료하려 할 때, 칠봉이 조용히 입을 열음.
"... 저 왜 데리고 오셨어요?"
준휘는 칠봉이의 말에 즉각적으로 대답하지도, 치료를 멈추지도 않았음. 저 왜 도와주셨어요? 칠봉이 다시 한 번 물어오자 준휘는 칠봉이의 눈을 보며 대답함.
"네가 그렇게 말했는 걸."
"... 네?"
"도와달라고, 제발 좀 도와달라고. 네 눈이 그렇게 말했어."
"......"
"많이 힘들었지."
준휘의 말이 끝나자, 칠봉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 뚝 한 방울씩 떨어짐. 칠봉이 울자 준휘는 당황을 했고, 칠봉이는 펑펑 울기 시작함. 당황한 준휘는 칠봉을 조심스레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줌. 괜찮아, 괜찮아. 자상하게 말해오는 준휘에 마음 속 깊은 구석에 박혀 잊은 채 지내 온 따뜻함이 느껴져 칠봉이는 한참동안이나 준휘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