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죽은 듯이 잠들어있던 칠봉이 일어난 건 다음 날 아침이었음. 멍하니 눈만 뜨고 있던 칠봉이는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봄. 짧은 바늘은 8에 웃돌고 있었고 긴 바늘은 5에 채 미치지 않았음. 여덟시...
"여덟시?!"
칠봉이는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남. 지각이야 어떡하지, 한참동안 굳은 채로 고민을 하던 칠봉이의 머릿속에 '방학' 이라는 글자가 깜빡거림.
"아... 방학..."
그제야 칠봉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다시 누움. 그러다 다시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봄. 자기 방이 아니었음. 칠봉이 여기 어디지? 라고 생각하는 찰나 어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감. 칠봉이는 어제 자신이 집을 나왔고 이러쿵 저러쿵 하다가 원우와 준휘를 만나 하루를 보내게 됐다는 것을 깨달음.
칠봉이는 한숨을 쉬면서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켬. 아무런 연락이 와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칠봉이의 예상과 달리 문자가 와있었음. 엄마 한 통, 아빠 한 통. 우물쭈물거리며 차마 문자 확인을 하지 못하던 칠봉이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겨우 문자를 누름.
두 사람의 말투는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음. 너 같은 년은 키워봤자 소용이 없었다. 잘 됐다. 다시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라. 요약하면 둘 다 이런 내용의 문자였음.
더 이상 스크롤이 내려가지 않자 핸드폰 액정 위로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떨어졌음. 눈물만 뚝뚝 흘리던 칠봉이는 핸드폰을 붙들고 처음으로 목놓아 울기 시작함.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을 그리 했다고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걸까. 칠봉이는 누가 들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저 펑펑 울기만 함.
그리고 칠봉을 깨우러가던 준휘는 계단 밑에서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 있었음.
9.
칠봉이는 한참 울다 퉁퉁 부은 눈을 하고 거실로 내려옴. 주방에서는 앞치마를 두른 원우가 요리를 하고 있었음. 원우가 발소리에 뒤를 돌았는데 눈은 새빨개가지고 얼굴이 눈물 범벅인 칠봉을 보고 매우 당황함. 원우는 새 칫솔과 수건 등을 챙겨서 칠봉을 화장실로 보냄.
거울을 보며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을 하던 칠봉이는 세수를 하는 내내 한숨만 내쉼. 세수를 마친 칠봉이 수건으로 얼굴을 꾹꾹 눌러닦으며 새어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음. 칠봉이 쭈뼛거리며 거실로 나가자 언제 나온 건지 준휘가 식탁에 앉아 죽을 먹고 있었음.
"다 씻었어요?"
"... 네."
"먹어요. 맛은 그럭저럭 괜찮을 거예요."
원우는 죽을 한 가득 담아 식탁에 내려 놓고 칠봉이 앉을 자리의 의자를 빼줌.
"저, 이거 다 못 먹는..."
"남겨도 괜찮아요."
원우는 자신이 먹을 죽을 떠와서 칠봉의 앞에 앉아 죽을 먹기 시작함. 칠봉도 어색한 분위기에 눈치만 보다 이내 수저로 죽을 조금 떠와 깨작거리며 먹기 시작함. 그런데 원우의 죽은, 그럭저럭 괜찮은 정도가 아니였음. 시중에서 파는 죽보다 훨씬 맛있어서 칠봉이는 눈을 깜빡이다 속도를 내서 먹음. 입을 꼭 다물고 볼 안에 담아먹는 모습이 마치 햄스터 같았음. 칠봉이의 앞에 앉아있던 원우와 칠봉이의 옆에 앉아있던 준휘는 자기 밥 먹는 것도 잊고 칠봉을 쳐다봄. 원우는 자기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짓고 있고, 준휘는 칠봉이의 볼을 찔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누르느라 애를 쓰고 있음.
다 못 먹는다고 한 칠봉이는 어디가고 어느새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자 원우는 웃으며 한 그릇을 더 가져다 줌. 입가에 옅게 웃음을 걸치고 입을 오물거리며 먹는 #칠봉을 원우와 준휘는 한참동안 계속 쳐다봄.
10.
밥을 다 먹고 앉아있어도 된다는 원우의 말에도 불구하고 칠봉이는 꿋꿋하게 원우를 도와 뒷정리를 함. 덕분에 빨리 끝난 뒷정리에 원우는 칠봉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줌. 칠봉이 놀란 듯 원우를 올려다보자 원우는 제 행동에 더 놀랐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칠봉을 거실로 데리고 가 소파에 앉음. 원우와 준휘는 의자를 갖고 와 칠봉이의 앞에 앉음. 세 명 모두 의자에 앉자 고요한 침묵이 집 안을 맴돌음. 제일 먼저 침묵을 깬 건 원우였음.
"집에는 언제 들어 갈 예정이에요?"
칠봉이 화장실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동안 준휘와 원우는 칠봉에 대해 이야기를 함. 어쩌다 집을 나오게 된 걸까, 저대로 집 밖에 있도록 놔둬도 괜찮은 걸까 등등. 하지만 준휘는 아침에 들었던 칠봉이의 울음소리에 대해선 얘기 하지 않았음. 그냥 문득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원우의 질문에 칠봉이는 대답없이 자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음. 집 안에는 침묵 대신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가득 채웠고, 말소리는 역시 들리지 않았음. 하지만 원우와 준휘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칠봉을 쳐다봄.
"...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칠봉이는 짤막하게 대답한 후 다락방으로 올라가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내려옴. 갑자기 일어난 칠봉 탓에 둘은 어리둥절해 했지만 다시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켜자 가만히 다음에 칠봉이 할 행동을 기다림. 느릿하면서도 무겁게 핸드폰 액정을 꾹꾹 누르던 칠봉이 원우에게 핸드폰을 건네줌. 원우의 안경에 비친 핸드폰 화면은 칠봉이 부모에게 받았던 문자였음. 그 문자에는 새벽에 왔던 문자도 포함되었지만, 칠봉이 평소에 받아오던 문자도 있었음. 스크롤을 올리며 글을 읽던 원우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버리자 준휘는 핸드폰을 슬쩍 빼와서 무슨 내용인지 확인함. 그리고 준휘도 그대로 표정이 굳음. 자기가 한국에 와서 여태껏 들었던 욕은 욕의 축에도 못 낄 만큼 심한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딸한테 이렇게 할 수 있는 건가. 준휘는 이해할 수가 없었음. 원우와 준휘의 속은 분노와 연민, 미안함과 더불어 알 수 없는 감정들로 뒤섞여 감.
특히 원우는 칠봉이에게 엄청난 미안함이 몰려들었음. 원우는 칠봉이 끽 해봐야 사춘기의 혼란을 버티지 못해 가정에 섞이지 못하고 나왔을 거라 생각했었음. 아니면 잠깐동안의 일탈이라거나. 그런데 칠봉이는, 일탈 따위가 아니였음. 칠봉이는 살기 위해 집을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원우는 생각에 빠짐. 착한데 왜 이런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걸까. 나는 왜 눈치도 없이 이런 말을 해서 상처를 준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진 원우는 깊은 한숨를 쉬고 고개를 숙임.
칠봉이는 표정이 굳어가는 둘을 말없이 보기만 하다 원우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이자 작게 주먹을 쥠. 내가 괜히 좋은 사람들한테 걱정을 심어줬구나. 칠봉이는 애써 괜찮은 척 웃는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함.
"저 이제 가볼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칠봉이 그렇게 말하자 원우와 준휘는 칠봉을 올려다보며 동시에 양 손목을 붙잡음. 사실 그 둘은, 자신들도 모르게 칠봉을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음.
"가게요?"
원우가 물어오자 붙잡힌 손목에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던 칠봉이 고개를 끄덕임.
"갈 곳은 있고?"
이번엔 준휘가 물어오자 칠봉이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고개를 툭 떨굼. 집을 나온 칠봉이 갈 곳이 있을리가 만무했음. 칠봉이 고개를 젓자 준휘는 다시 소파에 칠봉을 앉힘. 사실 원우와 준휘는 칠봉이 화장실에 들어가 있었을 때 대강 얘기를 마무리 지었음. 이 둘의 결론은, '짧은 기간이라도 칠봉을 이 집에서 지내게 하자.' 물론 칠봉이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칠봉이만 괜찮다면 둘은 함께 지낼 의향이 있었음. 소파에 앉은 칠봉이는 말없이 손가락만 만지작거렸고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던 원우가 말을 함.
"... 우리는 칠봉 학생만 괜찮다면 같이 지낼 의향이 있어요."
원우의 말에 칠봉이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원우를 봄. 하긴,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지. 원우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음. 그리고 설명을 해주려 하는 순간, 칠봉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탓에 원우는 입을 다뭄.
"...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일 것 같아요."
"우리가 칠봉 학생한테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의미인지 알아요. 그래서, 그래서 더 무리라고 생각해요. 어제도, 아침에도 이렇게 도와주셨으니까, 더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 했어요. 두 분도, 제가 불편하실테고..."
칠봉이의 말에 원우는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음. 그러니까 칠봉이의 말은, 저 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더 이상 민폐를 끼치기 싫어서 무리라고 하는 거였음. 물론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긴 했지만, 원우도 준휘도 단 한 번도 민폐라 생각하지 않았음. 칠봉이의 말에 얼이 빠진 원우 대신 준휘가 조심스럽게 칠봉이의 손을 잡음.
"하나도 안 불편해. 오히려 나는 여동생 생긴 것 같아서 좋았는 걸."
"... 그렇지만,"
"원우도, 불편하다고 생각 안 해."
"......"
준휘의 말에 칠봉이는 입을 꾹 다물었음. 칠봉도 이 두 사람이 너무나 착한 마음을 가지고 저를 도와주려는 걸 알지만 그러면서도 폐를 끼치는 것 같아 거절했었음. 솔직하게 말해서 칠봉도 이 집에 남아있고 싶단 생각을 함. 하지만 내가 있으면, 그래도, 불편할텐데. 나는, 다른 사람한테 피해만 줄텐데. 내가 있어서, 좋을 사람은, ... 없을텐데. 칠봉이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생각에 잠기자 준휘는 칠봉이의 머리를 쓰다듬음. 칠봉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준휘를 보자 준휘는 활짝 웃으며 칠봉이에게 말함.
"같이 살자, 칠봉아."
네가 우리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준휘의 말에 듣고 있던 원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살며시 입꼬리를 올림. 이 사람들은 내가 뭐라고. 칠봉이는 울컥하는 마음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함. 갑작스런 칠봉이의 울음에 원우와 준휘는 당황하기도 잠시, 이어지는 칠봉이의 말에 다시 웃음을 보임.
"한 달만, 진짜 한 달만, 신세 질게요..."
그래, 그래. 준휘와 원우는 어설프게 칠봉이의 등을 토닥여줌. 이렇게 스물아홉의 준휘와 원우, 열일곱의 칠봉이는 한 지붕 아래에서 동거를 하기 시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