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훈X민석] 요즘 (부제: 누구나 비밀은 있다) 完 - 인스티즈(instiz) 픽션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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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X민석] 요즘 (부제: 누구나 비밀은 있다) 完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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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정.

나는 요즘 크리스가 아닌 그와 정 반대의 성격을 가진 사람을 알아가는 재미에 살고 있다. 세상 물정 알건 다 알면서도 어쩔때는 바보같이 순수한 그 사람. 나보다 어리면서 툭하면 반말을 생활화 하는 철없는 오세훈이라는 정갈한 이름을 가진 너를 보는 재미에.
그 사람을 봤을때 처음엔 그랬다. 놀리고 싶었다. 귀엽다며, 내가 곧 마음에 들거라며 불순물이 가득한 내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짓는 네 반응이 귀여워 그저 놀리고만 싶었다. 나를 알면서도 모른척 하는 처음의 네가 맘에 들지 않았으면서도 언젠가부터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 감정의 표현으로 너를 잔뜩 놀렸지. 눈이 올라가서 나를 노려보는 네가 웃겼다. 그런데, 그런 말들은 나를 그저 어렵고 불편하게만 보는 너에게 가볍게 던진 말이였는데 그게 애정의 시초가 될줄은 전혀 몰랐다.

오세훈의 집에 처음 이사를 하던 그 날. 우연히 그의 방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문을 열어놓은 바람에 나는 끌리듯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출근 하기전 자고 있는 세훈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볼 키스를 했다. 그럼에도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그 얼굴이 진심으로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시간이 지난 후에 무턱대고 그의 방 앞에 서있던 나는 머리에 새집을 잔뜩 지어놓고 일어난 모습을 보여준 그가 좋았다. 내가 있는지도 몰랐었겠지만. 나는 그때 그에게 단순히 내 방으로 오게 만들기 위해, 짐을 옮기는걸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화가 난다는 표정으로 노려봤던 너였다. 그 모습을 갖고 싶었다. 그날 저녁 자꾸만 나에게 답을 구하기에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홧김에 모든게 장난이였다고 거짓말을 하는 내 말에 무슨 이유인지 미친듯이 화를 내고 서툰 솜씨로 나를 농락하던 너를, 조금씩 좋아하기 시작했다. 억지로 나를 원했다면, 다음부터는 네가 진심으로 나를 원하길 바랐다.

그런데 왜? 왜 너는 나에게 화를 낸걸까. 그런 식으로 화낼만큼 너도 모든게 다 진심은 아니였잖아.

오세훈과 만나게 된지 이 주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무작정 크리스에게서 도망쳐 나왔다. 갈 곳 없는 나는 나를 찾아다니던 오세훈과 만났다. 그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질뻔 했다. 내가 뭐라고. 대충 추위만 피할만큼 옷을 걸쳐입고 입김을 한껏 내뱉으며 날 찾아다니던 너에게 내가 대체 뭐라고.
힘겹게 눈물을 참아낸 나는 그에게 안겼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안고 내 등을 토닥였다. 크리스의 손길보다 따뜻했다. 후에, 예고없이 술을 마신 탓에 새벽동안 잠을 자는데에 속이 쓰려 방해가 됐다. 단지 술때문이 아니라는건 얼마 가지 않아 빠르게 알아챘다. 술을 잘 하지 못하는 나는 속이 타들어가 죽을만큼 힘이 들줄 알았는데, 마음이 아픈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다. 나는 이미 그마만큼 충분히 아팠던 모양이였다. 쉽게 감당하지 못하는 도주를 한다던지 하는 일은 처음부터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이미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 짓을 했고, 하고 있는 나로써는 전혀 양심의 가책 따위 느끼지 않는 아주 쉬운 일이였다.

조금 일찍 일어나 오세훈을 위해 음식을 준비할때, 오늘만큼은 크리스를 잊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오세훈과 함께 밖을 나갈때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정말 오늘만큼은 모든걸 다 잊고 세훈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길 원했다. 힘들었으니까. 겉보기에만 나를 행복하게 하는 크리스와 함께 한 2년의 시간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감싸려 애써주는 오세훈을 만난 이 주의 시간이 더 좋았으니까.
잊고있던 크리스의 연락을 받았다. 또 다시 마음이 흔들리려는걸 힘겹게 잡아 세우고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한다.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모든건 없던 일로 하겠다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세훈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때는, 오히려 더 컸다.
나를 힘들게 하지마, 너는 언제까지 나를 네 마음대로 할거야?, 나를 지치게 해, ...아무리 말해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불렀을때 그는 한동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사람이 싫은게 아니였다. 덮쳐온 그 상황이 싫은것 뿐이였다. 그리고, 그리고. 내가 알아채지 못한 다른 무언가가 있었던걸까.

처음엔 피하고만 싶었다. 힘들었던 일상이 스쳐 지나갔다. 감아놓았던 오래된 필름이 누군가에 의해 바닥에 떨어진것처럼 온갖 수만가지 장면이 손을 마주잡고 떠올랐다. 아버지가 회사를 잃었을때보다, 그 흔한 학교조차 다니지 못해 내 자신을 잃어 힘들었던 모진 과거보다, 오히려 나을줄 알았던 크리스를 만난 후에 자연스럽게 일어난 내 마음 아픈 일상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모든게 다 부질 없어졌다. 그렇게 열심히 사랑하고 너에게 모든걸 다 바쳤는데 결국 남는다는게 다 이런거라니. 가장 가까운 너를 떠나야하는 일. 결국 그것 뿐인거라니. 함께한 시간들은 네 한마디로 인해 한순간에 불에 타 재가 되버리는데, 그렇게 되면 내가 너에게 받은 사랑이 다 무슨 소용이야.
부질 없다. 모든게 다 이유를 잃었다. 우린 함께 할 수 없어. 네가 감당하기 힘들거라고 했지만, 사실은 내가 나 자신을 감당하기 힘들다.

끝내자고 말해버렸다. 결국 나는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무어라 말하려는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순간 생각했다. 내가 크리스를 떠나려고 하는건, 단지 내가 말한 '그런 상황' 때문만이였을까.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아니.' 였다.

그가 나에게 함께 하자고 했을때, 나는 모든걸 끝낼 준비를 해야 했다.
가능하지 않은 일이여서. 아주 잠시동안 연애라는 자유를 누렸다 할지라도 그가 모든걸 버리지 않는 이상 그 이상의 일들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아서. 가능할 수 없어서.
그가 모든걸 버리겠다고 했을때 그에게서 진심을 보았다. 믿지 않았을 뿐. 하지만 사실은 모든걸 버려야 하는건 나였어서. 그를 잠시라도 잊은것처럼, 내가 오세훈을 잊었어야 해서. 나는 그게 가능할 수 없어서.

내가 그에게 헤어지자고 한 것은 또 다른 시작이 찾아오고 있음을 알리는 경보음이였다. 그가 나에게 함께 살자고 한건 모든 일의 전초전이였다. 나는 그것을 핑계로 새로운 시작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래야 해서. 그게 너라면, 지금 당장 나와 함께 하고있는 너라면 가능해야 해서. 처음부터 사회적 계약이 아닌 모든 감정이 비밀로 이루어진 사이라면, 그래야 해서.

내 손을 내가 잡았다. 차가운 손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내 손을 잡으면 온기가 전해질까. 지금 내 손을 거칠게 잡고 집 밖을 나서는 너에게 나를 맡기게 되면, 모든게 가능해질까.

네가 뭐라고. 너는 나에게 대체 뭐고, 나는 너에게 대체 어떤 사람인데. 왜 우리는 비밀을 만들어야 하는거야. 내가 뭐라고. 나는 네가 뭐라고 내 애인까지 버리게 만들어. 왜 내가 돌아갈곳을 만들어. 너는 아니라고 하지만 왜 자꾸 비밀을 만들어내. 그 이유가 우리를 위해서라면, 거부할 수 없잖아.

그리고 그 남자의 사정,
마음놓고 좋아할 수 없는 너를 좋아하는 나의 이야기.
끝까지 비밀로 담아두려고 했던 내 마음을 오늘은 조금 보여주면 어떨까 해.

]

요즘
完

w. Shelter

"...어디 가는건데."

차가 미친듯이 흔들린다. 뒷 자석에 있는 김민석은 차가 흔들릴때마다 힘없이 몸을 휘청였다. 그는 영혼없는 질문을 하면서도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눈은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어딜 간다고 해도 너는 그저 따라와야 돼. 네가 가지 말아달라고 해서 멈출거면, 처음부터 마음대로 끌고 오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는 멈추라고 할 생각조차 없어보이지만.
지금 네가 나에게 물어본건 목적지가 아니라 앞으로 휘몰아칠 너의 알 수 없는 미래겠지. 그런 너에게 내가 뭐라고 대답해줘야 되니. 그 미래의 끝에 나라는 사람이 서있으면, 너는 또 다시 거절할래. 그 남자에게 한 것처럼 나도 보란듯이 버릴거니.

"세훈아."

"......."

"...나, 추워."

백미러를 통해 그를 보았다.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옆 좌석에 가지런히 올려져있는 큰 담요를 집어들어 뒤로 건네주었다. 그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고는 무릎 위를 덮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할테니 조용히 히터를 틀어주었다. 그는 곧 풍겨오는 따뜻한 온기에 평온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얼굴로 차 시트에 기대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는 자연스럽게 힘이 빠졌다. 집을 나선 이후부터 내 바지 주머니에는 핸드폰의 진동이 미친듯이 울린다. 끝없이 떨리는 느낌이 무척이나 싫다. 발신지는 보나마나 집이겠지. 하지만, 나와 김민석에게는 당장에 중요하지 않은 오늘 내일을 따질거라면 받지 않겠다. 한 손으로는 운전대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핸드폰의 밧데리를 분리했다. 그리고 옆 좌석으로 던져버렸다.
그러다가도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핸드폰을 주워내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산산조각 나버려도 상관없다. 저 안에는 김민석의 번호도 없으니까, 저 까짓거 어떻게 되도 신경안써.

둔탁한 소리에 김민석이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그는 나를 힘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아버린다. 마음 같아서는 네가 가지고 있는것도 없애버리고 싶어. 아니, 입고 있는 옷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새 옷으로 다시 갈아입히고 싶은데, 그렇다면 가는 길에 예상에도 없던 초상이 날지 모르고 괜히 미친놈 잘못 만났다고 생각할까 싶어서 그렇게 까지는 못하겠다. 이와중에도 내 감정에 솔직한 내가 짜증나고 무서워졌다.

무작정 그를 끌고 나와 도피를 하다보니 어딘지도 모를 고속도로를 타고 있었다. 뒤도 보지 않고 달렸다. 내 앞뒤로 아무런 이방인이 없어질만큼 깊고 넓은 공간으로 진입하는 중이였다. 머리 위에 떠있던 이정표는 한동안 여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구나. 지금 우린 바다로 향하고 있구나. 서울에서 그 곳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저 내가 미친듯이 달렸다는것만 대충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흥분된 감정이 조금 가라앉자 차체의 거친 움직임도 조금 수그러들었다. 안정을 얻기 위한 대화는 굳이 필요 없었다. 그의 숨소리가 곧 나에게 안정을 주는 일이였으니까.
여수에 다다르고 있었다. 얼핏 그가 바다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것 같다. 아까 네 사람이 함께 하는 저녁식사에서도 나중에 다같이 바다에 가자고 했었던 말이 생각나 나는 커브를 돌았다. 나는 밤바다가 깊은 오동도로 향했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두 시가 되어있었다. 고속도로와 변두리를 돌고 돌아 목적지인 오동도에 도착한 나는 바다 위 돌길에 아무렇게나 차를 대놓고 시동을 껐다. 엔진 소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자 죽은듯이 눈을 감고있는 김민석의 숨소리가 자세히 들려왔다. 너는, 평생동안을 그런식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살아왔구나.

이 곳의 별은 서울의 밤 하늘에서보다 더욱 더 밝게 비췄다. 차 안에서는 안보일텐데. 창문을 조금 열었다. 순식간에 들어오는 차가운 밤바람이 코 끝을 스쳤다. 나는 보조서랍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고 운전석에서 나왔다. 얼굴을 강타하는 바람결에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래서, 이제 너에게 뭘 어떻게 해야할까. 네가 우는 모습이 싫어서 무작정 데리고 왔는데, 이제 어떤 말로 너를 위로 해줘야 할까. 네가 물어보는 말에도 대답조차 잘 해주지 않는 나는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을 아프지 않게 달래줄수 있을까.
많이 힘들지, 이제 그런 남자는 잊고 그냥 나한테 와. 네가 좋아했던 그 새끼, 세상에 둘도 없는 진짜 못된 새끼더라. 너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좋아했어.
아무리 말을 끼워맞추고 세상의 모든 언어를 갖다붙이며 생각해봐도 그는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가 좋으면 뭐 할까. 좋아하는 사람을 뭘 어떻게 하질 못하는데.
바닷물이 밀려오고 다시 밀려나가는게 마치 나같았다. 밀어내고, 또 밀고. 그리고 다시 밀려가고. 또 다시 돌아오고, 상처받아서 돌아가고. 너와 나 같네.

차에 몸을 기댄채로 한동안 그렇게 서있었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빠르게 붙인 담뱃불이 바닥에 떨어져 불씨가 여기저기 튀고 있었다. 그러다 차 안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 고개를 돌려 뒷 좌석을 쳐다봤더니, 어느새 눈을 뜬 김민석이 손가락으로 창문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너는..뭘 해도 꼭 그런 애같은 짓만 하지. 아니면 그냥 내눈에는 다 그렇게 보일정도로 벌써 미쳐버린걸까.

"...왜."

"..나갈래."

"나오지마."

"나가게 해줘."

"추우니까 나오지마. 거기서 보기만 해."

"네가 준 담요 따뜻해. 괜찮아."

"........"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직접 문을 열고 자신을 잡아 먹을듯한 큰 담요로 몸을 돌돌 싸맨채로 나오는 김민석이였다. 무섭도록 하얀 얼굴이 내 코 앞에 있다.

"...말 더럽게 안듣지."

"말 잘 들어."

"춥다고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안 추워."

"웃기지마. 안 춥긴."

"..담배 냄새."

"........"

나는 시선을 피하고 곧 바로 물고있던 담배를 한 번 더 빨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알싸한 연기가 이제 겨우 내 폐 속으로 스며드는데, 그의 말 한마디에 나는 물고 있던것을 빼내어 바닥으로 버렸다. 그러자 김민석이 그것을 살살 밟아버린다. 불씨가 마지막으로 두 번 더 튀었다.

"오랜만이다."

"...뭐가."

"바다. 얼마만에 오는 섬 바다인지 모르겠어. 고등학교도 졸업하는둥 마는둥 하고 갔을때가 마지막이였는데."

"........"

"뭐하러 이렇게 멀리 왔어..서울에도 바다는 아니여도 강은 많은데."

"........"

"그래도 예쁘다..."

"........"

"내가 서있는 여기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 빛도 없는데. 예뻐."

그의 머리까지 뒤집어 쓴 담요는 부드럽다. 그가 담요에 얼굴을 부비적거리며 눈은 온통 바다뿐인 앞을 쳐다보았다. 좋아해서 다행이야.
내가 가진 능력으로 바다를 네게 선물하면 너는 웃을수 있을까. 바다를 선물해서 네가 차가운 마음을 닫고 예쁘게 웃을 수만 있다면, 내 모든걸 걸어서라도 바다 안에 네 집을 지어주고도 싶은데. 그렇게 해주지도 못할 나를 왜 사람들은 부러워 하는걸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바다를 선물하기는 커녕 좋아한다는 고백조차 하지 못하는 병신인데.

"예전에, 크리스랑 한강 비슷한 곳에 갔었어."

"........"

아직도 너는 자나깨나 그 사람 생각 뿐인거니. 나는 차가운 공기를 거머쥔 주먹을 세게 쥐었다.

"한창 깊은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크리스한테 전화가 왔어. 보나마나 회사에서 온 전화일테니까 눈치 보지 말고 그냥 받으라고 했어. 어차피 내가 잡아도 크리스는 받았을거지만."

"........"

"근데, 혼자 남겨진게 너무 심심해서 나 혼자 그 근처를 마구 돌아다녔어. 길은 잘 모르는데, 그 꼬불꼬불한 길이 신기해서. 근데 얼마 안가서 후회했어."

"....왜."

"왜 그랬게."

"........"

"바보같이 길을 잃은거 있지. 그래서 나는 생각나는 사람이 크리스밖에 없으니까 당장 전화를 했어. 근데 그 사람은 계속해서 통화중이였어."

"..병신아,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면 되잖아. 왜 가만히 안있어서 일을 벌려?"

"걱정마. 그때 다시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 사람에게로 무사히 돌아갔으니까. 그래서 지금 이렇게 너랑 있는거잖아."

"근데. 그때 이야기를 지금 왜 꺼내는데."

"...그래서 그때, 크리스가 길길이 날뛰었어. 저 구석에서 내가 웅크리고 있으니까 크리스가 와서 엄청 화를 냈어. 왜 말 없이 그렇게 사라지냐고. 얼마나 찾았는지 아냐고 그러더라. 자기는 내 전화가 와도 무시했으면서. 웃기지?"

"........"

"그때 알았어. 사람은, 자기가 필요한건 막상 눈 앞에서 없어져야 찾는다는 걸."

또 있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눈물을 보이면 그 두 배로 울고 싶을 뿐만 아니라, 대신 울어주고 싶어 한다는걸.

"나는 크리스한테 필요한 존재라는걸 알아. 아까도, 그냥 내가 없어서 찾은거야. 습관적으로. 내가 곁에 없으니까 불안해서."

"아니. 그 새끼는 그냥 미친거야."

"어느정도 이해는 하고 있어. 집까지 찾아오고, 면전에 대고 나를 당장에 자르겠다고 말하는건 가장 그 사람 다운 행동이야."

"그 인간 답고 안답고가 어디있어. 그런 미친 짓 하는거 자체가 누가봐도 말도 안되는 일인데."

"........"

"그걸 보고도 가만히 있었어, 넌. 나는 그렇게밖에 행동하지 않는 너도 딱히 마음에 들지않아."

나라는 놈은. 김민석을 옆에 두고 있을때면 단 한번을 입 밖으로 꺼내는 말과 속마음이 일치한적이 없다. 모진 말만 해대는 내 얼굴이 얼마나 미울까. 내 입을 얼마나 틀어막고 싶을까. 나는 단지 네 시야에서 그 놈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건데. 이러려고 데려온게 아닌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아니. 너는 여전히 그 놈을 좋아해서 그런거야."

"........"

"네가 그 새끼를 여전히 좋아하니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겠지."

"........"

"아무것도 못해? 아니.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그런걸 다 떠나서. 너는 그 새끼가 좋으니까. 그 놈이 뭐라고 지껄이든 부정할 수 없었을테니까."

"........"

나는 얼마 전부터 너에게 자꾸만 답을 구하고 있다. 언젠가 너를 처음 만났던 날, 나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답을 구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 중이고.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답을 구하고 있다. 그 남자가 좋아서 그런거라는 내 말에서 너의 부정을 얻고 싶다. 지금 당장, 아니라고 해줘.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해줘.
그리고 그 답을 얻으면 이제 나는 또 얼마나, 어느 정도까지 힘들어질까. 조용히 너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네가 자발적으로 나에게 오게 만들고 싶었는데. 아직도 네가 그 놈을 마음에 품고 있다면,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야할까.

그리고 네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 한다면. 그때는 또 너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아무것도 모르겠어. 내가 뭘 좋아하는지, 좋아해야 하는건지."

"........."

차라리, 그런 대답이 훨씬 나았다. 아프지도 않고, 마음이 이상하지도 않았으니까.

"오래전부터 이런 곳에 오면 불꽃놀이를 먼저 하고 싶었는데..갑작스럽게 온 바람에 아무것도 없이 왔네."

"애도 아니고.."

"........."

"...폭죽, 그런거..차 안에 찾아보면 있을지도 몰라."

"........."

"...찾아줘?"

"..괜찮아."

괜찮은 척 하는게 내 눈에 다 보인다. 아무래도 나는, 내 생각 그 이상으로 너를 많이 좋아하나보다. 그것이 비록 한때라 할지라도.

"어린게..담배나 피고."

"너랑 두 살 차이밖에 안나."

"형이라고 했다가, 반말 했다가. 그런건 아주 네 재미로 살지."

"어. 내 마음이야."

"너 이렇게 술, 담배 하는거 어머님도 아시니."

"...모를걸. 알면 가만히 안 놔뒀겠지. 술이야 그런다 치지만, 이딴거 하는거 알면 아마 나를 반 죽여놨을거야."

"그럼 내가 어머님 대신에 뭐라고 한소리 해줘야 하나. 덩치 때문에 반 죽이진 못할 것 같고.."

"입만 살았네. 이봐, 나도 성인이거든. 쓸데없는데에 신경 쓰지마. 이상한 오지랖도 부리지 말고."

"그럼 나도 하나만 줘봐."

"장난 해? 안돼."

"뭐가 어때서. 네 말로 따지면 나도 성인인데 이상할 거 없잖아."

"미친 소리 하지마. 안돼. 넌."

"너나 이상한 말 지껄이지 마."

"뭐..?"

"줘."

"..기가 막히네. 술에, 담배에. 너 안 그러게 생겨서 왜 그래?"

"요즘 세상에 생긴걸로 판단하는 사람이 있네."

"경치 좋은데 오니까 기분 좀 나아졌어? 자꾸 이상한 말을 해, 아까부터. 끼 부리지마."

"나이 어린 놈한테 끼부려서 뭐 좋을거 있다고."

"....야."

"있지. 세훈아."

"........"

네가 내 이름을 부를때는 마음이 철렁해. 그냥 네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전부 경이로울 만큼 가슴이 뛴다. 대체 왜.

"너는 여기에 나를 왜 데리고 왔어?"

"........"

그런 뻔한 질문에도 나를 한숨 짓게 만들어. 단지 너를 쉬게 하고 싶어서. 쉬어야 했어서. 짐을 덜어주고 싶어서.

"....아무 생각 없었어."

"그래."

"........"

"네가 물었지, 그 사람 여전히 좋아하냐고."

".....근데."

"내가 만약 그렇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할거야."

"........."

듣고 싶지 않아졌다. 그냥, 아무런 생각도 없다고 말해. 나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말해. 죽을만큼 싫을테니까.

"....나 보내줄거니."

요새 보이지 않았던 차갑게 대꾸하는 말투와 모습에 가슴이 세차게 뛰고 심장의 빛이 바래는건 나였다. 지금 그의 모습은 어쩌면 그의 아버지와 함께 첫 대면을 할때의 모습과 비슷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네 세상, 당당해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던 네 눈빛. 그리고 네 숨기고 싶은 속마음. 그 모든걸 한꺼번에 숨기려는 너의 차가운 버릇.
나는, 어이없게도 너의 그런 모습에 반했지.

"내가 만약 너에게,"

"........"

"그렇다 대답하면 어떻게 되는거고,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

"그 사람한테 가서 일을 다시 돌려놓게 하던지, 아니면. 그냥 지금처럼 내 옆에 자연스럽게 서 있던지."

"어떻게 하길 바래."

"....내가 뭘 바라던 그딴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게 신경쓰이는지 해서.. 그래?"

"........"

"아니면, 전혀 관심 없어?"

"........"

"관심도 없고, 나만 보면 그냥 화가 머리 끝까지 나는데. 그냥 아무 생각없이 여기까지 온거야?"

"........"

"말해봐. 듣고싶어."

아무 생각없이 데리고 온게 아니다. 화가 나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너를 그 사람에게서 구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이 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다. 아직까지 네가 잘 모르는것 같아서. 네 생각보다 생각이 많은 나를 잘 몰라주는 것 같아서. 잔인하니까. 나도 너에게 잔인한 존재가 되버리고, 너도 나에게 잔인한 존재가 되버리니까. 나는 이제 처음으로 첫 사랑을 힘겹게 시작하는데, 이미 충분히 하고 있는 사랑에 힘들어 하는 네 모습이 너무도 보기 싫어서. 그 자체가 나에겐 너무나 잔인해서.
하지만 내가 그렇다는 이유를 구구절절히 대봤자, 넌 나를 버릴거잖아. 그렇잖아. 그래야 하잖아.
왜..? 넌 나를 받아줄 이유가 없으니까.

"네 마음이나 추스리고 말해. 나한테 대체 그런건 왜 묻는데."

"네가 물어본 질문에 대답해주고 싶어서."

"이미 알고 있어. 좋아하잖아."

"누가..? 내가, 크리스를?"

"그래. 너가, 그 자식을."

"더 해봐."

"할 말 없어."

"없어?"

"........."

"내가 지금 네 앞에서 없어져도, 할 말 없어?"

"........."

"화도 나지 않고, 찾아다니지도 않을거고. 네 옆에 없어도 상관하지 않을거고."

"........."

"그래?"

"........."

"왜 이런 질문엔 대답을 안해."

"...내가 왜 화가 나야 하는데."

"........"

속이 끓어올랐다. 차에서 내 몸을 뗀 지는 이미 오래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내 시선을 고정시켰다. 밤에 봐도 아름답고, 낮에 봐도 아름다운 네 얼굴은 새벽에도 아름답다. 남자에게 아름답다는 표현을 쓸 줄은 전혀 몰랐는데, 그렇게 불안한 눈빛을 하면서 내 좋지 않은 시선을 꿋꿋히 받아들이는 너는 분명 아름답다.
하얗고 고운 피부에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한 번 깜빡인다. 내가 한 번 가졌던 그 예쁜 입술, 이젠 못 가진다 해도 괜찮아. 보기좋게 빚어진 너의 그 얼굴을 만지지 못한다 해도 괜찮아.

하지만 나를 그런식으로 떠보는 너는 아름답지 않아.

"왜 화가 나야 되냐고 묻잖아."

"........"

"...그럼 네가 원하는 대답은 뭔데."

"........"

"화 나. 미치도록 화가 나. 다시는 못 돌아가게 만들어버리고싶어."

"........"

"...지금 뭐 그런 대답을 원하는거야? 그냥 이럴때는 조용히 바람만 쐬고 머리 먼저 식히면 안돼? 지금 그게 중요해? 지금 네가 당장 처한 위기보다 내 감정따위가 더 중요하다는거야?"

"........"

"아니면, 그럼 내가 널 좋아한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어서 그래? 그래서 지금 자꾸 나를 화나게 만드는거야?"

"........"

"그렇다고 하면 어쩔건데. 내가 그 버러지 같은 새끼한테 너 보내주기 싫다고 하면 어쩔건데."

"........"

"그럼. 안갈거야? 내가 잡는다고 잡으면, 안갈거냐고."

"........"

"그렇게 하지도 않을거면서. 나는 그저 너한테 장난이라면서. 왜."

"........"

"그렇다면서. 다 장난이라고 했잖아. 근데 너는 왜 자꾸, 내 마음을. 왜.."

가슴이 저려왔다. 나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모난 돌 길 위에 주저 앉아 버렸다. 민석아, 내가 너 대신에 마음 아파 해주겠다는데 너는 도대체 가만히 있지를 않아. 왜.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너는, 제발 이런 나를 생각해서라도 가만히 있어. 나는 너에게 그저 생각을 비울 시간을 준 것 뿐이야. 나한테 그런 시덥잖은 질문따위 하지마.
결국 나는 오늘 내 마음을 들킬 거란걸 알아. 하지만 끝내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보고 싶어서 그래. 조금만, 기다려 민석아. 제발.

"김민석."

"........"

"대답해."

"........"

"김민석."

".....그래."

"화 안나. 기분 나쁘지도 않고, 네가 당장 그 놈한테 가겠다고 나한테 매달려도 할 말 없어. 상대는 내가 아니라 그 놈이잖아. 원래, 너네는....너네, 너랑 그 새끼는...내가 나타나기 전에도, 언제나 함께였잖아."

"........"

"....네 옆에 있는건 내가 아니잖아."

"......."

"다 알아. 다 아는데."

"........"

크게 숨을 들이 마셨다. 여전히 차가운 새벽공기는 내 목 안으로 침투했고 손과 발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미칠 것 같다. 심장이 딱 폭발하기 그 직전이다.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다음에 나올 말을 결국 뱉어버리게 되면, 앞으로 너와 내 사이는 보기좋게 갈라질지도 모른다.

"....정말로 싫은건."

그러니까, 나는.

"실은. 너를 보내고 싶지가 않다."

"........"

"그말만은 진심이라고 해두자."

"........"

"....그것뿐이야."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버린걸까. 어쩌자고 나는 너를 여기까지 데려온걸까. 널 이렇게 마음 아프게 할거면, 차라리 혼자 두는게 낫겠다 싶었다. 그리고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내 마음도 들켜버릴거면 차라리 나 혼자 있는게 나을거라 싶었다. 돌아가고 싶다. 내가 원한건 이런게 아니였다.

한동안 파도가 밀려오고 다시 나가는 소리만 반복해서 들려왔다. 김민석은 부드러운 천조각을 몸에 걸친채로 허공만 주시하고 있었고, 나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 나의 어깨를 건들거나 조금이라도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면 나는 끝내 눈물을 보일 것 같았다.
바람은 쌀쌀했고, 우리 둘의 심장도 차가워졌다. 일방적인 사랑이 다 그런거지. 한 명은 장난으로 시작하고, 또 한 명은 그 장난에 의해 애정이 시작되고. 그게 마주치면 이렇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거지. 일방적인게, 다 그런거지.

지금 내 고백을 들은 너는 어때. 내가 많이 싫지. 네가 겪고 있는 첫 번째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나라는 사람이 절대 쉽게 넘겨짚을수 없는 말을 해버려서 아주 많이 싫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오지랖 부리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대신 아플테니까 너는 아무 생각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 말을 어겨서 그래. 나는 최선을 다했고, 많이 좋아한 것 뿐이야.

지금, 내 고백을 들은 너는 어때.

"........."

"담배 하나만 줄래."

몇 분이 흐른 뒤에야 나에게 한다는 그의 말은 의외로 평범했다. 내 머리에 얹은 손이 무던히도 따뜻했다. 차인다 해도 이 손은 놓치고 싶지 않다.

"하나만 해."

나는 품에 있던 담배곽과 라이터를 전부 그에게 줬다. 그는 내 머리에 올려둔 손을 떼고, 내가 준 물건만을 가지고 뒤를 돌아섰다. 놓치고 싶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너는 내가 놓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을 사람이 아니였으니까.

고개를 들어 입을 열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칼칼한 바람에 돌 조각이라도 끼어있는듯, 목을 자꾸만 조여온다. 그가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뱉는 모든 말들이 무섭다. 이런 일에는 단 한 번도 상처 받은적이 없는데.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마지막이 될거면, 그 얼굴 한 번만 마지막으로 제대로 봤으면 한다.

나는 힘들게 몸을 일으켜 난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느새 김민석은 내가 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지 않고 연기를 뱉었다. 바닥을 보며 쓴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너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도 예쁘구나. 손가락에 그런 보기 좋지 않은게 들려있어도, 예뻐보이는구나. 네 취향이 어떻든 나는 상관없다. 기침도 없이 자연스럽게 담배를 펴대는 김민석도 좋고, 남자를 좋아하는 김민석도 좋고, 내가 싫어하는 그 새끼를 좋아하는 김민석이라고 해도, 언제까지나 좋다.

"민석아."

"........"

"그러는 너는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데."

그의 얼굴을 보는데에 방해되는 어느새 길어진 내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이제는 막 던지는 내 말을 듣고 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너를 절대로 쉬운 남자로 보는게 아니다.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해.

"보내줄까..?"

"........"

"크리스한테...그 사람한테 너 보내줘?"

"........"

"내가 너 억지로 잡아두는것보다, 네 발로 그냥 그 놈한테 가는게 좋겠어..?"

"........"

난 이제 지쳐. 네 대답이 듣고 싶어.

"아니."

그가 필터를 한 번 더 물었다. 그 와중에도 내 얼굴을 피해 바닥에만 연기를 뱉는 그 모습이 예뻤다. 그리고 담배를 끼워둔 손을 들어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머리를 스쳤던 그 손이 맞는지, 아직도 믿겨지지 않아.

그리고 아니라고 답하는 너의 그 말은 더욱 더 믿기지 않는다.
지금,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는거야?

"........"

"나, 아프지 않아."

"........"

"왜 너는, 너라는 사람이 날 아프게 할거라고 생각해."

아프지 않다는 말에 나는 눈물을 쏟아낼것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해. 조금은 의외의 질문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널 아프게 한다는 사실은, 누가봐도 당연하잖아. 왜 내 생각과 다른 말들을 꺼내.

왜 보내지 말라는 말을 해. 진심 아니잖아.

"지금 네가 힘들어하니까. 그 남자 때문에 앞으로 더 힘들어질거니까. 그리고 그 안에 나라는 사람이 나타나면, 넌 지금보다 더 혼란스러울거니까."

"혼란은 이미 다 겪었어."

"........"

"더 겪을 일도 없어. 그리고 내가 너와 같다고 하면 나를 욕 할거니."

"........"

"막..미쳤다고 할래?"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려오지 않는다. 그는, 김민석은. 미친게 분명하다. 김민석이 그럴리가 없다.

"...장난이라고 할거면 집어 치워."

"........"

"내가 안쓰러워? 그렇다면 그 생각하지 마. 나는 괜찮아."

"그런거 다 빼고 남는것만 대답한거야."

"아니. 넌 내가 안쓰러워서 그래. 내 마음 잘 알았으니까, 마지막으로 위로해준답시고 하는 말이겠지. 넌."

"너는 남부럽지 않은 귀한 자식이야. 내가 널 안쓰럽다고 생각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

"하나만, 알려줄게."

"........"

"듣고 판단해."

"........"

"나는, 처음 너를 본 순간부터 너한테 했던 행동들 중에, 조금이라도 장난 섞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뭐?"

내 귀가 언제부터 이렇게 듣고 싶은 말만 들었지. 지금 내가 듣고 싶었던 말들 투성이잖아. 그런데 그가 그런말을 할 리가 없어. 그럴리가 없다. 모든게 다 장난이였다면서. 어린 애 보듯 날 다루던 너는 언제 이렇게 나에게 눈을 맞춘건데. 이제 그만 내 장단에 맞춰서 놀리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지금껏 보지 못한 진심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확고한 그의 표정에 여태껏 참아온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모든게 스쳐 지나간다. 이유 없이 내 입술을 가져간 너. 그걸 시작으로 너라는 사람을 제대로 각인 시킨 똑똑한 김민석. 그 모든게 장난이 아니면, 뭐가 남는거지.

"눈치 없는 네 잘못이야."

".....김민석."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더라. 장난이였다는 말에, 너는 미친듯이 화내더라."

"........"

"그때 알았어. 너도 얼핏 나와 같다는거."

".....민석아."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그렇게까지 화 안내. 그렇게 나를 잡아먹을 듯이 행동 안 해. 좋아하지 않으면, 관심 없으면. 지금 내가 없어져도 상관 없어. 처음부터 나를 데리고 오지도 않았어. 그리고,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겠지."

"........"

"알고 싶어. 너, 그래?"

"......."

"지금 네가...나한테 그래?"

....그래.

지금 내가, 그래.

"울지 마."

"........"

"내가 너무 늦게 물어본거야?"

"........"

"아니면, 네가 너무 늦게 알아차린거야?"

"........"

"나, 길 잘 잃어버리거든."

"........"

"어쩌면 너보다 더 뱅뱅 돌 수도 있어. 그런데 너도 내가 길을 잃으면, 나중에서야 나를 찾을래..?"

"........"

"아니면 내가 네 옆에 있을때 처음부터 길 잃지 않게 도와줄래."

숨이 가빠왔다. 지금 내가 확실히 숨을 쉬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실재하고 있는 사람인건지, 아니면 나를 농락하기 위해 세상에 버려진 천사인건지. 전혀, 조금도 구분이 가지 않는다.
나는 단 한 번도 김민석을 가질수 있을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가질 틈도 없었다. 크리스에게 이별을 고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이미 헤어짐을 겪어야 했으니까. 평생 나만 아는 비밀로 묻어두려고 했으니까. 그렇게 되면 그는 몰라야 하는게 정상이였으니까.

그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을 사시나무 떨듯 말했다.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 하는 척 하지만, 내 눈엔 이제서야 모든게 보이기 시작했다. 너도 힘들었던거지. 이제는 왜 하필 나인지, 왜 나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물어보기도 무서워졌다. 또 다시 장난이라고 할까봐. 나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심어준 그때 그 기억이 다시 되살아날까봐. 김민석은 곧 나에게 자신의 길을 알려달라며 하얀 손을 흔들었다. 아직도 그의 따뜻한 손은 내 얼굴을 잡고 있었고, 나는 점점 그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는다. 너의 차가운 향수가 아직도 이렇게 남아있는데, 그 향. 이제는 이렇게 내 마음대로 묻어가도 되는거니.

"내가 말했지. 평범하고, 평범하지 않고의 선을 긋는건 한 순간이라고."

"........"

"네 눈에 보이는 나는 어때."

"........"

"이제, 내가 조금 어때보여."

".....너는."

"........"

"너는 아름답고.."

"........"

"너...김민석은.."

"........"

여자도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 어디에도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나를 미치게 하는, 너.

".....세상 그 누구보다 평범한 사람이였어."

홀린듯이 그에게 다가갔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풀어냈다. 그리고 내가 다시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마주 잡았다. 이미 두 손을 올리기도 전에 내 큰 한 손에 다 들어오는 너의 얼굴이, 내 시야가 뿌옇게 됨으로 인해 처음으로 흐려 보였다. 네 얼굴을 흐리게 볼 시간조차 없어. 짙은 눈썹부터 입술 끝에 달린 입꼬리까지 모든걸 내 눈 안에 담아내야 했다.

그래. 나는 처음부터 누구는 평범하고 또 누구는 평범하지 않다는걸 가릴 자격이 없었다. 내 가슴을 진정으로 뛰게 하는 사람을 여태껏 만나보지 못해서 그런거였다. 앞으로 내 전부를 다 바칠 사람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너를 좋아해도 되는지도 몰랐으면서.

"..내 눈에 보이는 오세훈도."

"........"

"평범해. 아주 많이."

"........"

"알겠지. 너와 나는 같아."

".....김민석,"

"나도 네가 곁에 있다면, 가고 싶지 않아. 그 사람한테."

"........"

"이게 내 대답이야."

"........"

"...그러니까 보내지 마."

세상에는, 믿어야 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있고.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있다. 나는 전자에 속해 있었고, 나를 그렇게 만든 그 사람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끝으로 김민석을 한참이나 끌어안고 놓아주지 못했다. 놔주면, 꿈에서 깨어날 것 같았다. 꿈이 아니라는걸 알면서도, 너라는 꿈에서 금방이라도 깨어날 것 같았다.

그래. 너는 네 말대로 평범한 남자였다. 그리고 나도, 기존의 알던 나였다.
달라지는건 뭐가 있을까.
달라지는건 없었다.

"안 보내."

오늘은 내가 가족에게서 도망쳐왔다면, 앞으로는 너와 내가 합쳐진 미래에게서 도망칠거야. 물론 네 손을 잡고.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거야."

그가 나에게 물었다. 이젠, 너를 내 비밀이라고 하지 않아도 되는건지. 너의 아버지와 우리 엄마. 그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되는건지. 나 또한 너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길 바래."

"......."

"행복해져야지."

"........"

"......너, 행복해져야 돼."

"........"

"..나도."

이제야 조금 알게된 너의 마음. 그리고 확실히 전달된 내 마음을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

"........"

"....행복해지자."

행복해지면, 그 어떤 일이 닥쳐와도 너와 난 살아갈 수 있어.

나는 한동안 껴안고 있던 그의 차가운 몸을 끌어 안고 있다가 곧 차 안으로 들여보냈다. 나와 그가 짧지 않은 시간동안 앓았던 뜨거운 열병은 아주 순식간에 해결됐다. 해열제는 각자의 눈 앞에 있었다. 나는 이제 그의 차가운 몸을 녹여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으로 더럽혀진 몸이든 마음이든, 내가 다 바꿔놓고 싶었다.
그를 뒤따라 같은 좌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김민석이 들고있던 담배는 이미 울긋불긋한 돌 길 위에 떨어진지 오래였고, 김민석은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덮고 있던 큰 담요를 벗어 차의 바닥으로 흘려보냈다. 그 후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의 옷을 벗기에 나는 그 손을 저지시켰다.

"아직 추워. 얼어 죽으려고 그래?"

"....키스 하고 싶어."

"......."

"너한테 주고 싶어."

"......."

"..안돼?"

나는 여전히 여우같은 그의 얼굴을 보고 드디어 활짝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나의 목에 작은 두 손을 감아왔다. 그의 입안을 감도는 쓰라린 담배 연기를 모조리 받아들여야 했다. 오늘은 너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 이루고 싶은건 다 이뤘어. 오늘만큼은 너를 최대한 지켜주는 방향으로 선택했다.

가벼운 몸으로 어느새 내 허벅지 위로 올라온 그가 열심히 나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서로의 마음을 몰랐던 때와, 인정으로 모든게 이루어진 지금은 틀림없이 달랐다. 맞춰오는 입술이 더욱 더 뜨거웠다.
한참을 서로의 입술을 가지고 마음을 전하다가, 결국 어느 한 사람이 먼저 눈물을 흘렸다. 나는 김민석의 볼에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끼게 되었고, 곧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두 손으로 다시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입술을 뗀 채로 작은 코 끝에 제 이마를 대었다. 너는...얼마나 많이 힘들었니. 처음 시작하는 나도 이렇게 많이 힘든데.

"울지 마."

"........"

"..왜 울어."

"........"

"집에 돌아가면, 뭐라고 말해야 될지 걱정돼?"

"........"

"사실 나도 겁나. 나도 무서워."

"........"

"괜찮아. 울지 마. 내가 약속했잖아. 길 잃기 전에 내가 옆에서 잡아주기로 했잖아."

"........"

"나 믿으면, 울지 마."

"..믿어."

"........"

"좋아서 그래.. 좋아서."

길을 잃게 할 수 없다. 결국, 네 발로 나에게 오게 된 너를 절대로 놓아줄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잠시동안 주어진 행운의 시간이라고 해도, 나는 어떻게든 그 시간을 멈출거니까.
세상이라는 바람에 휩쓸려 다니던 서로를 조금 더 따뜻하게 해줘야 해서. 녹여줘야 해서. 그게 내가 아니면 안되고, 네가 아니면 안되서.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이 채워줬다면, 이제는 그게 내가 되어야만 해서.

앞으로도 너는, 영원히 내 비밀이자 마지막 진실로 남아줘야 해서.

그를 품에 안겨놓고 다독여주는 동안에, 나는 그에게서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그의 과거. 그리고 생활. 어떻게 하다가 크리스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는지. 왜 나의 어머니와 김민석의 아버지가 그를 알고 또 서로를 만나게 되었는지. 그 모든건 크리스라는 남자의 손에서 시작이 되었더라는 우연을 가장한 만남들.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선물해준 너의 기억들. 나는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말 없이 숨소리로 답했다.
크리스를 만나면서 힘들었던 일은, 길게 보면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잘 해주고, 사랑 받았고, 원하는게 있으면 어렵지 않게 받았고. 하지만 그가 원하는 개념의 사랑은 받아본적 없다고 했다. 그래놓고서 '내 욕심이였지.' 하고 중얼거리는 그 입술이 미워져서 입술을 맞댔다. 그제서야 그는 나를 보고 웃었다.

그가 김민석에게 무리한 요구 아닌 요구를 했을때는, 정말로 힘들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마음이 약한 남자다. 사랑을 엉뚱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맞춰주려는 그런 남자. 나는 왜 그런 너를 몰랐을까.
조금 더 극적으로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그 안에 너를 다 파악해야 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참고있던 눈물을 쏟아냈던 그는 곧 지쳐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해가 떠오르는것까지 보고 나서야 눈을 잠시 감을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완벽한 아침이 되자 주위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 곳에 오는 길에 핸드폰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연락망이 없어 자고있는 김민석의 핸드폰을 가져가 차 밖으로 나섰다.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기에 쉽게 가져올수 있었다.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어머님' 으로 저장되어있는 가지런한 이름이 뜬다.

통화연결음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민석아. 민석이니?

"..엄마. 저 세훈이에요."

많이 찾았겠지. 김민석을. 나를.

- 오세훈. 너...! 너 지금, 지금 어디니!!

"죄송해요. 엄마. 걱정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저 잘 있어요."

- 너 지금 어디에 있는거니..! 너희들 나를 미치게 하려고 아주 작정했니? 갑자기 말도 없이 어딜 간거야!! 너지금 어디 근방이야. 당장 쫓아가기 전에 말해.

"진정하세요. 죄송해요. 그래야 할 상황이 있었어요. 저랑 김민석....아니, 민석이형 아무 일 없어요."

- 네가 드디어 정신을 놓았나보구나. 응? 네 휴대폰은 어디에 두고 민석이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는거니. 그 애랑 같이 있는건 확실하구나. 혹시 여자랑 같이 있어? 아니, 됐다. 민석이는 어디에 있니. 지금 민석이 아버지가 많이 찾고 있다. 물론 나도 그렇고. 민석이 어디 있는지 당장 말해.

"엄마."

- 뜸들이지 말고 단 번에 말하렴. 옆에 있니? 바꿔.

"...엄마."

- 왜. 왜 그러니. 왜..! 너는 엄마를 이렇게 걱정하게 해놓고 어떻게 이제와서 연락을 할 수가 있어!!

"엄마. 미안해요."

- ...그 말은 얼굴 보고 얘기 하도록 하자. 이제라도 연락 닿았으니 일단, 일단은 됐어. 그러니까 김민석, 민석이 바꾸렴.

"왜 민석이형만 찾으세요. 어떻게 하시게요. 김민석 형, 바꿔드리면 뭐라고 하시려구요."

- 뭐라고 하지는 못해도 직접 이야기는 들어야겠다. 너도 봤잖니.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거라 생각해. 너희가 떠난 후에 크리스가 한참이나 집 안을 망가뜨려놓고 갔거든.

"......."

-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

".......네."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크리스. 넌 뭔데 남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가. 서울에 가면 반갑지 않은 너부터 만나야겠어.

- 엄마도, 민석이 아버지도 많은 충격을 받았어. 세상에 그게..내 아들에게, 아니. 내 아들 될 사람한테 일어날 줄이야.

"어제까지는 분명 아들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엄마, 지금 설마 하루 아침에 말 바꾸시는거에요?"

- 너라면 충격받지 않겠니? 그래. 너는 알고 있었어? 알면서도 나한테 말하지 않은거야?

얼마 전 그를 처음 만나고 같은 차를 타고 엄마와 내가 집으로 향할때, 그때 진작에 물어봤었잖아요. 김민석에 대해. 하지만 엄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죠. 바로 잠에 들었으니까요.

-그래. 그러고보니 어제 네가 데리고 가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어. 미친거지, 미친거야. 세상이 말세야. 모든게 말세라고..!

알아요. 세상 다 끝나가기 전에 잠시 미쳐보는거죠.

"뭐가 문제라는걸 말하고 싶으신거에요."

- ..몰라서 묻는거니?

"세상에 그런 사람은 많아요, 엄마."

- 시끄러워. 너 지금 당장 민석이 바꾸지 않으면 내가 바로 그쪽으로 찾아갈줄 알아.

"엄마. 엄마가 원하지 않아도 엄마의 가장 가까운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어요."

- 무서운 소리 하지 말렴. 넌 아니잖니. 일단 엄마는, 너만. 너만 안그러면 된다.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보기 좋게 어머니에게 비밀을 만든 꼴이 되버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돌이킬수 없는걸 어떻게 해.
엄마, 미안해요. 한참 늦었어요.

"저, 연락 드린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말씀 드리고 싶은게 있어요."

- 그건 이따가 얼굴 보고 하면 안되겠니? 지금 무척이나 답답하니까, 제발 민석이 그 아이를 좀 바꿔주렴. 자고 있는거니?

"네. 너무 곤히 자서 못깨우겠거든요."

- .....

"그런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닐걸요."

- ..뭐가 문제니, 그럼.

"엄마와 제 사이의 오랜 갈등을 풀어볼까 해요."

- 그게 무슨..

".....건물 주세요. 엄마. 저한테요."

- ......뭐?

"명품관이요. 엄마가 가지고 있는 그 건물, 지금 저한테 달라구요."

- ....얘가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너 간밤에 뭐 잘못 먹었니? 독을 마셨어? 왜 그러는거니 갑자기.

"주세요. 주고 싶어하셨잖아요. 당장이라도 받으라면 받을게요."

- ...이게. 이게 무슨일이야, 세상에..!

"...그래야 할 이유가 생겼거든요. 어차피 서른 살에 물려 받기로 한거, 조금 더 일찍 받죠."

주고 싶다. 내가 가진 모든걸. 바다든, 바다를 여행 할 수 있는 차든. 내가 해줄수 있는건 다 해주고 싶다.
독 마셨지. 김민석이 어마어마한 독이였다. 해독도 되고. 그냥 독이야. 이제 없으면 안돼.

- .....일단 서울로 오면 나를 먼저 만나는걸로 하자. 네가 어떤 이유로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겪게 된건지, 좀 자세히 듣고 싶구나. 왜 이렇게 일이 한꺼번에...!

"솔깃하신가봐요."

- 정신이 없구나, 정신이 없어..!

"대신에 조건이 있어요."

- 그건 또 무슨 소리니..!!!

"그 건물 받는 대신에.. 김민석한테는 단 한마디도 하지 마세요. 약속 하실거죠."

- ...세훈아. 그건 또 무슨.. 오세훈. 너 지금 엄마랑 끝까지 장난 하겠다는거야!?

"장난...엄마. 나 그 말 질려요. 그 단어는 앞으로 삼가좀 해주시고요. 저 장난 아니고 진심이니까 계약서 좀 미리 카피해주세요. 급합니다."

- 엄마를 뭘로 보고 그러는건지는 모르겠다만, 어차피 건물은 약속 되어있는거니 상관은 없다. 그건 네가 말아먹든 살리든 상관없어. 하지만 민석이에 대한 그 약속은 못 지킨다. 아니. 약속 못해. 안한거야.

"엄마. 지금 민석이 형 일이 중요한가요, 제가 중요한가요. 아니면 그 건물이 중요한가요."

- 말이라고 하니 그걸. 세훈아. 너 아침부터 왜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엄마는 지금 정신이 너무 알딸딸해. 어제부터 정리가 되지 않아. 제발, 세훈아. 엄마에게 이러지 말아주렴. 엄마를 좀 봐. 그렇게 네가 하고 싶은 말만 댕강 말하지 말고 적절한 이유를 말해. 조금의 핑계라도 대고 납득이 갈만한 이야기를 해줘..!

"약속하세요. 그러니까. 김민석 내쫓지도 않고, 아무것도 캐묻지 않기로. 그럼 다 해결 됩니다. 아, 그리고."

- .......

"다시는 엄마도, 김민석 아버지도 두 분 다 크리스 만나지 않는 조건으로 해요. 그럼 나 영구적으로 그 건물 받을게요."

-.....오세훈.

"김민석, 그 더럽고 치사한 회사에서 잘렸으니까 내 명품관으로 들어오게 할겁니다. 항상 내 옆에 있게 만들거에요."

- .......

"..침묵은 동의의 표시로. 지금 오케이 한걸로 알아 들을게요. 괜찮죠."

- 오세훈.

"네."

- 너, 왜 그렇게 갑자기 그 아이를 챙기니. 불쌍하기라도 한거야? 내가 언제 그 아이를 쫓는다고 했니, 뭘 한다고 했니.

"글쎄요. 형제는 다들 원래 이렇게 서로를 챙기지 않나요."

김민석은 내 비밀이니까. 그걸 말하면, 비밀이 어떻게 지켜져.

- 단순히, 형제라서 그런거 맞지.

"........."

- 너 혹시.

"........."

- ...민석이랑, 그런...사이는 아닌거지.

웃음이 나왔다. 해가 아름답게 뜨고 있다. 언제쯤 저런 눈부신 미래를 너와 함께 할 수 있을지.
아마도 곧 함께 할 수 있을거야.

".......이만 끊겠습니다."

침묵은, 동의의 표시로.

예고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몰라도 강단없던 내 인생 안에서 언젠가는 만나야 했던 사람이 있다.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꾸밈없이 말하자면 그 사람은 남자다. 그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그 누구보다 매혹적인 눈매를 가졌고, 나의 시선을 멈추게 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와 마주하게 된지는 이제 열흘이 지났으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거라곤 그의 나이와 성별 뿐이다. 최근에 느낀게 있다면 그는 내가 알아온 시간에 비해 자꾸만 눈에 밟힌다는 것이다. 기존에 알고있는 그 이상의 것들이 궁금해진다. 신기한게 있다면 가끔 그와 대화를 할때면 생각지도 못한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고고하게 생겨서는 그 흔한 고결한척이란게 없다. 조만간 내 눈에 비쳤던 그는 그렇다.

그런 나의 시선을 순수하게 받아내고 있는 그는 아직까지 이 사실을 모르는듯 했다. 나는 늘 부정했고, 가만히 보고 있자면 나를 허물없이 대하는게 보이니까. 만들어진 관계란 다 그런것이라 느꼈다. 만들어진 관계라 함은, 그와 나는 누군가로 인해 강제로 맺어진 사이라는 뜻이다.

다른건 다 괜찮다. 이제부터 천천히 알아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 불편한 사실이 있다면 그에게는 남들과 다른 강한 취미가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이미 나라는 사람을 만나기전부터 또 다른 운명을 손에 쥐고 있다는거다. 오직 그것만이 나를 민감하게 만든다. 쉽게 말해 그에게는 오래된 남자애인이 있었고, 나 또한 그를 따라 강한 취미가 생길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애인이 있기에 아직 그의 마음에는 내가 들어갈 공간이 아직 없을것이다. 나는 이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여자를 좋아했고, 친한 동성친구들과 함께 술문화도 즐기는 평범한 남자였다. 겉보기에 그저 평범했던 그런 나를 이렇게 만든 그는, 정말로 내 속내를 아직까지 모르는듯 했다. 잔인하기도 하지. 여러모로 불편한 이유로 나는 아직 그에게 자신있게 다가갈수 없다. 그래서 나는 문 하나를 두고 매일 밤 깊게 고민한다.
너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어떻게 다가가야 조심스럽게 그에게서 너를 빼내올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단순한 틀안에 갇힌 우리의 관계를 다시는 쉽게 붙일수 없을만큼 깨뜨릴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가끔 눈이 마주칠때면 내 하나뿐인 심장이 멈추기 바로 직전까지 만들어주는 너에게, 나는 딱 한가지 해주고싶은 말이 있다. 너는 모를거다. 나는 너를 볼때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좋아하는 감정이 자라난 내 마음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게 이름을 부르지만, 나도 모르게 네 영혼을 건들고 싶을때면 나는 너의 뒷모습에 대고 '내 비밀'이라 칭한다는것을.

그리고 오늘, 나만 지니고 있던 나만의 비밀이, 그리고 너만 지니고 있던 너만의 아름다운 비밀이 비로소 풀렸다.
끝없이 헤메이다 서로 마주하게 된 입술이 모든걸 말해주고 있었다. 우리 인생의 비밀이란, 이유 있는 아름다움에서 비롯되어 태어난 둘도 없는 진실 그 이상의 것이라는걸.

요즘, 누구나 비밀은 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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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 이든 / 너구리 / 치즈스틱 / 연 / 두부 / 텐더 / 히융융 / 초코푸딩 / 모카 / 노란색연필 / 변골반 / 낑깡 / 낫닝겐 / 핫바 / 조무래기 / 홍홍아직도랩을한다 / 올빼미 / 망고주스 님♡

드디어~ 이상하게 흘러온 단편이 완결났습니다~ 짝,짝,짝..

아..후련..

모두 다같이 함께 달려와주셔서 감사해요!!!!

글을 쓰다보니 밤을 샜네요;; 22시부터인가 썼던거 같은데 (!?) ㅋㅋㅋ중간에 딴짓 좀 많이 했지만..

음. 나름 제 마인드가 담긴 단편을 또 하나 완성하게 되서 기쁩니다.

일단 슬픔의 대상이 된 민석 세훈 미안...사랑해..S2 세민행쇼..

이전 편에서 극찬으로 댓글 달아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뛰어난 글솜씨를 가진것도 아니고, 뒤죽박죽인 내용에 그닥 재미도 없고 반전도 없는데 엄청난 폭풍 칭찬을 해주셔서 엄마미소 띄우면서 봤어요...

저는 제 글 재밌다고 해주시고 포인트까지 내주시면서 읽어주신 분들이 계신다는것 만으로도 만족해요. 저는 제가 글 쓰면서 인생에 대해 배웁니다.. (..?)

이 감동을 모두에게 전달해드리고 싶네요~♥

결국 우리 세민은 ..해피엔딩 한걸로..^^

제 12병원 드디어 연재합니다. 다시 ㅜ_ㅜ흡..

여러분, 정말정말 사랑해요. 이번 단편에서는 특별히 답글을 달아드리지 못했지만, 그 어떤 말보다

사랑한다는 말 하나로 표현해드리고 싶네요. 이게 전부에요. 흑. 나 어떡해 구해줘 빨리 허니ㅠㅠㅠ

그럼, 정말 마지막으로 감사드리구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사랑합니다 ^^~~

+) 저번만큼 스압 들고 오지 못해서 죄송해요..하하하..ㅜㅜ

+) 암호닉 생존신고도 나중에 한번씩 부탁드려요 ㅎㅎ 공지를 따로 올려야되겠지만..ㅎㅎ 감사합니다!

+) 저 위에.. 글 맨 상단에 있는 것들은 별을 표현해봤어요 - -) 제가 회사에서 메신저하면서 저런걸 많이 해서..왠지 글에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ㅇ..

제가 생각한 세훈이, 민석이 이미지랄까요~ 나머지는 여러분 상상에..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