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 아니면 안녕. 우리는 그런 짧은 인사를 건넬 사이도 아니었다. 마지막일 기회를 나는 또 놓쳤다. 아니, 놓아 버린 게 맞겠지. 내게 남은 너의 무언가라곤 아직도 코 끝을 간질이는 그 눈빛 밖엔 없을 텐데. " 와- 고딩도 끝이야 끝. 우리 사진 얼른 찍고 선생님들 보러 가자. 마지막이잖아. " 네가 아니어도 오늘이 마지막인 것은 많았다. 이 교정이 그랬고, 교복이 그랬고, 바쁘다며 못 만날 지도 모를 친구들도 그랬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데 있어, 너는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걸 나는 잘 알았다. " ...저기 정재현 있다. " 하필 혼자 있는 모습이었다. 누굴 기다리는 걸까, 아닌 척 조용히 하라며 옆에 선 친구의 손을 세게 그러쥐었다. 그리고 가능한 빠르게 그 앞을 지나쳤다.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차마 내리누르지 못한 어리석음에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고 그 곳엔- 나를 바라보는 정재현이 있었다. 나는 요동치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바삐 걸어가면서도 신경쓰이는 것은 아직도 네가 나를 보고 있을까 하는 것. 그리고 걱정되는 것은 내가 착각에 빠져 이 마음을 접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 겨우 모퉁이에 도착하고 나는 친구의 손을 스르르 놓은 채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뒤를 돌아봤다. 제발, 제발- 벽에 기대 고개를 푹 숙인 네가 보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빌었던 그 제발의 의미는 대체 뭐였을까.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주제 넘은 행동인지도 몰랐다. 아니 주제 넘은 행동이 맞았다. 하지만, 바보같게도 기대는 욕심만큼이나 쉽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이어서, 나는 또- " ... " " 너 울어? " 울어버리고 말았다. " 형, 저 이거 줄 수 있을까요. " " 뭐, 편지? " " ...네. " " 걔 줄 거지? 아니 21세기에 이게 무슨 아날로그 감성이야- " 꽃다발을 든 동영이 피식 웃었다. " 그래도 다 컸네- 하기사 좋아하는 여자애 있다고 했을 때 부터 알아봤다. " " 형,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저 이제 오늘 아니면... " 재현은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 말을 마음 속으로 천천히 읊었다. 그 애 볼 수 있는 날이 없어요. 재현은 손에 들린 편지를 내려다봤다. " 태용이 형 왜 안 오지, 태일이 형하고 텐도 온다고 했는데. 나 잠깐 전화 좀 하고 온다? " 동영이 나간 후, 주위를 둘러보던 재현의 시선은 곧 한 곳에 멈췄다. 왔다, 김시민. 재현이 아닌 척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 저기 쟤잖아. " 그리고 절친한 친구가 다가와 그렇게 물었을 때, 재현은 하마터면 울 뻔 했다. 그렇게 모두가 아는 내 마음인데, 너만 모를 건 뭐야. 친구는 알 만 하다는 듯 재현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쳤다. " 그래도 말하지, 앞으로 너네 만나지도 못 해. " 그 서글픈 말과 서글픈 순간에도 너네 라는 호칭 아래 묶여 있다는 게 너무 좋아서, 재현은 미소를 지었다. " 이유라도 묻자, 왜 망설이는데? 우리 형도 졸업할 때 다 되니까 3년 내내 좋아했던 여자한테 고백 하더라. 뭐 차였지만. 너도 해, 못 할 거 뭐 있어? 너 그 얼굴이면 차일 리가 없어. " 친구의 부추김에 잠시나마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재현은 저 멀리 무거운 표정을 짓고서 조용히 앉아 있는 시민을 보고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 아니, 난 못 해. " 친구가 쯧, 하고 혀를 찼다. " 바보. " 그렇게 말하면서. 아직도 졸업식 시작까지는 한참 남아 있었고, 같은 반 친구들이 담임 선생님을 위한 깜짝 파티 준비를 도우러 잠시 올 수 있냐고 연락했기에 재현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교실은 아직 비어 있었다. 케잌을 사러 나갔다더니 늦는 모양이었다. 얘넨 지들이 불러 놓고 왜 안 와. 복도 벽에 기대 서서 한참을 툴툴대는데, 짧은 찰나, 재현은 친구와 함께 앞을 지나쳐 가는 시민을 보았다. 할 수 있는 것은 눈이 마주친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이 웃었을까를 한참 고민하면서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도 무시한 채, 축 쳐지는 게 안쓰러우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게 하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 그것이 재현이 할 수 있는 그 순간의 가장 의미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 ... " 그 가슴 아픈 인영이 사라진 후에도 재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발걸음을 뗐고, 그 때 들리는 소리는 바로- " 너 울어? " 왜, 왜 울까. 재현은 주머니에 들어 있을 편지가 생각났다. 운다니, 하지만 달래 줄 수 없었다. 달래 줄 사이가 아니었다. 물론 편지를 줄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다시 말해 모든 게 헛된 일이었다. 재현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작은 훌쩍임에 귀를 기울이던 재현은 곧 뒤돌아서 반대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너로 가득 차서 네가 넘칠까 늘 걱정하는데 네게 나는 내리지도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아서 재현은 왠지 모르게 뜨거워지는 뺨을 느끼며 서둘러 층계를 내려왔다. 그래, 포기하는 게 맞았다. 이쯤 했으니 열심히 잘 지냈구나, 좋은 추억이다. 그렇게 남기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번에도 생각 뿐이라는 걸 알지만 말이다. 재현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흰 입김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어쩐지 눈 앞이 뿌옇게 물든 것 같아 벅벅 눈가를 훔치기 시작했다. +) 이 글부터 암호명 받겠습니다! (자신없음) 원하시는 분들 댓글로 달아주시면 꼭꼭 기억할게요! 오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