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끝. 교실을 채운 30명 중 절반도 되지 않는 학생들의 인사를 받은 지루함의 끝판왕이라고 소문이 난, 수학 선생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선 교실 앞문을 나섰다. 동시에 엎드려있거나, 카드 게임을 조용히 하고 있거나, 몰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학생들 모두가 거짓말처럼 기립하여 복도를 누볐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수학 수업 듣는 건 정말 자살 행위야. 한 무리가 투덜거리며 선풍기를 그쪽으로 고정시켰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무표정을 유지한 채 오늘 배운 내용을 열심히 정리하며 좋게 말해서는 복습이요 나쁘게 말해서는 재수없는 짓을 하고 있는 학생들은 존재했다. 전국으로 치면 성실함 상위 1% 안에 들 수 있는 그런 학생들이랄까. 한 손으로는 큰 부채로 얼굴을 부치고, 한 손으로는 열심히 펜을 놀리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괜찮았다. 따가운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며 전투적으로 공부를 하던 그들은, 다음 교시가 시작한다는 종이 치자 다음 교시에 해당하는 과목의 교과서를 꺼냈다. 그리고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다시 그 전 시간에 했던 내용을 재차 복습하는 것이었다.
"재수 없어."
"저렇게 공부했는데도 전교권 아니면, 뇌가 없는 거지. 불쌍하고 안쓰러운 녀석들."
머리를 파랗게, 빨갛게 물들인 남학생 두 명이 각각 한 마디씩 꺼냈다. 우리는 공부 안 해도 인생 잘 살 거잖아. 안 그래, 민혁아? 고개를 거의 동시에 돌린 남학생들이 교실 한 구석에서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던, 이번에는 노랗게 머리색을 물들인 남학생에게 물었다. 노골적인 비웃음... 참 당사자가 들어도 기분이 좋을 듯한 말투와 태도였다. 관심도 없다는 것처럼, 게임을 지속하던 남학생이 몇 초 후에 캐릭터가 죽은 후에야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너네보다는 좋은 인생 살 듯."
미친, 미친, 저 미친! 이런 것을 요즘 말로 '팩트 폭행'이라고 하던가. 저 두 남정네들의 시점에서는 '열폭' 혹은 '자폭'이랄까. 아무리 우리가 친하지만 방금 조금 너무했다. 민혁의 목덜미를 잡으려고 하다가, 선생님이 들어오시자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선생이 왔다고 자리에 앉았다니, 많이 발전하고 착해진 것 같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오늘은 6.25 전쟁, 교과서 181쪽 편다. 오늘이 17일이니까... 17번 일어나서 181쪽 읽도록."
아, 쌤 언제적 방식이에요- 이제 그만하실 때도 되지 않으셨나요! 원성 섞인 학생들의 볼멘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내보낸 듯, 아랑곳 않고 17번을 호명한 선생님은 가만히 17번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불평을 하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늘 그랬듯이 그 소리 하나로 모든 사람이 집중한다. 다시 카드 게임을 하려고 했던 무리도. 잠을 자고 있던 무리도.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던 무리도. 아무 말도 안 하고 그저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인데, 뭐 사람의 본능이 원래 그렇지 뭐.
하지만 '17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지자 모든 학생들이 고개를 돌렸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짜증난다는 시선,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도 않다는 반응. 안경을 푹 눌러쓴 채 교과서를 들고 한 글자, 한 글자 읽어가는 작고 마른 남학생... 17번. 17번은 이 반의 1등이었다. 동시에 전교 1등과 2등을 앞다투는 인물이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허점이 있다면, 매일 마스크를 쓰고 왔고 얼굴만큼 큰 뿔테 안경을 쓰고 왔다. 이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17번의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1교시부터 야자가 끝날 시각까지 화장실, 급식실 이외에는 다른 곳을 간 적이 없었으니. 체육 시간에도 양해를 구하고 한쪽에서 영어 단어를 외우는 모습밖에 못 봤다고.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17번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중학교를 나왔는지도 1학년의 중반쯤을 달리고 있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고로 입학한 후 6개월 가까이 17번과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손에 꼽았다. '조별 과제를 위해서'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북한군은 6월 25일, 선전 포고도 없이 남한을 침략하였다."
조곤조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깔끔하게 교과서를 읽은 17번이 자리에 앉았다. 무미건조한 반응도 익숙했다. 평소에 17번이 교과서를 읽는 일이 다분했었기에. 학생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유명했다. 그 어렵다는 이 학교 영어 시험을 유일하게 100점 받은 학생이라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점이 생겼다.
지금쯤이면 속으로 참을 인을 여러 번 새기면서 게임을 하고 있어야 할 민혁이 17번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교과서를 읽자마자 앉아서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치고 노트를 꺼내서 열심히 필기를 하는 17번의 뒷모습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17번을, 교실에 있는지도 몰랐던 그야말로 존재감 無의 17번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사 수업이 끝날 때까지 뚫어져라 쳐다보던 민혁이,
끝종이 울림과 동시에 게임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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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게 민켠이 너무 보고 싶어서 쪄보는 조각글!
10편 정도면 끝이 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