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참 맑은 날이었다.
유치원생이 도화지에 그린 것처럼 몽글몽글한 흰 구름이 파란 하늘에 떠 있는,
참 현실성 없게도 동화같이 깨끗한 하늘이었다.
학교 마치고 새마음병원 801호실로 와라. 어머니 쓰러지셨어.
5교시엔가 6교시엔가 생각없이 폰을 열어 보니, 웬 일로 형에게서 메세지가 와 있었다.
여섯 살 터울의 형은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이 사라진 이후로, 어떻게든 뒷수습을 하느라 집에 들어오면 곧바로 피곤에 지쳐 잠들기 일쑤였다.
마지막으로 대화를 한 게 언제인지조차 가물가물한 형으로부터 대낮에 메세지가 왔다.
급한 일이란 생각에 수업 중이란 사실도 잊고 그대로 일어서 병원으로 달려오니, 시끄러운 8인 병실에서 엄마는 팔에 바늘을 꽂은 체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붙여주는 게 다른 모든 아버지란 사람들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게 하는 그 인간은,
처음부터 그리 가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중계무역 상인이었던 그 인간이 한 달에 한 두 번씩 집에 들어와 지내는 며칠 동안 나는 말을 잃었다.
그사람이 아직 아버지였던 시절, 어렸던 나에게 아버지란, 어렵지만 그래도 어딘가 사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존재였다.
아버지가 날 보며 웃어준 기억은 십 수년에 지나오도록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지만,
그사람이 나에게 무신경할 수록 어린 나는 그사람이 집에 있는 동안 더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란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중학생이 되던 때까지 아직 우리 집엔 가족이란 구색이 맞춰져 있었다.
아버지는 돈을 벌어오고, 엄마는 가정 주부에, 대학교를 다니는 형과, 아직 어린 나.
우리 아들, 놀랬지? 엄마 괜찮으니까, 가서 밥 먹고, 엄마 옷 좀 챙겨와.
손을 감싸쥐고 옆에 멍하니 앉아있으니, 해가 질 무렵에야 천천히 눈을 뜬 엄마가 날 발견하고는 웃었다.
어디가 아픈 거냐고 묻는 말에 그냥 과로라 하루만 입원하기로 했다며 웃어주는 엄마의 얼굴이 부어있어 코끝이 시큰했다.
그사람이 결국 회사 돈을 횡령해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지고서 한 달 정도,
엄마는 충격을 받을 시간도 없이 그사람의 행방을 찾아다니고, 회사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나중에 듣기론, 어쩐 일인지 몇 년 전에 엄마와 그 사람 사이에 이혼 처리가 되어 있다고 해서 법적으로 우리가 빚을 끌어안을 일은 없었지만,
한동안 집으로 찾아오던 사람들에게서 계획적으로 이혼해서 둘이 짜고 돈 빼돌린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어떻게든 상황이 진정되고부터는,
우리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인 그사람이 사라졌기에 엄마는 가족을 먹일 돈을 벌어야 했다.
가정주부로만 살아왔던 엄마가 아침을 차려놓고 날 깨우자 마자 집을 나서고, 밤 늦게서야 지쳐서 돌아오게 된 게 네 달 째.
맞잡은 손이, 그 사이에 많이도 거칠어졌다.
병원을 나와,
멍하니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벤치에 털썩 앉았다.
어쩌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됐지, 싶어 또 그사람을 원망하다가 문득 진한 담배향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 웬 남자가 벽에 기대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아, 미안.
한참을 보고 있자 그 남자도 담배를 향한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손을 들어 사과를 해왔다.
불씨를 꺼뜨려 쓰레기통에 꽁초를 넣는 남자의 움직임을 계속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그거 무슨 맛이에요?
그러니 그남자가 내게 다시 고개를 돌려 잠깐 마주보더니,
털썩, 내가 앉은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
...쓰고 텁텁한 맛.
그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등을 기대며 하늘을 쳐다보는 걸 보고 있다가
나도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려 병원을 들고나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근데 왜 피는 거에요?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병원에 들어가고, 또 나온다.
그 중엔 얼굴을 찌푸린 채 잰 걸음을 한 아줌마도 있었고,
어딘가 욕심 많아 보이는 얼굴로 통화를 하며 웃음을 터트리는 아저씨도 있었고,
아직 어려보이는 데 핏기 없이 시무룩한 얼굴로 휠체어를 탄 여자애도 있었다.
사는 게 쓰고 텁텁하니까,
좀 더 쓴 걸 태우면 조금이라도 잊어버릴까, 싶어서.
한참 후에야 혼잣말을 하듯 대답하고는 남자는,
이내 피식, 힘빠진 웃음 소리를 낸다.
어린애한테,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건지.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남자에게 또 말을 걸었다.
아저씨, 저 한 개만 주시면 안 되요?
금방이라도 일어서려던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말없이 그렇게 보고 있다가 일어서길래, 나도 참 바보같은 소리를 했네,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게 담배는.
하고 일어서서 걸어가 버리는 모습이,
어쩐지 어른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사는 세계에는 없는, 남자. 어른.
고개를 돌려보니 그남자가 앉았던 자리에 담배갑과 라이터가 놓여져 있었다.
고민하다가 손을 뻗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결국은 다시 꺼내 열고 말았다.
담배갑은 비어있었다.
"아, 씨발, 아니 우리가 나중에 갚겠다잖아. 응?"
당구장에서 내기에 지고 나온 지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박경이랑 팀을 먹어서 졌다고만 생각했던 나는 그날따라 운빨이 먹혀들어 꽤나 신나있었고,
거기에 과하게 업된 박경이 자꾸만 지호를 갈궈대니 우지호의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좀만 더 깐죽대다간 한 대 맞을 거 같은데, 싶어서 박경을 말리려던 차에,
지나가던 중학생이 지호랑 눈이 마주친 모양이었다.
지호의 더럽게 싸늘한 눈빛과 지훈이의 동굴 저음, 그리고 박경의 찌질한 모양새 덕분에
동네 일진의 특징을 전부 갖추고 있었던 우리 네 명이 골목을 막고 중학생 두 명을 삥 뜯는 모습에는 딱히 어색한 구석이 없었다.
씨발, 구라까지 말고, 꺼내봐.
아, 진짜 없는데...요...
아, 안 그래도 빡치는데, 씨발. 야, 너는.
집안은 이미 뒤집어졌고,
어떻게든 다시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형과 엄마와는 달리,
어린 날의 나는 조금씩 비틀어져 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이후로,
그동안 그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해왔던 내 행동이,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없어서 쌓여만 가던 자잘한 상처들이,
남에게 사랑받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난 안 될 거란 절망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냥 내가 애써 착한 모습으로 꾸미고 노력하지 않아도 같이 어울려주고,
그렇게 다니면서 시간 보내면 적어도 우울하지 않게 하루가 또 지나가는 게 좋아서
그냥 지호랑 애들이 하는 모습을 벽에 기댄 체 방관하고 있었다.
뭐, 아무려면 어때.
그러던 차에 눈이 마주쳤다.
아마도 애들 목소리 때문인지 고개를 돌렸을, 골목 바깥 쪽 길을 가로지르던 남자와,
지호의 작업으로부터 대충 시선을 회피하고 있던 내가.
어쩌다보니 가로등 바로 아래 있어 내 모습이 눈에 보인 건지,
나를 보고는 걸음을 멈춰섰다.
뭐야, 아저씨는. 그냥 갈 길 가세요.
지호는 골목 입구에 웬 남자가 멈춰서자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삥 듣던 중학생에게 손을 걸쳐 어깨동무를 하며 띠꺼운 목소리로 말을 걸자,
그남자는 피식, 웃더니 곧장 골목으로 걸어 들어왔다.
세게 나갈 것 같던 지호도 그래봐야 중학생이라,
막상 자기보다 큰 성인 남자가 겁 먹은 눈치도 없이 당당하게 다가오니 긴장한 눈치여서 난 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이, 씨발, 갈 길 가라니까,
결국 세게 나가기로 한건지 지호가 다시 한 번 남자에게 시비를 거는 데도
아랑곳 않고 남자는 곧장 걸어 내 앞에 섰다.
어, 씹네?
꼬맹이, 빌린 거 갚아야지?
지호가 어이없다는 듯 궁시렁 대는 말에도 신경 쓰지 않고
벽에 기대선 나를 보며 하는 말에,
한 달 전 병원에서 마주쳤던 일이 생각났다.
아저씨, 지금 중학생한테 담배 삥 뜯는 거에요?
쿡, 너도 기억하는 거 맞구나?
잠깐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이 아저씨는 어떻게 날 바로 알아본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아직도 그 담배갑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걸까.
아저씨는 이제 담배를 피지 않는다. |
"아저씨, 그 때 왜 빈 담배갑 두고 간 거에요?" 가끔씩 그 담배갑을 꺼내 만져볼 때가 있다. 아저씨는 내가 그걸 여태 가지고 있을 거란 걸 꿈에도 생각 못하겠지만. 소파에서 티비를 보던 아저씨 옆에 앉아 그 무릎 위에 발을 걸치며 물어보니 아저씨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음표를 얼굴에 띄운다. "왜 그 때... 우리 처음 만났을 때요." "아... 병원에서?" 뭐야, 나만 기억 하나. "씁쓸하고 힘든 것 같아도, 다시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나 보지." "아, 뭐야, 그게. 오글거려." 대놓고 손발을 비틀어대니 아저씨는 피식, 웃으면서 오른 팔로 내 어깨를 감싸 안아 당긴다. 아저씨 품에 안겨서는 아저씨가 못 보게 조용히 웃음짓는다. 아저씨를 만나서, 참 다행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