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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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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하지만 약간의 음울함이 담긴 눈동자가 좌우로 굴러다녔다. 짙은 눈썹 아래 굵은 테에 둘러 쌓인 유리막을 앞에 두고 움직이는 눈동자는 대상물(對象物)을 쫓아 천천히 관찰한다. 그 시선의 끝에는 한 남성이 서 있었는데 뺨이 홀쭉한 신경질적인 외모와 왼쪽 눈물점이 인상적인 사람이었으며 남자의 다음 목표물(目標物)이기도 했다.
그는 무차별적으로 사냥감을 고르지 않는다. 외적인 외향을 먼저보고 고른 다음 성격과 대인관계, 습관과 버릇 등을 오랜 시간을 들여 관찰하여 대상자를 파악했는데 이번 남성은 외적으로는 합격이었으며 현재 다른 동향(動向)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어느 것 하나라도 남자의 기준에서 많이 하락하면 제외했는데 그것은 남자에게 별다른 감흥(感興)을 전해주지 못했다. 실망스럽거나 안타까운 소모적인 감정은 갖고 있지 않은데다 단순한 쾌락을 위해 사람을 납치하여 살인하는 것이 아니었고 좀 더 높은 목표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숭고한 면도 없잖아 있었는데 타인이 본다면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쓸모 없는 짓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남자에게는 어떠한 것보다 중요했다.
"탈락."
관찰 중인 다음 목표물은 도서관에 비치된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것을 본 남자는 바로 사형선고를 내리는 판사처럼 무덤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번에 가까이에서 냄새를 맡았을 때 담배 냄새가 나지 않아서 흡연습관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깔끔을 떠는 성격이었는지 담배 냄새가 베이지 않도록 피는 중이었고 지금도 손가락이 아닌 나무젓가락에 담배를 꽂아 폈으며 머리에 베지 않도록 후드로 머리를 덮고 있었다.
불찰이었다. 담배는 남자가 생각하기로 독약과 다름없는 요소(要素)였기 때문에 가감없이 '탈락'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사냥감으로 예정된 그 남성의 입장으로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남자는 미련없이 뒤돌아 도서관을 나왔고 안경을 벗은 후 '거처'로 향했다.
"다시 찾아야겠군."
지금까지 들인 시간이 아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아직 다음 시간까지 충분했기 때문에 남자의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는 그대로 우뚝 섰다. 다름 아닌 집안에 내버려둔 먹잇감이 깨어나 제멋대로 눈에 씌운 천을 벗겨내고 집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가 예상시간보다 약물에서 깨어난 점은 어느정도 감안하고 있었던 부분이었지만 눈가리개까지 벗어낼 줄을 몰랐다.
"뭐하는 거지?"
남자의 굳은 입매가 풀리며 약간 삐뚜룸해졌다. 죽은 눈동자는 생생하게 살아나며 조금의 기대감을 품고 있었는데 무척 순수해보여서 오싹함마저 들었다. 이번 사냥감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안겨줄 것 같아서 기대가 커져 남자는 웃지 않고서는 못배길 것 같았다. 남자의 '목표'까지 도달하기 위한 소중한 존재일지도 몰랐다.
덜덜 떠는 가녀린 몸짓은 '희극(戱劇)'의 한 장면처럼 보였고 무채색으로 녹아든 공간이 눈부신 빛깔로 변해감을 느꼈다.
"왜 그래?"
부들부들 떠는 그녀 곁으로 다가간 남자는 쭈그려 앉아 부드러운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곧은 목선을 따라 쇄골을, 둥근 곡선을 그리는 가슴을 어루만졌으며 날씬한 배와 은밀한 부분을 스치고 가냘픈 다리까지 거침없이 쓸어내렸다. 눈물로 촉촉히 적은 얼굴은 손으로 훔쳐내고 다정하지만 한기(寒氣) 어린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마치 육식동물 숫사자가 초식동물 작은 토끼에게 으르렁대는 것과 비슷한 위협(威脅)이었다.
"빨리 깨어나서 집안까지 구경한 기념으로 선물을 주지. 아주 좋을거야."
그말을 끝으로 그녀를 일으켜 세워 그녀의 팔뚝을 잡아 제대로 균형잡도록 해주었다. 오랜간만에 바닥을 밟고 일어나는 건 좀 어색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남자는 그녀의 목에 걸린 구속구의 금속끈을 잡고 벗겨진 눈가리개는 아예 풀어버려 그녀가 더 잘 볼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배려심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 또한 몹시 의아했지만 두려워서 감히 물어볼 수 없었다.
남자가 이끄는대로 하얀 공간 안에서 욕실문 옆의 벽으로 이끌었고 그 벽을 만지자 곧 쿠르릉하는 굉음과 동시에 벽이 움직였다.
* * * * *
"쑨양씨 뭐 먹을래요?"
"글쎄요. 뭐 먹지?"
"난...모카. 휘핑크림 빼고. 다이어트 중이라."
"전 그린티 라떼. 사이즈 업해서요."
"여긴 커피 맛이 예술이라니까...꼭 이런 사람 있다니까. 쯧."
"난 아메리카노."
"음...나는......"
카운터 앞에 서서 쑨양과 그의 동료들은 메뉴를 보며 하나씩 음료를 골랐다. 쑨양은 고민하다가 모카를 선택했고 휘핑 듬뿍에 시럽도 듬뿍으로 주문을 마쳤다.
그는 달달한 것을 좋아했고 반대로 씁쓸한 것은 즐기지 않아서 커피 마실 때도 그러한 성향(性向)이 나타났다. 커피에서 에스프레소가 가장 기본이었지만 매우 썼기 때문에 매니아가 아닌 이상 뜨거운 물 또는 차가운 물을 끼얹은 아메리카노가 어느정도 커피를 마실 줄 아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메뉴였다. 원두의 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스트레이트(straight)였고 다른 커피 음료는 우유나 시럽 등으로 뒤섞여 본연의 맛 또는 향을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쑨양도 그런 것을 알지만 쓴 것보다 단 것을 좋아하는 탓에 항상 그는 모카 혹은 마끼아또였다. 쓴 맛의 종결자 '약'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지만 싫은 건 싫은 것이었다.
제약회사 연구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약에 대한 연구(硏究)였지 그 쓴맛을 연구하려는 건 아니었으니까. 쓴 맛은 약제에 붙는 부산물(副産物)에 불과했다.
"음~ 맛있다."
"맛있죠? 하아...내가 이래서 이곳을 매일 들린다니까."
"시원하다~"
곧 주문한 음료가 나왔고 각자 주문한 음료를 앞에 두고 빨대로 쭉 빨아먹었다. 여름의 끝물이었지만 아직도 날씨는 더운 열기가 기승을 부리는 통에 얼음 가득한 아이스 음료들이었고 플라스틱 컵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주르륵 굴러 떨어졌다.
"아까 그 남자 봤어?"
"누구?"
"좀 전에 나갔던...키 크고. 쑨양씨보다 작긴 하지만 190cm는 될 것 같더라."
"아~ 그 잘생긴 사람. 귀엽기도 하고 남자답기도 하고..."
"맞아."
여자들은 다래와 나갔던 성용을 주제로 삼고 수다를 떨 때 남자들은 묵묵히 음료만 축냈다. 초코시럽과 우유, 휘핑크림이 뒤섞인 모카 커피의 달달함을 혀끝으로 만끽하던 쑨양은 지금 여자들의 대화 화제로 떠오른 성용을 떠올렸다. 나가기 전에 쏘아보고 나가던 이상한 남자였다. 자기 친구, 여자친구?를 놀래켜서 화가 났는지 노려보는 모양새가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았고 꽤 거칠어보였다.
"여자들 난리 났네. 난리 났어."
"뭘 새삼스레..."
"쑨양씨 어때요?"
"네?"
"아까 나갔던 남자가 쑨양의 인기를 앗아갔잖아요. 어때요?"
"그, 글쎄요?"
남자들의 질문에 쑨양은 눈만 꿈뻑꿈뻑거리며 뒷통수를 긁적였다. 아무 생각없었던 쑨양에게 당황스러운 질문이어서 난처함에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순진하기 짝이없는 쑨양의 반응에 동료들은 너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Are you OK?(괜찮아?)"
"No...I'm not.(안 괜찮아요.)"
기어코 밤새도록 환자를 돌보고 시애틀의 마지막 날을 과다 업무로 꽉꽉 눌러 담은 태환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며칠 밤샘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쉴틈없이 몰아치는 환자들 때문에 약간의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카페인의 힘으로 겨우 버티고 일한 탓에 피곤했다. 퇴근하려고 하얀 의사 가운을 벗은 다음 사복으로 갈아입은 태환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고 피곤함에 눈을 감고 서있었다.
태환과 마찬가지로 아침에 퇴근하는 마이클이 다가와 서서 잠든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드는 태환에게 괜찮냐고 물었으며 태환은 부정(不正)의 대답을 내놓았다.
"When do you leave?(언제 떠나?)"
"At noon.(정오에요.)"
"You go to the airport right away.(곧바로 공항으로 가야겠군.)"
"Um...Yes.(음...네.)"
"I'll miss you. Dr.Park.(보고 싶을거야. 닥터 박.)"
"So am I, too.(나 역시...)"
딩동. 도착음과 함께 열리는 엘리베이터를 타며 마이클과 태환은 대화를 나누었다. 몇년 동안 동고동락(同苦同樂 )해왔던 친구이자 동료가 떠난다니 못내 아쉬운 마이클이었다. 그것은 태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운 고국(故國)으로 돌아가는 것은 기쁘고 좋은 일이었지만 마음이 잘맞는 친한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는 것은 아쉬웠다.
선진 기술을 배우며 다양한 커리어를 쌓는 동안 함께 한 그들이었고 아무렇지 않는게 더 이상했다.
잠깐동안 전문의 시험이 있는 연말까지 있을까 고민도 더러했던 태환이었지만 이미 결정한 일에 번복하기 것은 내키지 않아 처음 결정한대로 내버려두었다.
아예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시간내어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거대한 바다를 건너야되는 기나긴 거리였지만 그다지 큰 장애물은 아니었다.
"Did you say goodbye to everybody?(모두에게 작별인사했어?)"
"Sure, did.(물론이죠.)"
마이클의 질문에 태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일하느라 바빴던 탓에 간단히 인삿말만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 다행히 마이클은 꽤 정식적으로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센터 건물을 나와 주차장 중심에 선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When can I see you?(언제 만날 수 있지?)"
"Well...Maybe I'll meet after a long time to you.(글쎄요. 어쩌면...한참 뒤에 만날지도 모르죠.)"
"Then...Until then, take care.(그럼...그때까지 잘 지내라.)"
"Thanks. Dr.Phelps. And the same to you.(고마워요. 닥터 펠프스. 당신도 그러길 바라요.)"
마이클의 인사에 태환은 미소지었다. 그의 공식적인 별명 '미소천사(the angelic smile)'에 걸맞는 멋진 미소였다.
미소지으며 화답(和答)한 태환은 마이클에게 손을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했고 마이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뜻하게 제 갈길을 갔다.
마이클은 그의 애마 푸른색의 바이크(motorbike)를 타고, 태환은 자신의 자동차를 타고 병원에서 빠져나갔다. 그들은 한적한 도로를 가로지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애틀의 하늘은 평소의 회색하늘과 달리 푸르고 몹시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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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과 그녀는 어떻게 될지~
다음화에 그녀의 미래가 드러납니다.
다음화에 태환이 드디어 귀국을...^^ 다음화에 한국에 오겠군요.
쑨양과 언제 어떻게 엮일 것인지 기대해주세요~
곧바로 만나지는 않고 편수가 좀 지나야 되요;;;
※ 오타 지적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