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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화
* * * * *
간헐적으로 토해지는 거친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불안정했던 호흡이 안정세로 돌아서며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감았던 눈을 뜬다. 별빛도 달빛도 비추지 않는 그믐의 밤처럼 어둡기 짝이 없는 그늘이 남자의 눈동자를 덮고 있었다. 민무늬의 하얀 천장을 뚫어질 듯이 한참동안 바라보던 남자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잘 단련된 육체 위로 유연한 근육의 움직임이 뚜렷하게 드러났는데 유명 예술가가 정성들여 조각한 것같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매끈하게 흐르는 육체의 선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가히 손을 뻗어 만지고 싶을 만큼 완벽했다.
"......큭."
한껏 감정을 담아낸 웃음소리가 고요한 공기의 흐름을 깨며 파문(波紋)을 일으켰다. 조소어린 웃음은 부족했던 남자의 텅 빈 감정을 모두 담아내고 있었고 구구절절한 사연을 그려내었다. 남자는 고통어린 두통이 너무 싫었지만 감내해야할 통증이었다. 그것은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아픔이었고 그가 살아야하는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는 '동전의 양면'같은 존재였다. 서글픈 기억을 분노로 승화(昇華)시켜 피를 토하더라도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증오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억눌린 조소를 내뱉던 남자는 작은 한숨을 마지막으로 드러냈던 감정을 모조리 지웠다.
하얀 도화지 위로 실수로 그어진 연필자국을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지워냈다. 그 모습은 몹시 강박적이어서 묘한 동정심마저 불러일으켰다.
자리에서 발을 딛고 일어난 남자는 마무리를 위해 욕실로 향했고 욕실 안에는 방치된 핏자국과 살점들이 타일 위에 굳어 있었다. 피가 묻어 더러워진 옷가지는 한쪽에 치워두고 흐르는 물로 붉게 둘든 욕실 바닥과 벽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욕조안에 넣어둔 그녀의 조각난 육체는 핏물이 빠져 더욱 새하얗게 탈색(脫色)되었고 주황색 조명빛을 그대로 받아내며 움울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작업을 마친 남자는 어느 사냥감들처럼 비닐에 담았고 자신이 입었던 핏물이 스며든 옷가지도 함께 집어넣었다.
한창 청춘의 꽃을 피우며 사랑받아야 마땅한 그녀는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만큼 한낱 토막 더미가 되어 비닐에 쌓인 채 생을 마감했다.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죄의식도 없는 남자는 새옷을 꺼내입고 마지막 '작업'을 위해 거처를 나섰다. 한손에는 한때 사람이라 불리었던 물체를 담은 비닐봉투를 들고 공터로 향했고 약품으로 모두 녹였다. 처음부터 '그녀'라는 존재가 없었던 것처럼 조금도 남기지 못하고 연기가 되어 잠시 허공에 머물다가 이내 사라졌다.
다시 거처로 돌아온 남자는 책상 앞의 의자를 끌어내어 앉아 컴퓨터 본체의 전원버튼을 눌렀다. 2~3초만에 부팅되며 윈도우 화면이 떠올랐는데 컴퓨터의 성능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일반 브랜드 PC가 아닌 최상의 부품을 모아 직접 조립한 것으로 여타 제품보다 우월한 성능을 자랑했다.
바탕화면에서 마우스를 움직여 포인터를 어떤 아이콘에 갖다대고 누르자 화려한 그래픽이 순식간에 모니터 화면을 점령했다. 유명 온라인 게임 중의 하나로 타 게임에 비해 신선하고 그래픽 구현이 좋은 편이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인기 게임이었다. 그중에서 게임 유저가 가장 많은 서버로 들어가 예전부터 점해두었던 목표물을 찾았다. 곧 해당 목표물이 남자의 눈에 띄었고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Bingo!(찾았다.)"
남자는 또다시 사냥꾼의 면모(面貌)를 드러냈다.
* * * * *
약속장소는 여러 점포들이 모여있는 일종의 복합 쇼핑몰 건물로서 쇼핑부터 영화까지 다양한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건물 최상층에는 레스토랑 및 다양한 식당들이 입점해 있었는데 그중의 한곳이 그의 약속장소였다. 건물 안에 도착한 쑨양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은 다음, 지하와 1층, 최상층만 운행되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단숨에 올라갔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시간까지 20분 가량 남아 있었다. 일찍 온 셈이 되었지만 지각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최상층 식당가는 저렴한 가격으로 손님을 유치하는 푸드 코너와 다르게 어느정도 금액을 지불해야하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탓에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아서 상당히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각 음식점 특성에 맞게 꾸며진 인테리어가 눈을,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코를 즐겁게 했다.
"아, 미리 화장실 갔다올까?"
시간도 여유있겠다 식당가를 구경하던 쑨양은 화장실 안내표시를 보고 약속장소인 음식점으로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을 갔다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표지판이 가르키는 방향대로 성큼성큼 걸어가 적갈색 벽돌로 내추럴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화장실 입구로 들어섰다.
"아!"
"어?"
화장실 출입구에서 안에서 나오려던 사람과 부닥뜨렸는데 쑨양과 달리 상대방은 미약한 아픔이 섞인 감탄사를 내뱉었다. 보통 사람들에 비해 아주 큰 쑨양이었기 때문에 그와 부딪힌 상대는 안타깝게도 어깨에 머리를 부딪히고 만것이다. 차라리 키가 더 작았다면 그나마 나았을텐데 한국 남성 평균 키보다 큰 훤칠해서 단단한 어깨와 제대로 부닥쳤다.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상황을 마주한 쑨양은 당혹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더듬거리며 사과했다. 쌍방 과실이었지만 상대적으로 괜찮은 쑨양이 제잘못으로 생각하고 사과해버린 것이다.
"Sorry! Are you OK?(미안해요! 괜찮아요?) Ah, 아니지...괘, 괜찮아요?"
"...아?"
부딪힌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던 상대방은 쑨양의 말에 고개를 들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쩔줄 몰라하는 그의 모습이 재밌는지 멍하게 쳐다보다가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작게 미소짓는다. 상대방도 무조건 쑨양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단지 단단한 물체가 맞닥뜨리는 바람에 아파서 머리를 감쌌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과하는 꼴이라니, 희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이 남자가 순진하고 다정한 성격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상대방은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더니 쑨양을 향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I'm fine. You don't make an apology.(난 괜찮아요. 사과하지 마세요.)"
"But...(그렇지만...)"
"Both of we did wrong. So there is no need for you to apology.(둘 다 잘못한거에요. 그러니까 당신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OK.(네.)"
"OK! good bye...(좋아요. 그럼 이만...)"
"Good bye...(잘가요...)"
"You have a nice day.(좋은 하루 되세요.)"
변함없이 미소지으며 괜찮다고, 서로 잘못한 것이니 사과하지 말라고 말한 상대방은 이내 출입구에서 멀어졌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우뚝 선 채 바라본 쑨양은 예쁘게 웃으며 부드럽게 말을 건넨 남자의 모습을 재차 떠올렸다. 지금까지 봐온 사람 중에서 저 사람만큼 예쁘게 웃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분명 같은 성별임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제가 느낀 느낀점을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예쁘다...} * { }는 중국어.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에 도착한 태환은 곧바로 친구에게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 지금 어디야? 나 도착했어.
- 그래? 지금 가고 있어! 잠깐만 기다려!
- 어.
친구와 대화를 마친 태환은 집에서 먹었던 요리가 짰는지 조금 갈증이 나서 편의점에 들러 생수를 사서 마셨다. 약속장소로 잡은 이 건물은 여러 오락과 유흥거리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서 수많은 유동인구들로 복잡했다. 태환은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건물 앞에 서서 생수를 마시며 그들을 구경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것은 아니지만 동양인보다 서양인들 틈바구니에 지내다보니 같은 한국인들이 수두룩한 모습이 왠지 묘한 감흥(感興)을 불러일으킨 탓이다. 자신과 비슷한 외향에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보니 새삼 여기가 한국이구나 깨달았다.
다 마신 생수병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많은 사람들과 휩쓸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전용이 아닌 전층 엘리베이터를 타버려서 층층마다 서게 되었다. 고층으로 갈수록 타고 있던 사람들이 속속히 빠져나가고 결국 태환 혼자 남게 되었는데 최상층으로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용 엘리베이터를 탄 덕분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런 것도 재밌는 체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괘념치 않았다. 아직 친구가 도착하지 않아서 같이 들어갈 생각에 음식점 앞에서 서성이며 다시 문자메세지를 보냈고 차가 막힌다는 친구의 답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지금 가고 있다는 말이 지금 출발했다는 말이었나보다.
"그럼, 그렇지. 어휴..."
왠일로 약속시간을 지킨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좀 전에 생수를 다 마셨더니 화장실이 가고 싶어져 근처 표지판을 따라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보고 손을 씻은 후 항상 챙겨다니는 손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아낸 후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아니 나가려는 찰나, 들어오는 사람과 부닥뜨렸다.
얼추 예상해도 2미터를 되어보이는 남자와 부딪히고 몇 마디 나눈 뒤 화장실에 빠져나온 태환은 시계를 보고 약속 장소로 잡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내부를 두리번 두리번 살펴보았지만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빈 자리 중의 한곳에 터를 잡고 앉은 그는 휴대폰을 몇번 만지작거리다가 좀 전에 화장실에서 마주친 남자를 떠올렸다.
안에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치 못하고 들어온 그와 마찬가지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태환.
두 사람 모두 잘못한 것이었고 단지 신장 차이로 인해 태환만 아팠을 뿐이다. 그런데 곧바로 어쩔 줄 몰라하면서 제잘못인냥 사과하는 남자가 신기했고 재밌었다. 순진해서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면 먼지 한톨 못남기고 탈탈 털릴 것 같다. 그리고 당황한 상황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말이 영어인 것으로 보아 동양인이지만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일텐데 친절하게 한국말로 바꾸어 사과의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배어있고 다정한 성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정확히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어가 익숙하더라도 영어보다 못해보였기 때문에 그 친절함이 마음에 들어서 일부러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대답했다. 영어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다 최근까지 미국에 있었고 흐르는 물처럼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언어였으며 알고 있는 지식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흐음...일본인은 아닌 것 같던데 중국인일까?"
어쩌면 오랜 외국생활로 모국어보다 영어가 편한 같은 한국인일지도 몰랐으나 생김새가 묘하게 이국적이라 한국인보다 외국인같았다. 물론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지도 몰랐지만 그냥 느낌이 그랬다.
"...거기다 남자답게 잘생겼고...그건 좀 부럽다."
메디컬 센터에서 함께 일한 동료의사 중의 내과 치프 라이언이 '예쁜이(Pretty boy)'이라고 느물느물하게 말할만큼 아주 남성적인 외모를 갖고 있지 못하고 오히려 예쁜 편에 속하는 사실을 태환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라이언이 '예쁜이'라고 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제 얼굴이 싫은 건 아니지만 좀 더 남자답게 생기면 좋겠다라는 작은 소망이 있었다. 성형할 것은 아니니 부질없는 소망에 불과했지만.
좀 전의 그 키가 무척 큰 남자정도면 만족스러울텐데...라고 생각했다. 동화 속의 백설공주처럼 검은 색 머리칼에 피부가 하얗고 입술은 붉지만 뚜렷한 이목구비와 짙은 눈썹이 남자다워서 조금의 여성미도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눈동자에 깃든 아이같은 순수함이 남자다운 외모와 대조(對照)되어서 언밸런스했지만 묘하게 어우러져 날카로운 분위기를 중화(中和)시키는 역할을 해서 나쁘지 않았다.
"Yo~태환아!"
"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쪽으로 쳐다보자 역시나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태환은 오랜만에 보는 친구를 향해 웃으며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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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압! 평일에 찾아왔습니다!
이게 얼마만이죠?ㅠㅠ 한동안 바빴지만...이제 슬슬 짬이 나서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올려봅니다.
비록 회사에서 인티를 막아서 못하지만...퇴근 후에는...+_+
요즘에 퇴근 후에도 바빠서 정신없었지만 어느정도 수습이 되었답니다.(안정세는 아니구 잠깐;;;)
어쨌든 13편 이후로 빨리 독자님들을 찾아뵐 수 있어서 반가워요~^^
그리고 태환과 쑨양이 마주쳤습니다!
그러나 독자님들 바람과 좀 다른 마주침이죠?^^; 실망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 오타 지적 환영.
현재 연재를 잠시 멈춘 상태지만 제가 쓴 글의 편수를 세어보니 이번 14편까지 치니 79편이 되었더라구요. {7일동안 50편} + {두 개의 귀걸이 15편} + {향기없는 꽃 14편} = 79편 참 많이도 썼네요. 그런데 그중에서 완결난게 없다는게...ㅠㅠ(좀 더 기다려주세요ㅠㅠ very many wait...) 다음편이면 80편째라서 기념으로 별거 아니지만~~뭐든지 물어보세요! 해봅니다. 제가 연재하고 있는 7일동안, 두 개의 귀걸이, 향기없는 꽃 등 지금까지 궁금했던 이야기,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덧글에 달아주시면 스포를 헤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답변해드리겠습니다.★ 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