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제야 오는거야? 먹을 거 가져왔어?" "아니, 내일 쓸 재료밖에 없더라. 그새 다 치운 것 같아." "에이 뭐야. 졸려. 그냥 잘래." 나도 그만 잠들어야지. 내일도 바쁜 하루가 시작될 터이니. "봤어? 한경택 대감의 장녀라던데?" "한경택 대감이 누군데?" "말하면 네가 아니? 어쨌든 높으신 분의 여식이라는 거지." "나 아침에 잠깐 봤어! 어쩜 그리 피부가 백옥 같던지 확실히 귀하게 자란 티가 나더라니까." "아아 부러워! 나도 다음 생엔 귀한 집에서 태어나야지." "도련님은 나 같은 여자를 부인으로 두셔야 하는데!" "뭐래 정신 나갔니? 도련님이 왜 너 같은 애랑?" "정부는 몰라도 첩이라면 괜찮잖아! 주인님도 세명이나 두셨고. 원래 정부보다 첩을 더 이뻐하는 게 남자 마음 아니겠어?" "첩이라면 언니들 보다 나이 어린 제가 더 가능성 있죠." "이 계집애가 벌써부터! 잘생긴 건 알아가지고!" 오늘도 아침부터 정국 도련님의 정혼자 얘기로 떠들썩한 가운데 시녀들을 총괄하는 유모님이 오셨다. "왜 이렇게 다들 시끄러운 게야. 오늘부터 입단속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있을 시 바로 주인마님께 고할 테니까 그리들 알고 있어. 그리고 연화, 단이는 나 좀 잠깐 보자꾸나." 단이와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유모님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손님방으로 가는 길에서 멈춰 세우시더니 유모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오늘부로 한 씨 가의 나율 아씨를 전담해서 시중을 들도록 하거라. 아씨의 몸종도 함께 왔으니 모르는 게 있으면 알려주면서 같이 거들면 된다. 도련님을 흠모하는 계집애들이 워낙 많아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몰라서 일부러 너희에게 맡긴 것이니 입단속, 몸단속 철저히 하거라." 이를 어쩐다... 죄송합니다, 유모님. 저 또한 도련님을 흠모하는 계집애 중 한 명이에요... 단이와 나는 아씨에게 인사를 드리러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그곳에 주인마님과 아씨가 함께 차와 다과를 두고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고운 분홍빛과 하늘빛의 비단을 두른 다소곳한 여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씨는 같은 여인이 봐도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복숭아 같은 볼에 홍조를 띠우며 옅게 미소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나율 아씨. 시녀 연화라 하옵니다." "시녀 단이라 하옵니다." "앞으로 이 아이들이 이곳에 계실 동안 한낭자를 모실 겁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바로 말씀하세요."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리옵니다, 어머님." 어머님이라는 말에 귀가 멍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는 항상 어머니같이 잘 대해주셨던 주인마님을 어머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니. 유모님께서 아무나 아씨의 시종을 붙이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전혀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이건 좀 많이 부럽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의 어미는 나와 아비를 두고 떠나 어미의 사랑을 모르며 자랐고 술에 빠진 아비의 사랑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주인마님께서는 그런 나를 구해주시고 처음 이곳에 와서도 눈에 띌 때마다 다정하게 대해 주셔서 내 어머니라 생각하며 모셨다. 그렇게 이곳에서 6년을 살아왔다. 부러운 마음이 들어서는 안되는데 벌써부터 이러다니 큰일이다. 아씨는 매우 조신하고 유순한 성격인지 크게 손이 가지 않았다. 시키는 게 너무 없어서 졸음이 쏟아지는 걸 단이와 서로의 몸을 꼬집어 가며 꾹 참았다. 아씨의 몸종인 송이라는 아이가 말을 걸어주어 그나마 버텼다. 손님방에 들어가기 전 유모님께서 일러준 사항들을 송이에게 알려주고 나자 밖에서 도련님의 시종이 도련님이 손님방을 찾아왔다 일렀다. "아씨, 도련님께서 오셨답니다." "그래? 내 용모가 지금 단정하느냐?" "네 단정하옵니다." "그럼 들어오시라 해라." 문 밖으로 나가 어젯밤에 보았던 수려한 얼굴을 뵈었다.
"연화 너... 네가 어찌 이곳에 있느냐?" "오늘부터 이곳에 계실 동알 나율 아씨를 모시라 하셨습니다. 아씨께서 들라하십니다." "... 그래." 도련님을 손님방 문 앞까지 모시고 도련님을 방 안으로 들인 후 문을 닫았다. 안에서는 단이와 송이 둘이서 차 시중을 들었다. 달밤 아래 연못가에서 도련님을 보았던 것이 마치 꿈속에서 본 것 마냥 아득해졌다. 어제 그렇게 도련님을 뵙고 이 자리에서 다시 마주할 줄이야. 꿈은 꿈에서 끝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가슴 한 편이 아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전 씨 가의 시녀로 평생을 살아갈 것이며 도련님이 혼인을 해도, 아이를 낳고 첩을 둘지라도 도련님이 늙어 죽기 전까지는 계속 전 씨 가의 시녀로 남을 것이다. 나의 운명은 이러하며 내가 도련님과 이어질 수 있는 인연은 고작 이것뿐이다. 문 밖에서 어제 들었던 도련님의 말소리와 조곤조곤한 아씨의 말소리와 단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얼마 되지 않아 도련님께서 돌아가신다 하여 문을 열어 밖으로 모셨다. "어떤 것 같으냐?"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네가 말한 운명 말이다. 연화 네가 보기에 한낭자와 내가 운명의 짝인 것 같으냐?" "아... 그것이... " "모르겠느냐?" "..... 예." "나도 그렇다. 아직은 잘 모르겠구나." 그놈의 운명 얘기는 괜히 꺼내었나. 그래도 도련님의 표정이 어제만큼 어둡지 않아 보이신다. 아씨가 마음에 드셨나? 그야 아씨는 누가 봐도 참 고우시고 성격도 고와 보이신다. 주인님과 주인마님께서 고르고 고르신 분이라 당연히 그렇겠지만. 도련님 곁에 좋으신 분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인데 별로 기쁘지가 않다. 누가 이런 내 마음을 알게 되면 불경하다 욕했을 것이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내 모습이 참으로 못났다. 이런 못난 내가 도련님 곁에 서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랄 걸 바라야지 나까짓 게. 한순간이라도 도련님 곁에 서는 상상을 하다니. 내가 이렇게까지 못난 인간이었나. 단이와 나는 처소를 손님방 가까이로 옮겨 지내게 되었다. 오늘 하루 동안 아씨 곁에서 지내보니 들은 대로 좋으신 분 같다. 송이가 아씨의 칭찬을 늘어놓느라 목이 다 쉴 정도였으니. 실제로 아랫것들에게도 막 대하지 않고 천성이 상냥하여 모두에게 다정하며 여인으로서의 덕목을 모두 갖추신 분이라 한다. 단이는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만나는 거라며 대꾸해 주었다. 하루가 참으로 길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여인의 비명 소리에 눈이 확 떠졌다. - 암호닉 - [새싹] [칭챙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