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호의 의식의 흐름 #3]
나는 이사한 직후에는 행복하고도 원시적인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항상 하는 일은 욕실에서 노래를 불렀고 침대에 누워 코끼리 소리를 내기에 바빴다.
부엌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작은 부엌은 레토르트 식품을 데우거나 라면을 끓이는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었고,
기숙사에서 들고 온 내 짐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지만 집에서 택배로 온 내 짐들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으며 중고나 저렴하게 산 가구들은 비닐조차 벗지 못한 채로 버려져 있었다.
길쭉한 사각형의 원목 식탁을 거실의 벽에 붙이고 내 나름대로 간단한 음식을 해먹기 시작할 때 쯤이었을까.
나는 옆집에도 누군가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내었다.
즉 너무 조용해서 이층에는 나만 사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평소와 같이 귀찮은 강의를 위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평범한 날의 아침이었다.
있는 재료를 넣어 대충 만든 볶음밥을 먹고 문 밖을 나섰을 때, 나는 미묘한 남자 한명을 마주쳤다.
키는 컸지만 약간 어깨를 구부리고 있었고 하얀 느낌의 피부의 남자가 어슬렁 거리듯 문을 잠그고 있었다.
피곤하다는 것이 얼굴에 쓰여 있는 듯했고 날카로움과 차가운 느낌이 담긴...
아, 그래 한 겨울과 고양이 같은 사람이었다.
뻔뻔하다는 말을 듣는 나 조차 날카로운 인상에 인사를 할까 6초동안 망설였지만 나는 말 그대로 뻔뻔하고 당당했다.
“안녕하세요. 444호로 이사ㅇ...”
남자는 내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눈빛을 나에게 맞춘 후 살짝 까딱거렸다.
그리고 긴 발걸음으로 중앙의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나는 그 남자의 행동이 '옛다 인사다. 먹고 떨어져라'라는 행위로 보였고 큰 보폭의 걸음으로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 뛰었다.
웬지 모르게 속도감으로 지고 싶지 않은 오기였다.
나는 짧은 다리를 굴려 저 앞의 계단을 내려가는 그를 가로질러서 갈 때 승리의 쾌감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남자는 어이가 없었는지 살짝 멈추어 섰고 나는 남자에 대한 관심보다 속도로 그를 이겼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이 더 컸기에 멈추어 선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쌩하니 버스정류장까지 이동했다.
우습게도 버스를 탄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볼걸...하는 알 수 없는 후회를 하는 중이었다.
남자는 말 한마디 안 해도 무언가 존재감이 있는 사람이었고 차가움과 나른함이 뒤섞인 형용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내가 이때까지 봐온 사람들과는 다른 독보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그다지 남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내가 잠깐 본 111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이후에도 그 남자와 복도에서 간혹 마주칠 수 있었는데, 그 때 마다 우리의 행동패턴은 이러했다.
“안녕하세ㅇ...”
하고 뒷말을 이을라치면 나를 보지도 않고 그 남자는 인사보다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작은 행위로 대신했다
사실 나는 그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주제에 예의를 논하기에는 웃기지만 나의 말 한마디를 받아주지 않는 그의 행동에 나는 약간의 빈정이 상해 있었다.
인사할 때마다 나의 목소리는 올라갔지만 반비례로 그의 행동은 더 작아지기만 했다.
굳이 따지자면 남자의 행동은 무시에 가까웠다.
저번에 계단에서 뛰지 말걸 그랬나.
약간의 후회도 잠시였다.
어떠한 인사 한마디도 받아주지 않는 그 남자에게 이상한 오기가 생겨나고 있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면 이웃끼리 꼭 친하게 지내야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막상 이렇게 인사도 안받아주는 이웃을 만나는 것이 생각보다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남자는 시선을 잡아끄는 특징이 있었다.
특정한 어떤 것 때문에 눈길을 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남자 자체가 뇌 속의 신경을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있다는 것은 그 남자를 보면 누구나 인정할 사항처럼 보였다.
나는 계속 그 남자에 대해 생각하고 침대를 발로 차는 내 행동도 마음에 차지 않았으며 지금 이홍빈에게 이 이야기를 묻고 있는 것는 내 자신도 싫었다.
“이홍빈. 이웃과 가까워 지는 방법은? 929초내로 서술하시오”
“뭐야. 수업 끝나고 마실 것 사준다더니 이런거 물으려고 불렀냐.”
녀석은 역시 탐탁지 않은 얼굴로 내가 사준 라임에이드를 쭉 마시더니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하다 한마디를 툭 던졌다.
“새로 이사온거니까 떡이나 음료수 같은 거 주고 통성명이라도 하던지. 저번에 말한 옆집 사람 남자라고 안그랬어?”
“어. 생물학적으로는 남자로 보이던데.”
내 말에 너는 기분이 안좋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듯이 탁자 밑의 내 발을 툭 차며 내 눈을 빤히 보았다.
그리고 넌 또 날 생각하게 하는 말을 던진다.
“내가 조언자로 보이나봐? 이제는 아무거나 막 묻네. 정작 물어야 할 것은 안 묻고.”
‘정작 물어야 할 것’ 이라는 너의 말에 대해 뭐냐는 듯 눈썹을 들썩여 물었지만 너는 시큰둥하게 다른 주제로 돌릴 뿐이었다.
그런 녀석을 나도 빤히 보다가, 도돌이표가 많은 악보와 같은 돌고 도는 대화 속에서 나도 뜬금없이 아까의 너의 말에 대한 대답을 말했다.
“ 너 그 날 이후로 조언자 해주기로 한 것 아니었어? 난 그날 이후로 문제 되는 것들은 너한테 묻는데”
너는 내가 말한 그날이 언제인지 듣자마자 알아차리고는 시큰둥한 표정을 풀어보였다.
“구보. 조언자 말고 서술자. 그거는 해줄게”
난 저 녀석의 문과적인 말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다시 묻지는 않았다.
다만, 내 대답이 그 녀석에게는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평소와 같이 살짝 떠는 손으로 라임에이드를 마시지만 숨기지 못하고 올라가는 것는 녀석의 입꼬리가 이홍빈의 기분을 증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