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의 클리셰 02
"안녕."
웃는 얼굴에 누가 침을 뱉을 수 있겠어.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는 정재현을 차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순간 사고회로가 정지되었지만, 어색하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응했다.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소원이 없을 것 같은데.
정재현 자리는 참 정재현다웠다. 눈부신 햇살이 비추고, 적당한 온도의 바람이 부는 자리. 커튼이 나부끼면서 정재현의 머리칼이 같이 나부꼈다.
1학년과도 같은 층을 쓰는 터라, 복도를 오갈 때마다 1학년들의 시선이 우리 반에 집중되곤 했다. 정재현 때문일 거다.
"일찍 왔네."
".....일찍 일어났는데 잠이 안 와서. 할 것도 없고."
"아, 그래. 너랑 나밖에 없네."
"......."
"조용해서 좋다."
대충 대답하곤 할 것을 찾으려 노력해 봤지만, 공부 하는 애 옆에서 딴짓을 하기가 민망해 결국엔 사물함으로 향했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걸. 아니면 화장실이라도 갈 걸. 원래 정리를 잘 안 하는 편이긴 해도.... 그래도. 사물함이 내 책들을 안 토해내고 잘 버티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사물함 문을 열자마자 책이 쏟아졌다. 후드득, 하는 큰 소리를 내며 책들이 쏟아지자 시선이 여기로 쏠릴래야 안 쏠릴 수가 없었다.
진짜 죽고 싶다. 놀란 표정을 지은 정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겉잡을 수도 없이 쏟아지는 책들을 주워 주었다.
진짜 이런 거 안 해 줘도 되는데.... 넌 너 할 거나 해 줘, 제발.
"아. 괜찮아. 정말로. 내가 할게."
"너 다 못 들 것 같아서 그래."
"나 히, 힘 세. 보면 알겠지만 되게 튼튼하거든?"
"아니, 안 그래 보여."
정재현 앞에선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괜히 내가 뭔갈 잘못한 것 같고, 실수라도 하면 무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비교가 돼서인지, 철두철미한 정재현에 반해 난 너무 덤벙거리는 성격이라 민망해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 순간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언뜻 보이는 정재현의 표정이 없는 얼굴은 나를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안 그래 보여. 단호하게 말한 정재현이 책을 안에 넣어 주었다.
굳이, 자기 일도 아닌데 호의를 베풀어주는 모습이 고맙기는 커녕 미웠다.
"미안, 괜히."
"미안하다는 말 말고 고맙다고 해 주면 안 돼?"
"......."
"미안하다는 말은 너가 잘못했을 때 쓰는 거지. 너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버릇이야."
정재현이 하는 말이 짜증나는 건 사사건건 다 맞는 말이라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원래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너무 부끄럽고 민망했다.
차분하게 내뱉어진 말들에 할 말이 없어졌다.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내가 싫었다. 잠시 어두워졌던 교실에 다시 햇빛이 들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 왔다. 마저 사물함을 정리한 정재현이 문을 닫으며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눈치였다.
"시민아."
"......어?"
"나는, 너랑 되게 편해지고 싶거든."
"......."
"어색한 거 싫어해, 나는."
어색한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 근데 너랑 나는, 평생 어색한 사이가 될 것 같은데 어떡하지.
정재현이 하는 말이 빈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재현이 웃는 얼굴로 날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재현을 묘하게 질투하듯 싫어하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이니까, 없어 보이니까.
-
수업 시간, 정재현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눈빛이 바뀐다. 안경을 끼고 칠판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정재현의 시선이 낯설었다.
차가워 보였다. 이내 다시 눈길을 돌리고는 나 역시 칠판과 선생님을 응시했다. 재현이가 한 번 나와서 풀어 봐. 설명해 봐.
정재현 없으면 아주 그냥 수업을 못 하시겠네요. 잠깐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늘 그렇듯 정재현은 칠판 앞으로 나와 문제를 쓱쓱 풀었다.
거침없이 칠판을 누비더니, 보드마카를 내려놓곤 자리로 돌아오는 정재현이었다.
"너네 반은 좀 각성할 필요가 있어."
"......."
"어떻게 수업을 제대로 듣는 사람이 재현이 밖에 없을 수가 있니?"
"아, 쌤. 섭섭하게. 저 엄청 열심히 듣고 있는데요."
"아니.... 어. 그래. 동혁이 너도. 물론 재현이만 듣는 건 아니지만...."
저 선생님은 좀 심하게 정재현을 좋아한다. 애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재미라고. 정재현한테 미쳤다고 해서 재미다.
멋쩍게 웃는 정재현이 참 속 편해 보였다.
한동안 내 목표는 정재현을 이기는 거였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정재현을 한번 이겨보겠다고 죽을 각오로 공부를 했다.
그 때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지금 공부가 물려서 하기 싫은 걸까. 죽어라 해서 전교 10등은 해 봤지만 정재현의 턱끝까지도 못 따라와 봤다.
왠지 모를 열등감과, 내 안의 옹졸함이 정재현을 보면 극대화 되는 것 같았다. 왜인지는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정재현 이겨보겠다고 허송세월 보낸 게 결코 헛고생을 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정재현은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애다.
"재현아, 너 안 힘드냐?"
"어? 아니. 괜찮아."
"괜찮기는.... 너 어제 또 밤 샜으면서."
"할 걸 다 못 해서...."
저런 애들이면 나 공부 하나도 안 한다고 엄살 떨 법도 한데 정재현은 그러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점심시간에 애들 따라서 농구, 축구 다 하는 것 같아도 그 시간만 빼면 공부밖에 안 한다. 정말 쉬는 시간에만 쉬고 나머진 공부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살 하나 없이 예쁘게 마른 몸이 얄미웠다. 밤 새는 건 일도 아니겠지.
다들 정재현이 강철 체력에 철인쯤은 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오늘 아침에 정재현이 물병에다가 커피를 두 봉이나 뜯어서 넣는 걸 봤다.
"재현아. 어제 왜 내 문자 답장 안 했어."
"아.... 미안. 못 봤어. 문자 했었어?"
"응. 두 통이나 보냈는데.... 너무하다, 너."
"진짜 못 봤어. 미안해."
정재현 보러 출석도장 찍듯 밥 먹듯이 우리 반에 오는 여자애다. 둘이 같이 있는 걸 보면 저거야 말로 그들이 사는 세상이구나 싶을 정도로 예쁘다.
그냥 공주님 같다. 정재현이랑 딱 잘 어울린다. 얼굴이 살짝 까무잡잡한 것만 빼면, 나무랄 데가 없다. 내가 자리만 비웠다 싶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가서 앉아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긴 생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정재현 옆에 앉아 있는 그 여자애였다.
"둘이 사귀냐?"
"정재현 표정 봐라. 사귀는 것 같냐?"
"왜. 예쁘잖아. 나 같으면 뽀뽀한다."
"정재현이 쟤 싫어해."
"지가 뭔데? 웃기네?"
이동혁의 말에 먹던 우유를 뿜을 뻔 했다. 지가 뭔데 싫어하길 싫어해? 웃기는 자식일세?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이동혁이 주위를 살피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댔다.
"정재현은 저런 애 싫어해."
"저런 애가 뭔데."
"부담스럽대."
"......참나. 황홀한 줄 모르고...."
"정재현 원래 어색한 거 싫어해. 그래서 웬만하면 다 편하게 지내려고 그러는데 걔랑은 굳이 선 긋잖아."
걘 왜 너 같은 애한테 죽고 못 살까나. 이해가 안 되네.
좀 더 양질의 인생을 살기 위해선 그렇게 살면 안 되는데 말이지. 그치?
영문도 모르고 정재현 옆에서 살갑게 웃고 있는 여자애가 정말 불쌍해 보였다.
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자리를 뺏는 느낌이라 내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위를 맴맴 도니,
정재현이 기다렸다는 듯 비켜달라는 식으로 그 여자애한테 말을 걸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종 아직 안 쳤는데?"
"근데 여기 네 자리 아니잖아."
제법 날 선 말투에 여자애도 움찔했는지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의 주인인 나와 눈이 마주쳤다. 맨날 실실 웃는 모습만 봐서 몰랐는데, 눈매가 참 매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 자리 앉는 건데도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눈칫밥 먹는 기분....
"아직 종도 안 쳤는데 뭐하러...."
"그냥, 너가 앉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아....."
"그리고.... 내가 원래 불편한 사람이랑은 오래 말을 못 해."
이동혁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정재현은 어색한 거 싫어해.
표정 없이 그 여자애를 불편한 사람, 이라고 지칭하는 정재현이 어딘가 모르게 낯설었다.
맨날 모두한테 친절한 모습만 봐서 그런가. 이게 진짜 정재현인가 싶기도 하고.
"그럼 싫다고 하든지. 쟨 모르잖아."
정재현이랑 말하다 보니 어딘가 모르게 울컥하는 구석이 있었다.
예전에 내가 짝사랑했던 애도 이랬었지. 뒤에선 나 별로라 해 놓고 앞에서는 티 하나도 안 내고....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 같지도 않은 추억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서.
나랑 너랑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거 자체가 걔한텐 엄청난 상처거든?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정재현에게 성을 냈다.
"진짜 너 너무한다. 그러는 거 엄청 상처거든? 진짜?"
"전에 몇 번 말했었어."
"......."
"계속 이래서 포기한 거야."
"......아. 그래. 그렇구나."
생각보다 심각한 정재현의 말투에 꼬리를 내렸다.
어색함이 맴돌았다. 정재현도 날 분명히 싫어하겠지. 어색하고, 불편하고.....
괜히 오지랖만 넓고. 욱하고.... 이래라 저래라 감놔라 배 놔라 까칠하게 굴고.
"이동혁이 그러더라. 너가 엄청 나 불편해 한다고."
".......이동혁 진짜."
"사실인가 봐?"
제법 뾰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정재현이었다. 턱을 괴고 날 바라보는 시선에 힘이 있었다.
도무지 그 시선을 견딜 수가 없어서 잘못한 강아지마냥 교실 바닥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내 팔자야.
쟤를 죽여버리든가 해야지. 분명히 친목 도모를 위한답시고 저런 걸거야.
"나 그거 듣고 솔직히 엄청 속상했어."
"......그, 그렇구나."
"난 너랑 어색한 거 싫거든."
너, 라는 말에 유독 힘을 주며 말하는 정재현이었다. 타이밍 죽이게도 정재현 뒤로 후광이 딱 비춰졌다.
애는 박애주의자인가? 모두랑 친하고 정답게 지내지 않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걸까? 간혹가다 그런 애들 꼭 있는데.
모든 세력을 회유하고 싶은 마음이 강한 아이일까.
눈치가 빠른 걸까, 아니면. 내가 자길 싫어한다는 걸 대충 눈치라도 챈 걸까.
부끄러웠다. 정재현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춰질까.
"시민아."
"......."
정재현이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내 이름을 나른하게 불렀다.
고개도 못 돌린 채로 곁눈질로 정재현을 바라보았다. 푸흐흐 웃은 정재현 머릿속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 가득 찬 건지 궁금했다.
어딘가 모르게 쎄했다. 바람이 불어왔다. 살랑 살랑, 기분 좋은 흔들림과는 다르게 손에 땀이 찼다.
"친해지자, 우리."
"......어, 어?"
"대답한 거다?"
"......."
"무르기 없어."
예상과는 다르게 해맑은 표정으로 친해지자는 말을 건네는 정재현이었다. 쟨 성격이 얼마나 좋으면 이러는 거야....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도 없고. 순간 정지된 사고회로에 어버버거리자 나를 향해 눈웃음까지 보이는 정재현이었다.
너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지능형 안티 이런 건가?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누가 나 좀 구해 주라....
"너가 궁금해."
꼬기로케의 주저리 |
최대한 이번 편에서는 재현이의 캐릭터를 잡아가 보려고 노력했어요. 반듯반듯, 남한테 피해. 상처 주기 싫어하고 옳지 않은 일은 서슴없이 고쳐주려고 노력하는 아이. 그냥 성격 좋고 인간 관계 원만하고 둥글둥글한 모범생 재혀니와 그런 재현이를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러분을 그려내고 싶었어요!
어떤 분께서 독방에 정재현 너무 완벽해서 좋아하기 자존심 상한다는 글 쓰신 적 있냐고 물어보셨는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그거 저 맞습니다.... 얜 너무 비현실적이야. 이러면서 갤러리 지분율 장난 아니구요... ㅋㅋㅋㅋ....
인문계 고3이라 자주 글을 올리진 못합니다만 한번에 많이 많이 올리도록 노력할게요 !!! 댓글이 생각보다 많이 달려서 놀랐어요 헝헝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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