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의 클리셰 01
지금 기분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책상 위에 놓인 시계를 보니 3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체감 시간은 3일은 된 것 같았다.
그냥 빨리 종이라도 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애꿎은 교과서를 매만지고, 시선은 철저히 책상에 고정시켜 두었다. 새파란 가을 하늘이 오늘따라 노래 보였다.
"왜 그렇게 말이 없어?"
"......."
"말 없는 편도 아니면서."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난 말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시끄러운 수준이었다. 민망했다. 뭔가 의도적으로 말을 아끼는 게 티가 나는 것 같아서.
사람 좋게 웃는 저 미소도,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도, 왠지 모르게 다 자존심 상했다. 일부러 눈에 힘을 더 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민망해 할 법도 한데, 계속 웃는 표정이다. 저런 것에 굴복하면 안 된다. 절대로. 결국엔 벌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뭐 좋은 일이라고 말을 해."
"......."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되는 건데?"
내가 들어도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는 저 아이가 별종으로 느껴졌다.
그래, 정말 하나도 안 기쁜데 내가 쫑알거려야 할 이유가 뭐가 있겠냐고. 그저 난 평소에 하지도 않는 책상 정리를 하고 있었을 뿐인데.
어색한 분위기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난 저 아이와 어색하더라도 이렇게 지내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그러고 싶었다.
"섭섭하다. 난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뭐?"
"잘 지내 보자고. 그런 얘기 할 줄 알았는데, 너가."
"......"
"이동혁한테도 그러길래."
정말 별종이다. 평범한 남자애였다면 분명히 비속어 한 번 쯤은 썼을 법도 한데. 투덜거리며 말하는 모습이 많이 낯설었다.
나는, 있잖아. 너가 정말 적응이 되질 않아. 얘랑 더 얘기했다가는 피가 마를 것 같았다.
살짝 나를 장난스레 흘겨보며, 책상 위에 옥의 티마냥 굴러다니던 볼펜을 내 필통 속에 넣어 주었다.
난 뭔가 얹힌 것만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
정재현은 그냥 전형적인 모범생의 표본이었다. 굳이 나서지 않는데도 애들 추천으로 반장을 도맡아 했고, 공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단정한 모습이 말해주듯, 항상 깔끔하고, 말끔했다. 빈틈 하나 없었다. 정재현한테 완벽하다고 말하는 것도 지친다는 애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자동 완성 기능처럼 정재현이라는 이름 석 자엔 완벽하다는 말이 붙어야 한다고. 그 정도였다.
그냥 간단 명료하게 말하자면 정말 사기 캐릭터다. 못 하는 게 없다. 애들 사이에서 '정재현이 유일하게 못하는 건 나랑 사귀는 거다'라는 말도 돌았었다.
"야, 솔직히 나중에 정재현 누구랑 결혼할까. 그 년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겠지."
"안 돼. 재현이 공공재야...."
"근데 존나 스윗하겠다.... 아내한테도 엄청 잘 할 것 같지 않냐...."
여자애들끼리 이 말을 하는 걸 여태까지 127127번은 들은 것 같았다. 남자애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정재현은 정말 범접할 수 없는 존재. 딱 이거였다.
선망의 대상 정도. 다들 정재현을 좋아했다. 나만 빼고. 이건 정말 사실이다.
재수 없다. 그 말이 딱 어울렸다. 난 이상하게 정재현이 재수가 없었다. 맨날 공부만 하는 주제에 쓸데없이 키가 큰 것도 재수가 없었고.
운동도 딱히 안 하는 것 같으면서 수행평가 할 때 늘 만점 맞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전에 내 앞자리에 앉았을 때 쓸 데 없이 어깨가 넓어서 필기가 안 보였던 것도 짜증났다.
피부 관리 하나도 안 하는 것 같은데 트러블 하나 안 나는 흰 피부도 마음에 안 들었고, 스윗한 건 하나도 모르겠고 부담스럽게 생겼다는 생각은 해 봤다.
그래도 멋 부린답시고 살짝 줄인 교복 바지도 마음에 안 들고, 다른 남자애들은 안 그러고 다니는데 단추까지 꼭꼭 잠근 채로 교복 입는 것도 재수 없어 보였다.
"재현아, 나 이거 좀 알려주면 안 돼?"
"뭔데?"
"이거 이해가 잘 안 돼서."
"아, 이거는."
혼자 있을 땐 무표정이었다가 애들이 다가온다 싶으면 웃는 것도 가식적인 것 같고.
예스맨도 아니고, 맨날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어딘가 모르게 부담스러워 보였다. 지가 무슨 연예인인가. 이미지 관리 하게.
과잉 친절. 정재현을 정의하기 좋은 말인 것 같았다.
이렇게 내가 정재현의 엄청난 안티라는 걸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정말 몰매를 맞을까봐.
아니면 애들이 뭔가 내가 삐진 게 있다고 생각해서 이상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강제 화해 같은 걸 시킬까봐 입을 싹 닫고 있는 중이다.
대충 눈치를 챈 건 이동혁 정도인 것 같았다. 나와 약 2달 간 짝을 한 이동혁은 워낙에 눈치가 빠르다 보니, 대충 알았을 거다.
"왠지 너 짝꿍 정재현 걸릴 것 같아."
"그런 말 하지 마라."
"왜? 너 정재현 싫어하냐? 정재현을?"
"아...아니. 그냥, 어, 그러니까. 걘 너무 예쁘게 생겼어."
"나도 예쁘게 생겼잖아."
이동혁이 아침에 한 말을 당연히 믿지 않았다. 확률이 얼마나 작은데. 정재현이 예쁘게 생겼다며 애써 핑계를 대 봤지만 본심은 숨길 수가 없었다.
난 정재현이 싫다. 그냥 재수가 없어서 싫다. 사람이 인간미가 없어 보여서 싫다. 뭔가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을 것 같고,
60억 지구에서 59.9999억명이 쟬 좋아해줄 텐데 굳이 내가 그 반열에 낄 이유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설마는 사람을 잡는다.
"시민아, 너 재현이 옆자리. 앞에 잘 보이지?"
"......나 시력."
"김시민 시력 1.3일 걸? 쟤 존나 몽골리안이 따로 없음."
아니라고 해 줘. 아니라고.... 이렇게 한 방에 골로 가는 건 너무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적응할 틈도 없이, 난 교과서를 들고 자리를 옮겨야 했다.
정재현은 전의 자리와 똑같은 자리에 걸린 건지, 그냥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체할 것 같았다. 무슨 죄 지은 사람처럼 의자에 앉아 짐들을 정리했다.
정재현이랑 말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근처에 있으면 항상 다른 데로 갔었으니까 없었겠지. 어색했다. 사이가 안 좋으면 성질이라도 부릴 텐데,
정재현은 나한테 잘못한 게 없는 걸 어찌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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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몇 시에 잤어?"
"......어?"
눈 떠 보니 벌써 문학 시간이 끝나 있었다. 아씨, 나 분명히 듣고 있었는데.... 고개를 들려고 하는데....
언제 침까지 흘린 건지 교과서가 젖어 있었다. 차마 정재현에게 그걸 보여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뭔가 수치스러움이 더 하다고 해야 하나.
그냥 정재현 말을 무시한 채로 가만히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는 와중에 내 눈 앞에 휴지가 흰 손이 보였다.
"너무 곤히 자서, 못 깨웠어."
"......."
"닦으라고."
죽고 싶었다. 그냥 웃어 넘길 일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재현 같은 애한테 이런 추한 모습을 들키는 건 정말 내 자존심이 용납을 할 수는 일이었다.
얼마나 날 같잖게 볼까.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빨개졌다. 도저히 정재현의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입가를 닦고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필기 못한 거 있으면 말 해. 보여줄게."
"......됐어."
"필요하면 말 해."
"됐다니까."
누가 들을까 봐 겁날 정도였다. 너무 본능적으로 튀어 나오는 날 선 말들에 순간 움찔했다.
허, 하고 웃은 정재현이 내뱉은 말은. 정말 날 자존심 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나도 안 추했어. 사람이 자다가 그럴 수도 있지 뭐."
"......."
"진짜야."
말을 마친 뒤 와이셔츠 소매를 걷으며 책으로 시선을 고정하는 정재현이었다.
정말이지, 정재현은 내가 싫어하기에 최적화 된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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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꼬기로케입니다 !
부족한 글솜씨지만 글잡에 입성하게 되었어요 8ㅁ8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 ♥
루키즈 때 민형이만 알았었고 민형이 사진만 간간히 찾아보다가 칠감 때 입덕했는데요.... 너무나 완벽한 남자 정재현을 좋아하는 게 너무 자존심이 상했어서 정재현을 최대한 멀리하려고 노력했었던 저의 경험이 생각나서 쓴 글입니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재현 좋아하는 거 은근히 자존심 상하지 않아요?ㅋㅋㅋ저만 그런 거라면........,,,,,,,,, 저만 그런 게 아니라구 해 조요.........모클이 쓰인 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