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닉- [호찡] [낑깡] [8월의 겨울] [봄꽃] [열시십분] [여름밤] [호시 부인] [디케이] [쑤하진] [아니아니] 캔버스와 물감 [물감 여섯 방울] 아무런 말이 없는 내 행동에 권순영은 그저 미소를 유지한 체 점심시간이 끝나겠다며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권순영을 따라갔다. "같이 밥 먹어줘서 고마워 세봄아" 반에 거의 다다르자 고개를 돌리며 말하는 권순영의 말이 참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같이 먹어준 건 오히려 권순영 쪽이었지, 내가 아니었다. '참, 이상한 아이' "아, 도착했다. 오후 수업도 잘 해" 뒷문에 다다르자 오른손을 들어 올려 흔드는 권순영의 행동에 나 역시 오른손을 들어 올려 두어 번 흔들었다. '잘 가' 라는 짧은 한 마디도 덧붙여서. 제 반으로 향하는 권순영의 모습이 작아질 때 즈음 뒷문을 열자 반 안에 있는 아이들의 시선이 향했다. 점심시간에 교실 안을 들어갈 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먼저 있는 것이 어색했다. 다른 아이들 역시 이 시간에 교실에 들어오는 내가 어색했는지 흘깃 눈을 흘겼다. 권순영을 만난 지 이 틀이 됐을 뿐인데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너무나도 많아, 신기했다. 자리에 앉아 아까 전 책상 속에 넣어뒀던 공책을 꺼내 들었다. 그림을 그리던 장 사이에 꽂혀있는 연필 덕에 한 번에 펼쳐지는 공책을 바라보다 연필을 잡고 종이 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하게 그어진 선들의 위를 진한 선들이 덮었다. 지우개를 잡고 몇 번을 움직이자 어수선한 선들이 정리되어 형태가 뚜렷해졌다. "아...." 눈 쪽에 연필을 갖다 대려던 중 점심시간을 마치는 종이 경쾌하게도 울려 퍼졌다. '다음, 다음에 그려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연필을 놓고는 공책을 덮어 가방 속에 넣었다. 완성은 다음에, 좀 더 나중에 해야겠다. “차렷, 공수, 선생님께 경례“ “안녕히계세요“ 무료하다면 무료할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인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생님이 나가시자 분주히 움직이는 아이들 사이에서 느긋이 가방을 챙겼다. `지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닫힌 가방을 메고는 이제 아이들이 몇 남지 않은 교실을 빠져나갔다. 발걸음을 움직여 향한 빈 미술실 속에서는 늘 그렇듯, 내가 도구를 펼쳐놓아 달그락 거리는 소리 밖에 울리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빈 캔버스를 보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수많은 캔버스들이 즐비한 사물함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여기 어딘가 있었는데. “아, 찾았다“ 수많은 캔버스들 틈 사이에서 꺼내든 것은 다름 아닌 두 손바닥 크기만 한 작은 캔버스였다. 약간 쌓여진 먼지를 털어내고는 눈앞에 캔버스 대신 손안에 들려진 작은 캔버스를 올려놓았다. '색들이 알록달록한 게 이쁘더라, 몽실몽실한 게 꼭 여러 솜사탕들이 흩어진 것 같았어' 급식실에서 배시시 웃으며 조잘거리던 부승관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 솜사탕. 문득 머릿속에 드는 생각에, 빈 캔버스를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생겼었더라, 솜사탕이란 거. 끝내 어떻게 생겼었는지 기억해내지 못한 나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솜..사...탕....' 솜사탕이라는 단어를 인터넷에 적어 검색하자 무언가를 잔뜩 뭉쳐놓은 듯한 모양이 나와있었다. "이게 솜사탕..?" 솜사탕이라는 말이 사실 욕이 아니었을까. 천천히 사진들을 내리다 이내 솜사탕 뒤에 한 가지 단어를 덧붙였다. '색' 그러고는 검색을 누르자 가장 위에 뜨여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솜사탕 색이 알록달록' 글을 들어가자 아까 본 사진들과는 달리 구불구불한 모양의 사진들이 띄워져있었다. "몽실몽실하다는 게 이런 걸까.." 알다가도 모를 부승관의 말에 괜스레 미간을 찌푸리고는 물감들에 손을 뻗었다. 색은 뭐, 그때 걸렸었던 그림에서 썼던 것처럼 만들면 되겠지. 물감에 적혀진 색이름들을 보며 손이 기억하는 양의 물감을 짜냈다.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쉬운 일이었다. 색들이 섞여 만들어지는 여러 가지 색들을 보다 붓을 들어 올렸다. 어찌 됐는 나에게는 모두 회색빛깔이었지만. "부승관한테는 다르겠지, 뭐" 적막 속을 울리는 짧은 한 마디가 끝나자 빈 캔버스 위로 붓이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수 없이 움직이는 붓들과 함께 비어있던 캔버스가 알 수 없는 색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I fell right through the cracks, and now I'm trying to get back' 정적이던 미술실을 가득 채우는 음악소리에 움직이던 손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캔버스 위로 마지막 움직임 후 붓을 내려놓았다. 다, 끝냈다. 수많은 물감들로 채워진 캔버스를 바라보다, 의자에 앉아 가볍게 목을 돌리고는 수건으로 손에 묻은 물감들을 대충 닦아냈다. 이제 정리해야지. 바닥에 놓인 물통을 두 손으로 잡아들어 올렸다. 찰랑, 거리는 물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수돗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중 수돗가 근처에 서 있는 사람의 인영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수돗가에 기대어 핸드폰을 바라보는 모습의 사람은, 영락없이 권순영이었다. 핸드폰을 바라보던 권순영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들어 올린 권순영이 웃음을 띠고 나서야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들고오느라 무거웠겠다. 미안, 네가 어디 있는 줄은 몰라서" 발걸음을 옮기는 나를 보고는 재빨리 달려온 권순영은 내 손에 들려진 물통을 보고는 자신의 손에 들어 올리며 영문모를 사과를 했다.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네가 왜 여기있어?" "어제, 물통 들고 있길래 수돗가 들렸다 오는 건가 해서" '안 틀려서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어 보이는 권순영의 행동에 질문과는 전혀 다른 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권순영은, 어제의 내 모습을 보고 추측만으로 이곳에서 날 기다렸다. "도대체 왜..?" "세봄아?" "내가 이곳에 안 들렸으면 어떡하려고 여기서 기다린 거야?" "아..뭐 어때, 결국에는 네가 왔잖아" 쏴붙이는 듯한 나의 말투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걸음을 옮기는 권순영의 모습에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바보같아" '쏴아아' 하고 쏟아지는 물 소리와 함께 내 말 역시 흘러나왔다. 사라져가는 물 소리만 들릴 뿐 권순영의 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긋이 윗니로 아랫입술을 눌렀다. "바보 같아?" "그러면 바보 해야지 뭐" 적막을 한순간에 깨버린 권순영의 말은, 날 당황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고민하는 듯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톡톡 치더니 해결책이라도 찾은 듯 말갛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면 바보 해야지 뭐' 그런 권순영의 모습에 난 그저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었다. 바보. 물통을 다 비워낸 권순영은, 만류하는 내 말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빈 물통을 들고 미술실로 향했다. '그러면 학교 끝나면 늘 미술실에서 그림 그리는 거야? '항상 이 시간까지 그려?' 라는 질문 등을 던지며. 미술실에 도착하여 문을 열어젖히자 옆에 있던 권순영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네가 항상 있는 곳이구나' 뭐가 그리도 신기할까. 나는 아무리 둘러봐도 알 수 없는 권순영의 반응이었다. "물통 줘, 금방 가방 챙겨서 나올게" 나의 말에 권순영은 자신이 들고 있던 물통을 조금 더 꽉 쥐어 보이고는 물어왔다. '같이, 들어가면 안 돼?' 그런 권순영의 말에 나는 잡히지 않은 물통의 손잡이 부분을 잡고는 말했다. '금방이야, 괜찮아' 나의 말에 권순영은 스르륵 손을 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놓아진 물통을 잡고는 미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물통을 내려놓은 뒤 책상 위에 올려놨던 가방과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아, 그림. 여전히 이젤 위에 올려진 캔버스를 바라보고는 가방을 열어 캔버스를 집어넣었다. 집에 가서 조금 더 손봐야지. 열려진 가방 문을 닫고 문 쪽으로 향하자, 기다리고 있던 권순영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내가 미술실을 나와 자물쇠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야 권순영의 입이 열렸다. "이제 가자, 세봄아" 그리고 난 그런 권순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자. 그렇게 다소 복잡하던 하루는 권순영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그날 집을 가면서 알게 된 건, 권순영은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도장에 다닌다는 사실과, 잘한다던 체육이, 태권도를 말했다는 사실이다. -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늦어버렸어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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