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닉- [호찡] [낑깡] [8월의 겨울] [봄꽃] [열시십분] [여름밤] [호시 부인] [디케이] [쑤하진] [아니아니] [슝] 캔버스와 물감 [물감 일곱 방울] 권순영과 함께 온 그날, 나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가방을 놓고는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로 풀썩,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침대 커버 위로 아무렇게나 이리저리 흩어지는 머리칼 사이로 구석에 놓인 캔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 그림 꺼내야 되는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터덜터덜 가방이 놓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익, 소리와 함께 열리는 가방에서 캔버스를 꺼내들었다. 아, 얘도 완성해야 되는데. 미완성된 캔버스를 바라보다 밀려오는 피곤함에 결국 이 캔버스도, 구석에 놓인 캔버스 옆에 자리 잡았다. "이렇게 자꾸 완성 미루면 안 되는데.." 아무리 그래도 작품의 완성을 미루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애써 닫히는 무거운 눈꺼풀을 손으로 문질러봤지만 눈은 오히려 더 오래 감겨있다 약하게 떠지기를 반복했다. 진짜, 왜 이러지. 결국 나는, 다음 날에 그날 누워있던 그 자세 그대로 아침을 맞이하였다. 나는 과도하게 잠을 잔 덕에 몽롱해진 정신을 겨우 붙잡고 학교에 등교했고, 늘 그렇듯 창밖을 보며 공책에 풍경을 그렸다. 그리고 또다시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권순영이 반으로 찾아왔다. '어제는 잘 잤나 봐, 얼굴이 밝다' 복도로 나오자 웃으며 말하는 권순영의 말에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볼을 쓸어내렸다. 또다시 권순영은 8시 55분쯤 인사를 건네며 자신의 반으로 향했고 나는 나의 반으로 가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부승관과 이지훈도 함께 찾아와 또다시 함께 밥을 먹었다. 또다시의 연속들인 그 행동들은, 물 흐르듯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고, 위화감이 없었다. 그다지 반찬을 잘 건들지 않는 내 행동에 젓가락을 들어 반찬을 가져가며 웃는 부승관과 그런 부승관의 젓가락을 치고는 조용히 다시 나에게 반찬을 옮겨놓는 이지훈, 조용히 나와 간간이 눈을 마주치며 밥을 먹는 권순영까지. 그리고 그런 셋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얘네는 진짜 뭐지?' 자연스러운 그들 사이에서 부자연스러운 건 오직 나 하나뿐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끝날 것 같다고 생각한 그들의 행동은, 그런 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말 어이없게도 두 달이 지난 7월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7월이 되자, 처음 만났을 때의 선선함은 온데간데없고 뜨거운 태양이 한가득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춘추복이던 교복은 하복으로 변해져있었고, 나와 그 아이들의 관계도 약간은 변해있었다. 아침마다 늘 찾아오는 권순영은 변함이 없었지만, 더 이상 애들의 관심이 크게 모여지지 않았고, 나는 점심시간에 매번 급식실로 향했다. 밥을 다 먹은 뒤 매점을 가자는 부승관의 말에 아직 들어갈 곳이 더 남았냐며 질색하는 이지훈과, 고개를 젓는 권순영의 모습에 부승관은 나에게 애처로운 시선을 보내고, 그런 부승관의 시선에 멋쩍게 웃어 보이면 눈앞을 가리는 권순영의 손이 보이는, 그런 약간의 변화가. "하여간, 이지훈은 매일 투덜투덜, 분명 이지훈은 전생에 스머프에 나오는 투덜이였을 거야" 결국 나는 부승관의 손에 이끌려 매점으로 향했다. 권순영은 선생님의 부름으로 불려갔고, 이지훈은 그런 부승관을 보며 헛웃음 치더니 실컷 먹고 오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이지훈 덕에 부승관은 손으로는 부산히 음식들을 고르면서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였다. 투덜이는 오히려 부승관 같은데. "그래서, 김세봄 넌 뭐 먹을래?" 조잘거리는 부승관을 바라보다 갑작스레 고개를 돌려 묻는 부승관의 말에 당황해 그저 바라만 보자 부승관은 한 쪽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툭툭 치더니 말했다. "내가 사줄게, 이거 흔치않은 기회니까 얼른 골라" 어린아이가 먹을 걸 사주는 듯한 부승관의 모습에 푸스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 나는 이거" 주위로 시선을 돌리자 눈에 보이는 초콜릿을 집어 부승관에게 건네자, 부승관은 '뭐야, 초콜릿 하나?' 라며 되물었다. 괜찮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니, 입술을 쭉 내밀었다가 다시 들여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김세봄, 욕심이 없어요 욕심이" 그렇게 말하며 계산대로 걸어가는 부승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몇 걸음 걷던 부승관이 이내 뒤를 돌아 물었다. "안 가?" "어..? 아니야 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는 조금 빠르게 부승관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욕심이 없나. 밀려오는 생각에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지금도 충분히, 욕심내고 있는 중인데. * "자, 이만 인사하고, 세봄이는 잠깐 남아서 선생님 좀 보고 가자" '안녕히계세요', 교실에 울리는 인사 소리와 함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소리들이 잔뜩 들려왔다. 싸여져 있던 가방을 들어매자, 교탁에 있던 선생님께서 따라오라며 손짓을 하고는 교실을 나섰다. "다른 건 아니고, 이번에 미술 대회 팸플릿이 나와서, 세봄이는 당연히 나갈 거지?" "아..네" 선생님을 따라 교무실에 들어서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열이 오른 얼굴을 식혔다. 자리에 앉아 책상 위를 살피던 선생님께서 건네신 건 다름이 아닌 미술대회 팸플릿이었다. '당연히 나갈 거지?' 뒤따라 오는 선생님의 말에 짧게 대답을 하며 팸플릿을 건네받았다. "그래, 세봄이는 원래 잘했으니까" 그런 내 행동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고하라며 말을 건네는 선생님께 가볍게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섰다. 복도에 더운 공기가 훅, 온몸에 끼쳐왔다. 벌써 대회 시즌이구나. 손에 쥐어진 팸플릿을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 조금씩, 욕심을 내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다른 사람 눈에는 전혀 알 수 없겠지만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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