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항력
11
나는 문득, 죽고 싶다고 느끼곤 한다.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감정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아주 확실히 하자면 살고 싶었다고 생각한 적 또한 없었다. 언제나 살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고, 언제나 죽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것은 불행하게도 철옹성 같은 삶이었다. 어쩌다 그것의 감정이 더 거세게 몰아치는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더욱 극심한 자기혐오에 빠졌었고, 그곳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 뿐이었다. 나를 절망의 수렁으로 빠지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나는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들은 내 주변을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었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나를 집어삼키려는 것들에 익숙해지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고요 속의 폭풍 같던 저녁식사가 이루어진 지 어언 한 달이 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일부로 지민에게는 그것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으면 꺼냈지, 내가 먼저 언급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먼저 말을 꺼낸다고 하더라도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아할 것 같았다. 10월에는 다시 발표회가 있을 예정이었다. 일주일도 남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에만 신경 쓴다고 하더라도 힘에 부칠 것이 분명했으나, 지민은 그 외의 것들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으니 나날이 쌓였을 그의 피로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약 한 달간 그와 나를 연관 지어 생각했다. 같을 줄만 알았던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내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거나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등의 쓸모없는 짓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제야 확실히 알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와 나는 많이 같았고, 또 많이 달랐다. 결론을 도출해냈을 때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 나는 미리부터 짐작을 해두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가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미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거야? 목적어가 빠진 문장이었으나,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명확해서 그가 뜻하는 바를 알아차리기 쉬웠다. 그가 내뱉은 말은 한숨처럼 저 속 깊이부터 타고 올라와 바깥으로 흩어졌다. 나는 감히 내가 생각한 말을 입 밖으로 뱉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잘못한 것은 그도, 나도 아니었다. 잘못도 없었던 우리가 누군가의 잘못을 이해해야만 한다니, 어째서?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물음이었다. 나는, 우리는 이토록 많은 상처를 받았는데, 이미 큰 균열이 눈동자에 자리 잡았는데 그들의 잘못까지도 이해를 해주어야 한다니. 우리가 바란 것은 사랑이었고, 그 크기까지 제멋대로 바란 적은 없었다. 나는 지민이 돌이킬 수 있다면, 돌아가길 바랐었다. 이제야 머릿속이 물음으로 가득 차는 것은 참으로 모순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에게 함부로 내 생각을 말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나와 그는 다른 삶을 살아왔다. 나는 정확한 그의 인생을 알지 못하고, 그 역시도 내 정확한 인생은 알지 못한다. 서로가 아니라 당연한 거였다.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내 입장에서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지민이 다른 선택을 한다면 그는 후회할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어쩌면 애증의 대상일지도 몰랐다. 아주 두려우면서도, 반대로 사랑을 받길 원하는. 그의 가슴 속에 남은 어린 아이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가 대답을 할 수 없는 물음을 내게 스치듯 던질 때마다 말없이 그의 옆을 지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나는 그의 옆에 있을 거라는 침묵의 맹세였다.
발표회는 개인별로 준비하게 되었다. 지민도 나도 각자의 페이스만 유지하면 됐기에 딱히 큰 부담을 가지진 않았다. 사실, 부담을 가지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나 이번 발표회에는 평가원들로 외부인이 참석하기 때문에 더 신경을 썼어야만 했기 때문에 부담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꽤나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컨디션도 괜찮았고, 그렇다고 연습을 하지 않아 실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의 안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안정, 나는 그것을 떨친 채였다. 무대에 올라선 지민을 응시했다. 그의 몸짓은 언제나 매끄러웠으며, 안정적이었다. 그를 보면 자연스레 시선이 따라갔다. 그가 손을 뻗은 동작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무대에 올라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며 손을 뻗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동작들을 반복했을지. 그의 몸짓에 담긴 그를 괴롭히던 고뇌들, 그의 생각들. 나는 그것들을 모두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거대한 것이었고, 내가 그것을 보고 싶다고 하더라도 나는 감히 헤아릴 수조차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몸짓으로 하여금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도록 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순식간에 그의 고뇌를 함께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의 무대가 끝나고 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고막이 터질 것만 같은 큰 박수갈채는 나를 가두고 있는 그 세계를 깨지 못했다. 묵묵히 그의 몸짓을 떠올렸다. 감히 잊히지 않을 동작들, 그의 몸이 이루고 있는 선들. 환한 빛 아래 선 그의 아래로 자리 잡은 그늘들, 바닥으로 추락하듯 떨어지던 땀방울까지 그것은 보지 않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내 발표회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빛 아래서 잘 보이지 않던 건반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뿐이었다.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귓가로는 아무런 소리조차도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갓 잠에서 깨어난 것 마냥 몽롱한 것 같기도 했다. 꿈인 것만 같아 정신에 잡음이 스며들려는 찰나, 울리는 피아노 소리에 눈앞이 유채색으로 환하게 트였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었으며, 실수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아직까지도 내 앞에서 지민이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나비를 연상시키던 그의 몸짓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유연한 나비, 내 연주의 주제였다. 무엇과 비교해도 그것을 잘 표현해낼 사람은 지민밖에 없었다. 여전히 그가 춤추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나는 손을 움직였다. 이것은, 분명하게도 안정이었다.
큰 박수소리가 귓가에 멍멍하게 울렸다. 소리가 정확하게 들려오지 않아 날카로운 박수소리가 묵직하게 들려왔다. 허리를 굽혔다. 다시 고개를 들었고, 나는 짧은 순간 내로 지민을 찾고 싶었으나,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다. 그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굳은 표정을 유지한 채로 계단을 내려왔다.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 굳게 닫혀 있어야 했던 문이 살짝 틈을 남긴 채로 열려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별다른 힘을 주지 않고 문을 슬쩍 밀자 안에서 누군가가 잡아당긴 듯 문이 활짝 열렸다. 안에서 문을 연 사람은 지민이었다. 그는 열린 문에서 손을 뗀 채였다. 그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작게 미소 지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그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거였다. 그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찾을 수 없는 그를 보며 내가 본 그는 신기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으나, 내 앞에 선 그가 그것을 부정하려 들기라도 하는 듯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그의 검은 앞머리가 축축하게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손을 뻗어 그의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냈다. 그러나 머리칼은 여전히 축 쳐져 있을 뿐이었다. 내 다음 차례의 학생이 무대에 올라오기 시작하는 듯 바깥이 다시 조용해졌다. 급하게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왜 여기 있어?”
“그냥.”
“그냥?”
“응. 그냥.”
그의 볼이 여전히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직도 더운 숨을 내쉬는 것만 같은 그를 보며 손부채질을 했다. 효과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름 시원하다는 착각이라도 불러일으키려는 행동이었다. 그가 다시 웃으며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털어냈다. 반대쪽 손으로는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이제 나가자. 내 목소리가 작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음향을 다른 곳에서 담당한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그와 내 모습이 보여 지는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해왔으나 굳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이 평소보다 뜨거웠다. 잘했어. 먼저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그의 작은 목소리가 내 머리를 강하게 울렸다. 어찌나 강한 한 마디였던지 머릿속을 어지럽게 뱅뱅 돌며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형체도 없는 그 말이 자취를 감추지 않기를 바랐다. 그 음절, 음절을 나는 곱씹고 또 곱씹었다. 가슴이 세게 뛰었다. 내 의지대로 제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걸음을 멈추고 난 뒤에도 지민은 나보다 걸음을 먼저 하지 않았다. 내 감정을 이해한다는 듯, 어쩌면 자신의 감정인 것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보이지 않는 숨이 잘게 흩어지는 것 같았다. 마침내 나는 다시 걸음을 뗐다.
문을 열고 나서자 저 너머로 평가원들의 자리가 보였다. 아른거리는 것만 같은 시야에 눈을 깜빡거렸다. 앞에 보이는 여자는 내 환상이 아니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뜨자 명확한 형체가 눈으로 들어왔다. 다시 멈춰선 걸음에 지민이 왜 멈추어 섰냐는 듯 물음을 담은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한 번 보았다가 숨을 들이마시곤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내 친모였다. 숨을 멈춘 것은 자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조건반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한 걸음 물러나 그의 등 뒤로 내 모습을 감추었다. 감추었다고 해서 나를 찾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대로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대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울리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매웠다. 숨을 마음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턱 막혀 오는 숨이 자꾸만 끊겼다. 왜, 지민이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 상태로 나는 다시 앞으로 튕겨져 나오듯 했다. 꽉 붙잡힌 팔뚝이 아렸다. 금방이라도 뼈가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발뒤꿈치에서 밀려오던 그 고통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통증이 밀려왔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깨물린 입술로도 그 고통을 잊을 수 없었다.
“네가 왜 여기!”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별다른 말이 나오기도 전에 지민이 먼저 말을 끊었다. 무릎부터가 벌벌거리며 떨려왔다. 그가 팔을 뻗어 내 몸을 자신의 뒤로 밀어버린 덕에 그녀는 내 팔을 놓을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녀와 조금 멀어질 수 있었다. 울컥하고 토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단박에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것만 같았다. 그가 무어라 말을 더 하려했으나 그의 옷을 약하게 잡아 당겼다. 그제야 그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두었다. 아득한 시야가 금방이라도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팔을 끌었다. 급하게 비상구로 걸음을 옮겼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녀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숨을 다시 내쉬던 중, 나는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우리를 따라 비상구까지 쫓아올 사람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얼마나 보지 않았다고, 고작 3년이었다. 악몽 같던 그녀의 존재를 잊을 수는 없었으나 직접적인 형체를 보지 않았던 것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맴도는 그녀의 욕지기는 여태껏 나를 괴롭혀왔다. 눈이 자꾸만 감겨왔다.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었다. 지민이 다시금 나를 끌어당겼다.
“왜 자꾸 따라오시는 거죠?”
“내가 지금, 지금 저 년…, 아니 저 애랑 할 말이 있어서, 지민 군. 잠시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의 이름에 나는 숨이 막혀왔다. 그녀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싫었다. 그의 고유의 것을 더럽히는 것만 같았다. 지민이 내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나는 그것에 다시 정신을 다잡았다. 그녀가 지민을 안다는 것도 싫었고, 나 때문에 그가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애초에 내가 진즉 죽어버렸으면 이렇게 될 일이 없을 거였다. 나는 죽었어야만 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고민하지 말았어야 했다. 눈물을 매달고 겁에 질려 두려움에 목매이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고민을 했던 선택지는 삶과 죽음이었고, 내가 택했던 것은 애달픈 삶이었다. 나는 그것이 내 과오라는 것을 알지 못했나. 그 과오는 이렇게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것인가. 지민은, 그는 해를 입지 않을 수 있나. 두려운 것은 나 하나로 족했다. 그까지도 내 고통에 허덕이게 하기 위해 그의 손을 잡았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왜 지금과도 같은 내 앞날을 보지 못해서 이런 결과를 가져오고야 마는가. 결국 잘못된 것은 나였나. 머릿속이 어지러운 물음으로 가득 찼다. 허파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아무리 숨을 들이마셔도 숨이 부족했다. 그녀를 경계하는 듯 나를 다시 뒤로 밀어내는 그에게서 그의 본연의 향이 잔뜩 끼쳐왔다. 나는 그것이 내 숨이라도 되는 듯 마음껏 들이마셨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기분이었다. 괜찮아? 작게 들려온 그의 물음이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 소리를 처음 들은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턱은 덜덜 떨려왔지만 그것을 티내고 싶지는 않았다.
“할 말이 있으니 잠시 자리를….”
“여기서 하세요. 저 있는 곳에서.”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참으로 익숙한 색이었다. 그녀의 입술 색은 그녀의 본래 색이라도 되는 듯 변치 않았다. 그것은 표독스럽게도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나는 그가 내 울타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평소 벗어날 수 없던 그 고통의 울타리가 아닌, 아주 다른 의미의. 실로 익숙지 않은 것이라 나는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잡은 그의 손 위, 그의 팔뚝을 다른 손으로 잡았다. 손끝으로 피가 몰린 듯 손을 펴기도, 굽히기도 힘들었다. 손끝이 땡땡하게 부어오른 것이 퍽 고통스러웠다. 다행히도 눈물은 새어나오지 않았다. 지금 흘려야 했을 눈물을 이미 이전에 다 뽑아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말씀…, 하세요.”
“네가 왜, 여기, 네가 여기를 왜.”
그녀가 말을 바르게 잇지 못했다. 툭툭 끊기는 말투가 이상했다. 그녀가 지민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지민의 눈빛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당장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가도 이상할 것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지민을 아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그와 나를 번갈아보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욕설도 마음대로 내뱉지 못했고, 아까처럼 내 팔뚝을 잡거나 그때처럼 나를 바닥에 눕혀 발로 걷어차는 등의 행위도 하지 못했다. 나는 별다른 폭력을 당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몸 곳곳이 아렸다.
“내가 죽은 듯, 죽은 듯…, 살라고 했을 텐데.”
“…….”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네 손부터, 네 손부터 박살….”
“그만 하세요.”
그녀가 자꾸만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녀의 입에서 단어가 튀어나올 때마다 나는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 느낌이었다. 지민이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안 그래도 날카롭던 그의 시선이 더욱 차가워졌다. 나는 완벽히 그에게 가려진 채였다.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발발거리던 숨이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내 숨인 것만 같은 그를 들이켰다. 비상구의 문이 벌컥 열렸다. 누가 들어왔든, 문제가 생길 상황인 것은 뻔했다. 나는 그녀가 아직까지도 두려웠다. 어째서 나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이렇게 괴롭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열린 문으로는 한층 시원한 공기가 새어 들어왔다.
“왜 여기 있어요. 한참 찾았네. …박지민 군?”
“…그게.”
지민이 대답 없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인 걸로 보아선 그녀의 재혼상대일 터였다. 예술계 집안이라더니, 나는 그 말을 쉬이 넘기면 안 되었다. 평가원으로 마주할 줄은 죽어도 몰랐던 것이었다. 한 발짝 옆으로 물러나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나 역시도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옆에 선 그 역시도 차게 굳은 지민의 얼굴을 보며 잔뜩 긴장한 채였다.
“지민 군, 오늘도 역시나 대단했고…, 혹시 누가 되는 행동이라도.”
“네.”
망설임 없이 그의 말이 끊기기도 전에 그의 대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내게 물었더라면 나는 겁을 먹은 채로 대답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고, 애초에 지민이 아니었더라면 묻지도 않았을 터였다. 나는 그것이 다행인 것인지, 그에게 해가 되는 일이었는지 나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요, 여보. 그녀가 그의 팔뚝을 잡았다. 차게 내려앉은 분위기를 깨고 튀어나온 목소리였다. 금방이라도 엇나가버릴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던 그녀가 저런 목소리를 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니. 내게는 실로 표독스러웠던 그녀가, 잔인하리만치 내게 고통을 주었던, 아니 지금까지도 고통을 주고 있는 그녀가. 지민의 확고한 대답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지민에게 어떠한 사람인지 나는 알 수 없었으나, 그들에게 지민이 어떤 존재였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지민에게 밉보이면 안 되었다. 지민은 그들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내 울타리인 지민은, 그들이 쉬이 내리 깔아버릴 수 있는 나를 감싸고 울타리를 높게 세워 감히 넘보지도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는, 뵐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그런 지민의 말에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만 애가 타는 듯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옆에 선 그의 팔뚝을 잡을 뿐이었고, 팔뚝을 잡힌 그는 내 손을 잡고 먼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계단을 거의 내려갔을 쯤에는 위에서 큰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코끝이 아리기 시작하더니 끝내 눈에서는 비죽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지민이 먼저 연습실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나는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가 손을 놓았더라면 나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맛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콱 막힌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가 걸음을 멈췄다. 연습실 건물까지는 아직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나무가 양쪽으로 줄지어 있는 길이었다. 그가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그가 내 귓가에 말했다. 나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였다. 입을 꾹 다물어도 막아지지 않는 울음소리가 잇새로 작게 새어나갔다. 그가 조심스럽게 내 등을 토닥였다. 지금은 누구의 시선도 상관이 없었다. 그는 내 울타리였고, 그의 안에 있다면 누구라도 나를 해 입히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는 결국 나를 연습실 건물까지 데려가지 못했다. 건물로부터 한참 떨어진 작은 벤치에 앉은 채였다. 그가 내 등을 일정한 박자로 두드렸고, 나는 그 박자에 맞추어 숨을 쉬었다. 그렇게 하면 안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의 두드림이 내 심장을 울렸다. 나는 문득, 그와 나의 흐릿했던 차이점이 명확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의 부모 앞에서 숨지 않았고, 나는 숨어야만 했다. 내 등을 두드리던 그의 손길이 멈추었다.
“…미안해.”
“…네가 왜.”
“그때 그 말.”
갑작스레 지민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사과였다. 그는 사과를 처음 해보는 사람마냥 어색했다. 세차게 불어온 바람에 나는 그 사과 역시도 저 멀리서 날아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때 그 말…, 나는 내 기억을 되짚어야만 했다. 하나하나, 다시 되짚은 기억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박살이라는 단어, 그리고 그의 말. 나는 그것을 잊지는 않았다. 잊을 수 있는 문장이 아니었을 뿐더러 굳이 잊으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그 말을 내뱉던 순간, 그의 눈에서 보았던 균열을 기억한다.
“됐어. 미안해 할 거 없어.”
내 말을 끝으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바람소리 덕에 정적은 쉽사리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는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으나, 그것이 폭풍처럼 찾아온 그녀 때문인지, 내 옆에 앉은 지민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는 내게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않았다. 또 다른 말을 이으려는 듯 나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다가도 입술만 오물거릴 뿐이었다. 좀처럼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기다림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널, …좋아해서.”
그가 끝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나를 좋아해서,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 역시도 내가 아니었다면 지민도 그런 모습을 볼 일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일은 순전히 내 탓이지, 그의 탓인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내 탓으로 치부하기에도 거북한 감이 있었다. 그가 나를 좋아해서, 그것이 내게 미안해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미루어 두었던 선택을 했을지도 몰랐다. 그가 고개를 잠깐 떨어뜨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좋아하면, 다 힘들어지는 것 같아서….”
“지민아, 나는 너 때문에 힘든 게 아니고.”
“…….”
“네 덕분에 안 힘들 수 있는 거야.”
너는 나한테 그런 존재야. 그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내 손이 차가운지 그가 놀란 듯 눈을 감았다 떴다. 그에 떨어뜨리려는 내 손을 다시 그가 잡아 자신의 얼굴 위로 포개었다. …고마워. 내 말에 그는 대답 하지 않았다. 설령, 너 때문에 힘들더라도 나는 괜찮을 거야. 말을 속으로 꾹 삼켜냈다. 그러니, 나를 혼자 두지 마. 역시나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말로 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조차도 말로 꺼내지 못할 만큼, 벅차오르는 내 감정이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갈색 빛을 띠고 있는 눈동자가 나를 잡아끄는 것만 같았다. 내가, 네 곁에 있을게. 지민이 말했다. 혼자만의 외침에 고개를 떨어뜨리려던 찰나였다. 나는 문득, 살고 싶어졌다.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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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신청 해주신 분들 사랑해요. 쪽쪽 ♥3♥
거부는 거부합니다.
계속 신청 받아요, 주저 말고 해주세요!!!
<사담>
토요일.. ㅠ
이제 정신 차리면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