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콩] Ever After
w. 빈진호
공주는 왕자에게 마녀로부터 구해지고, 성으로 돌아가 결혼을 해,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곳에서 평생 행복했을까?
"나 좀 이해해줄 수 없어?"
"넌 날 이해할 수 없니?"
형과 나의 끝은 늘 싸움으로 번져, 동화의 마지막처럼 찜찜하고 영 개운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사실은 반가워서 죽을 것만 같은데도 우리는 이렇게 싸웠다.
"난 이제 지쳤어."
좋자고 만났는데 또 내가 먼저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야 말았다. 하지만 형은 나를 달래지 않았다. 어짜피 매달릴 사람은 나란 것을 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파에 주저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현관 쪽에 서있던 요환 형은 머뭇거리며 나에게 무어라 말하려던 것 같았다.
"…집에 가 봐야 되는 거면 빨리 가."
"진호야."
"형수님, 기다릴 거 아냐."
무엇보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형이 유부남이라는 점이었다. 내가 신경쓰면 안 되는 것은 물론, 굳이 따지자면 이것은 요환 형의 외도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내가 질투를 하거나 해선 안 되었다. 오히려 내가 석고대죄를 하지 못할 망정. 천사같은 형수님이 내가 형과 외도를 하고 있을 줄은 아마 꿈의 꿈 속에서도 모르시겠지. 알게 된다면 졸도를 하실지도 몰라, 하고 생각하는 동안에 형은 이미 집을 나가고 없었다. 비리릭, 하는 도어락의 기계음만이 형을 배웅했다.
텅 비고 넓은 집 안에는 오롯이 나 혼자 뿐이었다. 괜찮아, 외롭지 않아. 나름 분위기 있고 좋은데. 그렇게 되뇌이고 되뇌어 자기 최면을 하며 한 손으로는 TV 리모컨을 더듬더듬 찾았다. 마침내 손 끝에 걸린 것이 있었는데, 그건 리모컨이 아니라 형의 핸드폰이었다. 큰일이네, 핸드폰도 안 가져가고. 중요한 연락이 많이 올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가락은 벌써 익숙하게 패턴을 풀고 있었다.
패턴을 제외하면 요환 형은 꽤 비밀이 없는 사람이었다. 직업상 아는 여자 지인들은 수두룩했으며, 갤러리에 있는 사진이라곤 형수님 사진이나 아직까지 연락이 끊기지 않은 스타판의 지인들, 아니면 지니어스 멤버들과 찍은 사진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형과 내가 함께 찍은 사진은 달랑 두 장 뿐이었다.
이만큼이나 시간이 없었나, 우리. 물론 사진을 찍자고 하는 사람도, 사진을 갖고 있는 사람도 나이긴 하지만, 어쩐지 좀 씁쓸해지고야 말았다. 우웅- 하더니 진동이 울렸다. 깜짝 놀라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니, '우리집♥'. 아마 늦은 시간이니 형수님이 전화하신 것 같았다.
"여보세요?"
[응, 자기야? 언제 와?]
아, 형인 줄 아셨나 보다. 그런데 형수님의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났다. 왜일까? 배신감? 아니, 아니. 미안함이 더 큰 것 같았다. 우리 형수님은 무슨 잘못이 있다고 하필 외도 대상도 나일까, 싶어서. 형수님이 오해하기 전에 말을 해야 했다. 큼, 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아. 안녕하세요, 형수님! 저 진호예요."
[어머! 진호 씨, 오랜만이에요~ 요환이 지금 촬영 중이에요?]
예, 라고 말을 하려다가 볼을 타고 쭉 흐르는 눈물 한 줄기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티테이블에 있던 티슈를 뽑아 급하게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요! 형이 저희 집에 일이 있어서 잠깐 왔다가 두고 간 것 같거든요. 아까 한참 전에 갔으니까, 제가 내일 전해줄게요."
[그래요? 미안해라. 그럼 진호 씨, 이만 끊을게요. 주무세요~]
들어가세요, 라고 말하자 전화는 끊겼다. 부러 걱정까지 해주시는 형수님의 천사같은 마음씨에 괜히 더 목이 메이고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난 이미 이만큼 지쳐있는 것 같았다. 전화해서 지금이라도 막 따지고 싶은데, 핸드폰은 여기 있고.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침대에 다이빙하듯이 누워 핸드폰 홀드 버튼을 눌렀다. 시간은 새벽 2시 19분. 아까 울어서 그런가, 잠도 오지 않는다. 아, 씻고 자야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은 귀찮아하고 있었다. 꾸덕꾸덕 일어나 침대에 걸터 앉으니 처음으로 섹스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땐 정말 잴 것 없이 좋았는데. 임요환이라는 존재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좋았는데. 그냥 싫은 것 없이 좋았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화장실로 가 칫솔에 치약을 묻히고 입 안에 집어넣었다. 추카추카하는 소리에 잠겨 곰곰이 추억을 되짚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왔던 길을 돌아가든이, 샅샅이, 그리고 멀찍이. 사색의 심연 속에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나온다는 답은 '권태기' 따위였다. 아니야, 아냐.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치약 거품을 뱉었다. 사색의 심연에 너무 도취되어 있었던 탓인가? 거품에 빨갛게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아, 피 나네. 피가 나는 것 같은 부위를 입술 위로 문질렀다. 녹이 슨 쇠를 핥는 것처럼 비릿한 맛이 났다.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었다. 대충 얼굴에 물을 끼얹어 고양이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닦아내며 방으로 들어왔다. 방바닥 어딘가에 수건을 내던져버리고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왔다. 씻고 나니 조금 졸음이 밀려왔다. 차라리 빨리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 눈 부신 햇살을 보고 싶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
시끄러운 알람에 눈이 버쩍 뜨였다. 새벽에 외운 대로 눈 부신 햇살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시간은 오전 9시 30분. 알람을 끄고 일어났다. 사실 오늘은 스케줄이 없다. 지인과의 만남도, 이렇다 할 촬영도 없었다. 느긋하니 일어나 씻고 나왔다. 주방으로 가서 인스턴트 커피를 타 마셨다. 냉장고엔 먹을 게 없어서 바나나와 식빵으로 대충 때웠다. 옷을 쟁여 입고 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다가 중간에 어떤 젊은 여자가 탔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려다가 나를 보고 귀엽게 깜짝 놀라더니 이내 안녕하세요, 잘 보고 있어요. 팬이에요. 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딱히 인사를 받아 줄 기분은 아니었지만 억지로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차라리 이렇게 귀여운 여자였다면 좋을텐데. 내가 좋아서 앓는 사람이, 요환 형이 아니라 평범한 여자였으면 덜 피곤했을텐데.
이번엔 지하 주차장으로 가 차를 뺐다. 막상 차에 타니 막막했다. 요환 형이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디야? 라고 문자라도 날리고 싶은데. 내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려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괜시리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어, 윤열이다. '지금 요환 형이랑 상암동에서 커피 마시는 중. 남자들끼리 이게 뭐래.ㅋㅋ' 깨알같이 사진도 올라와 있다. 두꺼운 허니 브레드에 요거트 와플 하나, 카페모카 하나랑 레모네이드 하나. 어쭈, 지 핸드폰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다른 애랑 놀아난다 이거지. 그것도 주말에?! 아, 이게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며 일단 상암동으로 출발했다.
상암동에 왔다. 주말은 정말 이렇게 한가한데. 토요일은 보통 우리집으로 찾아오건만, 어제 다툰 여파에 형도 삐친 건지, 아니면 내가 마음을 추스르길 기다린 건지, 정말 아무 연락도 없었다. 형을 만나러 가기 전에 차 안에서 전전긍긍하며 혼자 뭐라고 말을 꺼낼지 연습했다. 형, 이거 놓고 갔던데. 형, 핸드폰. 이거 놓고 갔길래 전해주러… 아이씨, 정말. 별 귀띔도 없는데 불쑥 찾아오면 뭐라고 생각할까, 그런 생각들이 더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
"어, 진호 형 아니에요?"
"어! 여긴 웬일이야, 약속 있어?"
막상 마주치니 뭐라고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아까 차 안에서 몇 번이고 연습하고 연습해서 그나마 솎아낸 그 말들이 혀에서만 빙빙 맴돌았다. 마치 그 말들이 오히려 내 혓바닥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아, 아냐. 이거 주려구."
형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한참을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 보던 형이 그제야 아- 하며 핸드폰을 받았다.
"일부러 갖다 주러 온 거야? 우리 진호 완전 착함."
엄지를 들어보이며 형이 웃었다. 그 모습에 꽁해있던 내 마음은 사르르 녹아버렸다. 형은 빈말을 하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형에게 빈말은 존재하지 않았고, 나는 그런 형을 잘 알았다. 표정도 그랬다. 정말 고마움을 느끼는 것처럼. 하지만 난 그게 싫었다. 누구에게나 그럴 거니까. 형의 몸짓 하나, 표정 하나, 말 한마디에 확 훈훈해지는 내 마음도 싫었고.
"아냐. 나 이제 갈게."
"진호 형, 벌써 가? 좀 있다 가지……."
어서 집에나 가버려야겠다, 싶어 홱 뒤를 돌았다. 뒤에서 윤열이 더 있다 가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끝끝내 형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 인간이 끝까지 날… 이라고 생각하려는 그때, 까톡! 카톡이 왔다. 뭐지, 하고 중얼거리며 그 자리에 서서 메신저를 확인했다.
[이따 집에 들릴게. ♥]
동화는 매번 다시 시작된다. 매번 그녀들은 버려지고, 마지막엔 매번 행복하게 살았다더라, 하는 똑같은 레퍼토리로. 그 안의 공주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하면서도 다른 내용의 동화를 기대한다. 엔딩의 레퍼토리가 운명적으로 다를 거라고 내심 기대하면서.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임은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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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판이 좀 이해가 안 가는듯... (자기가 써놓고도 이해 안 감)
뭐 어쨌든 이제나 저제나 임밖에 없다는 내용^ㅇ^!
필명을 콩이즈빈에서 빈진호로 바꿨당. 파머들아 잘 부탁함ㅎㅎ
+)참, 임이 그분하고 결혼했다는 전제 하에 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