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심리 01
5년 전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눈이 내렸고 바람도 불고 유난히 짜증스러운 그런 겨울날. 겨우겨우 하루를 보내며 스무살이 되어버린 나에게는 모든 게 유난스러운 하루였다.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집에서 눈칫밥이나 먹게 되어버린 지난 2개월은 나에게 일종의 지옥이었다. "수능 망했다며?"
아... 기분 더럽다. "야, 초딩 입 다물어" "수능 망해서 담배 피는거야? 스트레스 받아서? 냄새 나니까 좀 꺼" "야, 초딩. 냄새나? 그럼 너네 집으로 가 나 지금 기분 더럽거든? 시비 트지 말고 빨리 가라. 얼어 죽겠는데 왜 나와서 시비야 시비는." "넌 왜 얼어 죽을 것 같은데 나와있어? 아~ 수능 망한 거 창피해서? 엄마가 그러는데 넌 수능 망해도 대학 잘 가...ㅆ.... 아! 왜 담뱃재 튀겨!" 최여주 어쩌다 초딩한테까지 핀잔 듣는 신세 됐니.... 얼어붙을 것 같은 코를 쓱 비비며 집안을 힐끔 보았다. 드센 성격에 화려한 말발로 아줌마들 사이에서 소위 대빵 자리를 맡은 엄마는 여전히 신세한탄 중이었다. 내가 걜 어떻게 키웠는데! 그러게... 엄마, 날 어떻게 키웠어?
"내일 간다며... 그래서 그냥 마지막으로 인사나 할까 해서 나왔어. 그니까 켁켁 담배 좀 꺼 이야기 좀 하게!" 아무 생각없이 담배연기로 놀고 싶었다. 모든 게 거슬렸다. 내 앞에서 얼쩡거리는 옆집 초딩도, 코가 베일 것 같이 느껴지는 추위도, 훌쩍거리는 엄마 목소리도, 위로해주는 옆집 아줌마 목소리도, 20년 째 같은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는 나 자신까지. 내가 선택한 건 주저앉아서 울기보다는 하이텐션이 되는 거였다. 어서 집안의 신파를 끝내야 하니까. "야, 초딩. 니가 무슨 나랑 이야기야. 무슨 뭐 대화? 뭐 파워레인저? 쪼그만 게 무슨. 야 넌 어디 대학 가고 싶냐? 하버드? 옥스퍼드? 넌 어리니까 다 할 수 있어~" "하버드? 그게 뭐야? 난 대학교 그런 거 생각 안 해봤어. 아직 어리니까! 넌 꿈도 없다며?" "너 자꾸 반말 찍찍할래? 어휴 그래 너 어려서 좋겠다. 나 꿈 없다 왜. 그냥 돈 많이 버는 게 꿈이다 어쩔래. 야 됐어 저리가" 옆집 초딩 머리를 꽁 쥐어박고, 담배를 끄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엄마의 훌쩍거리는 목소리가 뚝 그쳤다. "여주 엄마, 그만 울어요~ 여주 인생 이제 한창인데! 여주야 내일 간다며 네 엄마 좀 달래봐. 어유 이 사람이 뚝 그치라니까! 우리 동혁이는 공부도 안 하고 애가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요즘 멍해. 여주 정도면 똑 부러지고 기똥차고! 좋은 딸이지!" 동혁이었구나 초딩 이름이... 동혁. 두 글자를 혀로 굴려본다. 투박한 듯 부드럽다. 그런데, 무슨 동혁이야? 김동혁? 이동혁? 최동혁? 갑자기 궁금해진 내가 선택한 건 엄마를 달래주기 보다는 옆집 아줌마에게 그 애의 성을 묻는 거였다. 뜬금없이. 엄마가 다시 울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이동혁이야 이동혁. 이제 초등학교 6학년. 근데 애 이름은 왜? 이웃 사이에 아직도 몰라..ㅆ.." "넌 엄마가 우는데도 달래주지도 않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찢어지는 엄마의 목소리. 외로운 사람이니까.... 외로운 여자니까. 난 두 눈을 꼭 감았다. 감은 눈 틈새에서 종종 눈이 마주치던 열셋의 초딩이 생각난다. 그리고 나의 열셋... 나의 열셋? 뛰놀기보다는 엄마의 성화로 학원에 뺑뺑이 돌려졌지 뭐... 별 거 없네. 나가는 이웃들에게 인사하러 밖에 나가니 초딩은 여전히 밖에 있다. 왜 저러고 서 있어? "야, 이동혁. 잘가라. 인사 고맙고."
이름 부르니 깜짝 놀란다. 진짜 애기 같네. 토끼 같기도 하고... 왜 아무 말도 안해? 기껏 인사해줬더니.. 피곤하다. 상경을 앞 둔 나이기에. 온 몸이 무겁고 아직 챙기지 못한 짐도 남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외로운 여자를 위로하러 집으로 들어간다. 외로운 여자.... 나도 외로운걸까? 아님 내가 엄마를 닮아 외로운 여자가 되어가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