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심리 02
유난히 추운 스물다섯의 겨울이다. 5년 전에 스무살이었던 내가, 이젠 스물다섯이 되어버렸다. 여전히, 5년 전과 같이, 내 인생은 지옥 같았다. 대학에 들어가 한 남자를 만났고 미친듯이 사랑했다. 그를 사랑했고, 그에게 내 모든 처음을 주었다. 그의 사랑 안에서 나의 20대는 꽃처럼 피어났고, 그를 위해 휴학을 하고, 그와 여행을 다니고, 그의 군대를 기다리고.... 그렇게 5년이 지났다. 꽃처럼 피운 내 사랑의 결과는... 그의 배신이었다. '그는 내 가장 친한 친구와 키스를 했다.' 이 문장으로 우리의 이별은 귀결되는 것이다. 거기에 '날 버리고'라는 단어를 넣으면 신파가 되는 것이고. 소문은 빨랐고 나와 그, 그리고 내 친구는 소문의 중심에 올랐다. 그는 내게 변명했다. 과 동기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의 배신이 드러났고, 나의 친구 아니 한 때는 내 친구였던 여자가 나와 자신 사이에서 선택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귀가 먹먹했고 어지러웠다. 5년 연애 끝이 배신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우스운 건 그가 날 택했던 것이다. 그 역겹고 메스꺼운 폭로전 이후 그에게서 온 문자는 '아무 사이도 아니였어. 난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걔가 다 한 거야. 여주야 나 좀 믿어줘.' 라는 내용이었다. 학교 페이스북의 대나무숲에 나와 그의 이야기가 올라오고, 주위의 부러움을 사던 연인이 갈라지는 건 단 3시간이었다. '헤어져'라는 문자에 그는 3시간 동안 미친듯이 연락해왔고, 3시간 그게 끝이었다. 그와 내가 헤어진 날은 우리가 사귄지 5년이 훌쩍 넘은, 1887일 째였다. 그의 연락이 끊기고 난 쫓기듯이 집으로 다시 내려왔다. 20년 동안 살면서 진저리가 난 곳에 내 발로 다시 걸어들어왔다. '여주야 어디야.... 보고싶어. 내가 다 잘못했어. 기다릴게. 너 마음 다 풀릴 때까지. 사랑해 최여주' 또 다. 내 이별통보에 연락이 끊겼던 그에게 한 달만이 연락이 왔다. 술에 취한 채로, 보고싶다며 전화기를 붙잡고 울었다. 그 후 그는 매일 나에게 기다린다는 말을 문자로 보내는 중이다. 믿어봐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그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모습이, 웃어주는 모습이 떠오른다. 평생 지워지지 않겠지. 그를 단념한다. 그의 생각이 날 때면 담배를 피고 싶다. 이 지긋지긋한 곳의 추위와 너무 잘 어울리는 담배 한 대면 그의 생각도 연기처럼 날아가버릴 것 같다. 너무나도 우스운 것은, 지금 그의 생각을 날릴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담배를, 내가 그의 권유로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길에 쪼그려앉아 흩어지지 않는 그의 생각을 조각내려고 노력한다.
"여주...누나? 누나 맞죠? 그 옆집 사는! 아닌.....가..?" 미성같으면서도 굵은 목소리, 그리고 내 머리 속에 조각조각 흩어져있던 그의 생각을 한 번에 없애버리는 낯익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드니 어디서 본 것 같다. 노란 교복이 잘 어울리고,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누구세요?" "누나.... 울어요? 왜 울어요? 누구한테 맞았어요? 설마 삥 뜯겼어요? 아줌마한테 쫓겨났나?" 그 애의 말에 흠칫 놀라 눈을 비비니 축축하다. 추워서 운 건지 아님 그의 생각 때문에 운 건지 헷갈린다. 그 애의 목소리 때문인가? 조금 어지럽다. "누구시냐고요. 저 아세요?" "헐 누나 저 까먹었어요? 아 뭐야! 나 동혁이!! 이동혁!! 누나 옆집!" "옆집 초딩....?" "뭐가 초딩이예요! 이제 고딩인데!" 고등학생이라며 웃음을 터뜨리는 그 애의 모습이 참 신기하다. 넌 행복하구나. 내 불행을 너가 먹어치워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누나 이제 담배 안 피네요?" "응. 끊었어." "오~ 대단하네요. 끊기 힘들다는데, 잘했어요! 건강에도 안 좋은데! 추운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금연한 나에게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는 그 애의 손길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날씨가 추웠기에... 아니면 그 애의 손이 따뜻해서...? 빙그레 웃어버렸다. " 너가 알아서 뭐하게, 따뜻한 밥이라도 사주게? 초딩, 너 이제 몇살이냐?" "초딩아니고 고딩이라구요~ 저 열여덟이예요. 누나랑 럭키세븐 7살 차이. 배고파요? 진짜 아줌마한테 쫓겨났나보네... 내가 뭐 사줄까요? 나 엊그제 용돈 받았는데" "진심이야? 나 막 비싼 거 먹어도 돼?" "용돈 받았다니까요~ 아무거나 먹어요. 오랜만에 여주 누나 봤으니까... 사 줄 수도 있어요" 애가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나...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애의 표정은 밝았다. 우리 이렇게 친했나 싶을 정도로 그 애는 날 반겨주었고, 집에 내려온 지 3일 만에 난 비로소 집에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나... 여기서 먹고싶어요.....?" "응! 왜? 너무 비싼가? 그러면 다르...ㄴ..ㄷ" "아니요! 여기 해요 여기! 제가 사줄게요!" 일부러 비싼 음식점을 골랐다. 사색이 되는 그 애의 모습이 귀여워서. 그리고 가자고 하며 내 손을 잡아끄는 그 아이의 떨리는 손끝이 보기 좋아서. 거기다 꼴에 남자라고 자기가 사겠다며 큰소리 치는 그 애를 골려주고 싶기도 하고. 이상했다. 자꾸 웃음이 나오고, 좀 더 그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 남자 때문에 힘들어했던 모든 기억이 다 날아가버린 듯 했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그의 잔상을 이 아이가 깨트려주는 듯 했다. 마음 한 구석 유리창이 깨지듯 쨍그랑하는 소리가 났고 미친듯이 무언가를 먹고 싶었다. 그와 이별한 후 전혀 돌아오지 않던 식욕이 내게 무서운 기세로 다가와 아마어마한 허기를 안겨줬다. "저는 씨푸드 파스타랑, 김치목살필라프, 목살 스테이크랑... 음료는 청포도 에이드요. 넌 뭐 시킬래?" "같이 먹는 거 아니예요....?" "뭐래. 나 혼자서 다 먹을건데?" "저기 누나.... 생각보다 되게 많이 드시네요... 음.... 저는... 그냥 김치필라프요... 음료는 안 먹어요" 그 아이의 주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하며 돈을 세어보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감정을 느낀 건 그와의 이별 후 처음이다. "야 됐어. 너 고기 먹어 고기. 애는 목살 스테이크랑 코카콜라로 주세요." "아니...! 저는 그거 안 먹을래요! 그게 제일 비...싸...ㄴ..ㄷ 아니 그게 아니고 전 지금 배불러요!" "야 잔말 말고 그냥 먹어 내가 사줄테니까." "왜 누나가 사요! 내가 사준다 그래서 여기 온 건데!" "너한테 얻어먹을 거였으면 이런 데 오지도 않았어. 그냥 나 배고파서 온 거야. 그리고 초딩, 난 이런 데 말고 떡볶이랑 순대 이런 걸 더 좋아한다? 그니까 내가 좋아하는 거 사줘 오늘은 그냥 먹고." "그래도 그런 게 어디있어요. 내가 사주기로 했는데......."
속상하다는 듯이 얼굴을 구기는 그 애의 모습이 퍽 귀엽다. 꽤 높은 콧대에, 날카롭...다고 말 할 수 있는 턱선. 동글동글하던 옛날 모습과는 꽤 다르다. 많이 컸네. 얼굴을 구기다가도 금새 생글생글 웃으며 본인의 근황을 알리는 모습은 영락없이 고등학생의 그 얼굴이다. 그러다가도 집에 왔으면 얼굴도 좀 보여주고 그러지 라고 말하는 모습에서는 애가 정말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의문도 든다. "... 근데 여주 누나 있죠. 음... 그니까.... 음...... 진짜 다행인 것 같아요!" "뭐가?" "음... 그니까.... 뭐냐면... 제가 오늘 고백을 받았거든요. 근데 요즘 외롭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해서 받아줄까.... 하다가 안 받았는데... 진짜 다행이죠!" "그게 뭐가 다행이야? 야 그리고 너가 뭐 외롭다고 어이구 난리다 난리." "그럼 이게 다행이죠! 그럼 불행이예요? 제가, 이동혁이, 짝사랑의 아이콘인 제가! 여자친구가 생길 뻔 했다니까요?" "무슨 소리하니 정말... 밥이나 먹어. 고르곤졸라랑 이런 거 시켜줄까?" "아뇨. 저 진짜 배불러요. 누나 정말 잘 먹는다. 아줌마 말로는 편식 되게 심하다고 하던데." "야 초딩, 근데 너 아까부터 왜 친한 척이야?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되게 이질감 드네. 너가 언제부터 나한테 누나누나 했다고 그러냐?"
그 애의 표정이 싹 굳었다. 생글생글 웃던 웃음과 동글동글한 목소리가 사라지고 단지 그 아이의 무표정만이 남은 그 애의 얼굴은.... 내가 기억하던 초딩의 모습도, 내게 수다 떨던 고등학생의 모습도 아니었다. 심장 떨릴 정도로 저릿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누나가 원칙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아줌마가 그래서요. 그리고 혹시.... 존댓말 쓰면 누나가 날 좋게 볼까 해서요. 그냥 그래서요. 친한 척은... 누나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어요. 밥 사준다고 한 것도 누나... 너무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누나 방학 때 내려와도 얼굴도 안 비추고 그냥 가버렸잖아요. 제작년이랑 작년은 누나 여행가서 내려오지도 않았고... 왜요? 불편해요? "아니... 괜찮아..." 당황스러웠다. 준비한건지 아니면 생각한 대로 말하는 건지. 틀린 부분 하나도 없는 말인데 기분이 이상했다. 그 아이의 웃음, 목소리, 나를 둘러싼 모든 게 사라지고 그 아이의 웃음과 그 앞에 멀뚱히 서있는 나만 남은 듯 했다.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토할 것 같고 어지러웠다. "그리고 누나 있죠. 제 이름 초딩이 아니고, 동혁이예요. 이동혁." "..........." "누나, 오랜만이예요."
〈소금> 오늘은 좀 깁니다. 내일 여행을 가서ㅎㅎ 내일까지 글 못 올려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