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랑 vs 첫 사랑
w. 비이
"여주야 아는 애야?"
내 입에서 민형이 이름이 나오자 도영 선배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우리 동아리가 봉사 동아리이다 보니 그다지 인기가 있는 편이 아니었기에 선배들 입장에선 입부하려고 오는 신입생 한명 한 명이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게... 같은 고등학교 애이긴 한데... 선배...근데 제가 재수를 했잖아요? 그래서... 그러니깐..."
"김여주 선배 하고는 같은 고등학교 선후배였어요."
내가 우물쭈물 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이민형이 말을 이었다. 그 덕에 도영 선배의 눈가가 더욱 초롱초롱 거렸다. 나와 아는 사이라고 하니 확실히 입부 시켜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엿보이는 것 같았다.
"이야, 그럼 입부해야지. 자자, 어서 입부원서 작성하시고요."
마치 영업사원이라도 된 것마냥 둘을 중앙테이블에 앉히고는 친절하게 볼펜도 손에 쥐어주었다. 이민형과 이동혁이 빈칸을 하나 하나 채워나가는 모습을 보며 내가 그들에게 강한 눈빛을 보냈다. 너네, 나랑 불편하게 이 동아리 들거야? 정말 이 동아리에서 나랑 동기할거야? 어?
하지만 내 그런 간절한 눈빛이 그들에게 닿을리 없었다. 그랬기에 난 결국 도영 선배 팔에 팔짱을 끼고 그를 잡아 끌었다. 그 순간 고개 한번 안 들 것 같던 이민형이 고개를 들어 나와 동영 선배를 짧게 쳐다봤다. 하지만 다시 입부원서에 시선을 두는 모습에 도영 선배를 끌고 동방을 나왔다.
"쟤네 입부하면 나랑 얼마나 껄끄럽게요. 나는 그렇다고 쳐요. 난 이제 면역이 생겨서 동기들이랑 동갑이란 마음으로 지낼 수 있지만 쟤네는 얼마나 힘들꺼냐고요. 선배였던 나랑 동기로 지내야 하는데 어후, 쟤네 착해서 그런짓 못해요. 정말, 난 괜찮지만 쟤네를 생각해서라도 이 입부서는 찢어버..."
"저는 괜찮은데요?"
문이 살짝 열려있었던 거였는지 이민형이 내가 하는 말을 다 들은 것 같았다. 동방 문을 활짝 연 이민형이 느린 걸음으로 나와 도영 선배가 있는 곳 가까이로 다가왔다.
"우리만 괜찮으면 되는 거니깐 아무 문제 없는거죠?"
이민형의 시선은 내가 아닌 도영 선배를 향해 있었다. 애초에 내 의사는, 아니 나란 사람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는 듯. 그러고보니 쟤 졸업식날 내 안부 물었다고 했는데, 정수정 뻥친거 아냐?
"아니 녕아, 잘 생각해봐. 너 껄끄러워서 나랑 어떻게 지내려고. 호칭, 그거... 너 생각보다 힘들다?"
내 말에 그제야 내게 시선을 둔 그였다. 살짝 사선으로 올라간 입매로 웃으며 날 보는 그의 모습에 내 말을 알아들었나싶어 조금 안심이 되려는 찰나,
"난, 괜찮은데. 김여주랑 친구하는거."
라는 개소리를 짓껄였다.
첫사랑 vs 첫사랑
"개자식! 개자식!"
"그래서 결국 진짜 입부한거야?"
"그렇다니깐. 이민형만 했게? 이동혁도 세트로 함께야."
"걔, 그렇게 막나가는 애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진짜 낯설다."
정수정은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다는 듯 벌써 3번째 되 묻고 있었다. 그래 직접 당한 나도 안 믿기는데 전해 듣는 넌 오죽하겠니. 그렇지만 이 모든게 믿기지 않게도 사실이었다.
내가 다른 애들이랑은 다 친구 먹는다 이거야. 그치만 이민형은 안된다고. 당연히 이동혁도 안된다고. 오랫동안 선후배로 지냈던 애들하고 어떻게 친구로 지내라고.
"그냥 동아리 안 가면 안 돼? 같은 과 아닌게 어디야. 과는 무조건 마주쳐야 하지만 동아리는 선택사항이잖아. 니가 안 가면 그만이지, 뭐."
"그게..."
나도 사실 그 생각을 안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몇 주 활동해서 쌓인 정도 정이라고 선배들과 동기들과 너무 친해졌기에 쉽게 끊어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뭐,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피해야 해? 라는 몹쓸 오기가 발동해 그만두기 싫었다. 그저 이민형만 나가주면 되는거였다.(이동혁은 세트로 같이 나가줄거라 굳게 믿는다!) 그랬기에 이민형을 동아리에서 몰아내는 게 내겐 최적의 상황이었다.
내가 우물쭈물 하자 수정이가 제 앞에 놓인 자바칩을 쓱쓱 다 빨아 먹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이민형 말야."
"응?"
"나 사실 고등학교때도 조금, 정말 아주 조금 생각해보긴 했는데 말이야."
"무슨말인데 이렇게 뜸을 들여?"
"걔, 너 좋아하는 거 아냐?"
"푸흡-"
이민형의 '난, 괜찮은데. 김여주랑 친구하는거.' 에 이은 올해 들은 최고의 개소리였다. 마시던 음료마저 뿜어내며 정색하던 날 보며 정수정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앗, 더러워. 김여주 정말, 칠칠맞지 못한 건 알아줘야해. 말이 그렇단 거지, 그렇게 격하게 거부 반응을 보여야 겠니?"
"이건 또 무슨 신종 개소리야. 걔가 날? 그런 애가 매번 재현쌤 드릴 선물 심부름 해줬겠니? 병신도 아니고."
"하긴 뭐... 그렇긴 한데 민형이가 까칠해서 말 한번 걸기 힘든 애였잖아. 그런데도 니 부탁은 툴툴거리면서도 다 들어준게 좀 이상하긴 해서."
"이웃사촌이었잖아. 이웃사촌. 니 말대로 옆집살아서 특혜 받았나보지. 그럼 뭐하냐, 지금 꼬라지 봐. 나랑 맞먹으려고 하는데."
"하긴, 이민형이 뭐가 아쉬워서."
"야!"
한껏 서운함을 담아 노려보자 정수정이 농담이라며 깔깔거렸다. 어휴, 저것도 친구라고 이 상황에 대해 상담하러 온 내가 멍충이지, 멍충이야.
"암튼 결론은 하나네. 너 그 동아리 나오기 싫은거지? 정도 들었고?"
오, 말도 안했는데 다 꿰뚫고 정수정 내 친구 맞네, 맞아. 금세 마음이 바뀌는 건 내 전매특허니깐.
"응. 그리고 과 친구랑 같이 들었단 말이야. 동아리 나가지 말자 그러면 걔한테 좀 미안할 것도 같고 이제와서 다른 동아리 가서 적응하는것도 좀 귀찮고..."
"그럼 그냥 부딪혀. 더 불편한 사람이 나가떨어지겠지. 그게 너일 수도 있지만, 민형이가 될 수도 있잖아. 좋게 좋게 생각해. 내가 알던 이민형은 성격이 딱 부러지고 정도에 어긋나는 걸 싫어하는 애였는데 걔라고 너랑 이렇게 지내는 게 편하겠냐? 그저 말뿐일 수도 있어."
"그치? 녕이가 그렇게 까칠하긴 해도 막 어? 버릇없고 그런 애는 아니었는데. 그치? 지가 나가겠지? 어?"
"우리가 알던 이민형이라면?"
그래, 우리가 알던 이민형이라면 이민형이 나가는 쪽이 정답에 가까웠다. 난 곰처럼 잘 버티면 되는 거였다. 이민형이 입에 달고 살던, 미련 곰탱이가 빛을 발할 차례였다.
난 정수정 말에 도박을 걸어보기로 했다.
첫사랑 vs 첫사랑
풀강이 있는 날은 몸도 마음도 지쳐버리곤 만다. 전필에 타과 교양이 적절하게 섞여있어 숨 쉴틈 없이 정신 없이 강의실을 옮겨 다니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나가버렸다. 맨정신으로는 지내지지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동지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 옆엔 나처럼 만신창이가 된 승완이가 함께였다.
"여주야, 우리 밥도 못먹은 거 알아?"
"헐... 그러게 아까 무지 배고파서 강의실 뛰쳐나가고 싶었는데 그거 견뎌내니깐 또 괜찮더라."
"이러다 탈나지, 탈나."
"뭐라도 먹고 집에 갈까?"
"그럴까?"
하루종일 굶은 배를 위로하고자 학식말고 학교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며 그렇게 승완이와 팔짱을 낀 채 교문을 벗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밥집을 찾아다녔다. 그때 승완이와 내 폰으로 동시에 카톡이 왔다.
"동아린데?"
"그러네. 오늘 술모임 있나봐. 하루종일 동방 못 가서 몰랐네."
마침 동아리 모임이 있는 술집 인근이었다. 그래서 우리 둘은 별 고민 없이 술집으로 향했다.
술집으로 들어서자 우릴 알아본 선배 동기들이 손을 흔들며 자리를 알려 주었고 둘다 헤실헤실 웃으며 그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자리에 가까워질수록 승완이와는 달리 내 얼굴은 점점 굳어져갔다.
이런데 쓰라고 있는 미련 곰탱이 아니잖아... 버티라고 있는 미련 곰탱이잖아...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느라, 이민형의 존재를 완전 잊고 있었다. 동아리 모임에 이민형이 있을거라는 사실을 아예 간과했다.
농담아니라 문워크로 다시 나갈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내 이름이 크게 불렸다. 그것도 예상치 못한 사람의 입에서.
"여주야, 여기!"
이동혁 이 개쉐키.
이민형보다 널 먼저 조진다.
신규 부원인 이민형과 이동혁 그리고 나의 관계를 아는 도영 선배만이 놀란 표정으로 나와 동혁이를 번갈아 봤고, 나머진 호기심 담은 눈으로 우릴 응시했다.
"아는 사이였어?"
"네, 뭐. 조금요. 히힛."
3학년 태일 선배의 물음에 동혁이가 그 특유의 헤실거리는 표정으로 웃으며 여전히 날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당연하듯 그 옆엔 이민형도 있었다.
너 학기말에 이민형 못지 않은 차가운 모습으로 나 대했던 거 잊었나 보다?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동혁이 네가 부르는 자리로 갈리가.
내 자리는 최애 선배인 도영 선배 옆자리여야했다. 뭐 다른 목적도 있고. 이 사단을 어떻게 할 거냐 조금 타박도 할 생각이었다. 하극상이고 뭐고 지금 그런걸 따질 재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난 왜 지금 이민형 앞자리?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승완이가 새로 들어온 동기(?)랑 친해지고 싶어서 막무가내로 날 잡아끌고 동혁이가 비워둔 자리로 가 앉혔기 때문이지.(너의 눈치없음에 치얼뜨.)
하긴 승완이를 원망 할 입장이 아니다. 어젠 수업 마치자마자 수정이 만나 하소연 하고 오늘은 수업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아직 아무런 말도 못해준 내 탓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일이 빨리 일어날 줄 누가 알았냐고.
"난 손승완이라고 해. 동아리 동기들이 많이 없어서 더 반갑다, 야. 여주랑 아는 사이라고? 여주 추천으로 들어온 거야? 여주야 넌 왜 이런 훈남 친구들이 있다는 걸 말 안했던 거야."
사교성 좋은 승완이의 면모는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 잘 알아, 너 사교성 좋고 성격 끝내주는 거... 그러니깐 이제 그만 플리즈... 제발...
"고등학교때부터 잘 알고 지냈지."
여전히 헤실거리며 말하는 이동혁을 한 번, 그리고 그 옆에서 방관 중인 이민형을 향해 한 번 사나운 눈빛을 쏘아주곤 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원샷을 했다. 수지 광고가 생각나는 밤이구만.
반샷 안 돼요, 반샷 안 돼요. 그래, 오늘 같은 날은 여자는 원샷이지. 한입에 털어주마!
깔깔대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이미 절친 되신 동혁이와 승완이를 보며 원샷. 그런 날 나른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민형이 싫어, 또 원샷. 그렇게 빈속이라는 것도 잊은 채 소주잔을 들었고, 마시는 족족 원샷을 했다.
평소보다 취기가 빨리 올라왔다. 빈속에 마셔서인지 속도 부대꼈다. 찬바람이라도 맞으면 좀 나아질까 해 난 조용조용 자리에서 일어서 건물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한번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 속은 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속을 게워내면 좀 나아질까 하여 화장실에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데 다리가 휘청거리며 꼬였다. 머리도 어질거리는 게 이미 한계에 도달했음을 느꼈다. 제발 화장실까지만 잘 도착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발을 옮겨보려 했지만 몸이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때였다. 참을 수 없는 토기가 올란 온 건.
우욱, 하며 어쩔 수없이 길거리에 실례를 범하고 있는데 내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선 배중 한명이거니 편하게 생각하고 토하는 모습 이미 들킨 거 난 속을 다 궤워내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선배도 승완이도 아닌, 이민형이었다.
"...니가 왜 여기 있어."
"자꾸, 미련하게 마시지. 누가 미련 곰탱이 아니랄까봐."
손수건을 꺼내 내 입가를 닦아내는 손길이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고등학교때 알던 이민형의 모습같이 느껴져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차올라 눈가가 시큰거려왔다.
"그래, 막 말 까라, 까. 이씨...내가 누구때문에 이렇게 마셨는데."
"나 때문이지."
"그래, 잘 아네! 그럼 동아리 안 나오면 되겠네!"
"난 여기 맘에 드는데?"
"야!"
약이 올라 민형이 정강이를 걷아찼다. 술기운이라 헛발질이었기에 그다지 아프지 않았던건지, 별다른 아픈 기색없이 이민형이 흙이 묻은 바지를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진짜 미련곰탱이는 나였는지도 몰라. 이젠 그렇게 안 살아."
그리고 난 이후, 필름이 끊어지고 말았다.
@@
1.
재현쌤 선물 심부름 했던 미녕이... 여주 말대로 병신 맞고요...
이제 그렇게 살지 않겠죠?ㅋㅋㅋ
2.
이 글을 쓰려고 맘 먹게 한 대사가 오늘 나왔네요 ㅋㅋㅋ
그래서 특별히 굵게 표시했는데 눈치 채셨으려나?
'난, 괜찮은데. 김여주랑 친구하는거.'
꺅!!!!! 혼자 좋아죽음 ㅋㅋㅋ
3.
4편도 초록글에 올랐어요 ㅠㅠ
(심지어 1페이지 ㅠㅠ)
매편 초록글 올려주시는 내 님들 감사해요 ㅠㅠ
♥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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