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ody Romance
W.DKN
D.
일주일에 단 한 번뿐인 휴일인지라, 오후 내내 소파에서 뒹굴 거리던 성규가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오늘만큼은 그냥 집에 들어가서 편히 쉴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역시 편하기는 왠지 모르게 여기가 더 편했다. 사람 하나 없는 휑한 클럽의 내부는 평소보다 배는 더 넓어 보인다. 평소엔 넓게 자리를 차지하던 원형 테이블도 모두 한곳으로 밀어두어서 그런지 더 그래 보이는 것 같았다. 누워 있기만 했더니 허리가 찌뿌둥해 몸을 일으켰다. 깜깜한 어둠이 잔뜩 내려앉은 룸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겨우 스위치를 찾아 누르자 빛에 익숙지 않던 눈이 확 찌푸려진다.
“아, 맞다.”
어제 진석이가 대신 좀 버려달라던 음식물 쓰레기. 알바생 주제에 사장을 부려 먹다니, 이거 너무한 거 아냐? 봉지에 예쁘게 싸져 있는 음식물 쓰레기를 한 손에 쥐고 문을 열자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인정사정없이 옷 속을 파고든다. 얇은 후드집업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 성규가 뛸 태세를 취하는데, 옆 골목에서 불쑥 끼어든 차 탓에 멈칫했다. 차창에 비치는 익숙한 얼굴에 다리가 우뚝 멈춰 선다.
“…….”
“…오랜만?”
순간 쓰레기봉투를 든 손으로 인사를 할 뻔한 성규가 얼른 등 뒤로 감추며 빙긋 웃어 보였다. 못 본새 더 수척해진 얼굴. 지금 영업하죠?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가게 입구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우현의 뒷덜미를 얼결에 붙잡은 성규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영업 안 해.
“원래 월요일은 휴무인데. 몰랐구나?”
갑작스런 우현의 등장에 들뜬 성규가 우현의 손목을 이끌며 자리로 앉혔다. 우현의 앞에 엉덩이를 붙인 성규가 팔짱을 껴 테이블에 기대고는, 찬찬히 우현의 얼굴을 뜯었다. 눈도 내 스타일, 코도 내 스타일, 입도 내 스타일이다. 메마른 저 입술을 당장에라도 머금어 축축할 정도로 젖게 하고 싶었다. 아까부터 뭘 찾는지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우현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
“술 좀 사주세요.”
“……?”
“제가 지금 돈이 없거든요.”
돈도 없으면서 술은 왜 마시러 왔대? 불퉁한 목소리에 우현이 부스스한 웃음을 터뜨린다. 얼굴 하나로도 그 정도 값은 하지 않나? 술에 취해 그런지 혀가 꼬여서는 히죽히죽 웃어대는 우현이 퍽 귀여워 따라 웃고 말았다. 웃고는 있지만, 성규는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반말한다더니, 따박따박 존칭하는 것 하며, 술값 하나 지불하지 않고 한 잔, 두 잔 마시던 게 저 혼자 벌써 맥주 네 병째. 어, 또 비웠다. 잔에 얼마 따라지지 못한 술까지 입으로 탈탈 털어 넣은 우현이 빈 술병을 들어 흔들었다.
“딱 한 병만 더 마시면 안 돼요?”
“어, 안 돼. 여기 사장이 엄청 짠돌이라 이것밖에 못 줘.”
“그러면 그쪽은 여기 알바생?”
…응.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내뱉은 성규가 오징어 다리 하나를 집어 물었다. 너 나보러 왔지. 성규의 말에 불쑥 고개를 드는 우현. 그냥 술 먹고 싶어서 들른 거거든요? 다시금 고개를 푹 숙인 우현이 무어라 웅얼거렸다. 이어지는 정적에 말없이 술병들을 치우던 성규에게로 이번엔 우현이 먼저 말을 꺼낸다. 근데요, 뭐 하나만 물읍시다.
“진짜 나한테 관심 있어요?”
푸하하. 웃음이 터졌다. 아 진짜 귀엽다. 한참을 깔깔 웃는 성규에 빈정이 상했는지 빈 맥주병을 집어 들고 나오지도 않는 술을 잔에 털어 넣는다. 그동안 엄청 센 척하더니, 진짜 순둥이네. 겨우 진정됐는지 오징어 하나를 집어 문 성규가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그래서 관심 있냐구요 없냐구요. 애꿎은 잔만 계속 만지작거리는 우현이 귀여워 자꾸만 웃음이 터진다. 나는 말이지,
“너한테 관심 무지 많아.”
“…….”
“그니까 이제 그만 튕기고 내 맘 좀 받아주지?”
답도 아직 못 들었는데, 벌써부터 목구멍에서 쓴맛이 올라왔다. 고요하기만 한 스피커에서 엄청난 사운드의 음악이 쿵, 쿵 흘러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잘 깎여진 밤톨마냥,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이 빠끔히 모습을 드러낸다. 생긴 건 멍멍이 마냥 귀엽게 생겨서는, 하는 짓은 고양이처럼 왜 이렇게 앙칼진지.
“웬만하면 그 맘 접죠?”
마시고 있던 술보다 독한 말이 가슴을 쑤신다. 예상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성규가 고개를 들어 우현의 눈에 시선을 맞춘다.
“그냥, 나만 좋아하는 것도 안 돼?”
“…잊었어요? 나 결혼할 여자 있는 거.”
아,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우현이 외투를 챙겼다. 여자든, 남자든 난 돈 많은 사람이 좋거든. 이 가게 사장님이면 몰라도, 일개 알바생이랑은 못 사겨요. 내내 축 처져 있던 입꼬리가 그제야 위로 향한다. 따라서 웃어버린 성규가 제 몫으로 남아있던 술잔을 들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천천히 잔을 내려놓고, 들어 올렸던 고개를 내린 곳엔, 조금 전만 해도 있던 우현 대신, 썰렁하게 비어있는 의자뿐이었다.
Bloody Romance
W.DKN
E.
갈증이 일었다. 물을 달라고 재촉하듯, 여러 손길이 텁텁한 목구멍을 마구 두들기는 것 같아,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부하게 일어난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살핀다. 침대 밑으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슬리퍼를 끌어다 신고 방문을 열었다. 아직 잠에서 덜 헤어 나온 정신에,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냉장고 앞으로 향한 우현이 생수통을 꺼내 들었다. 차가운 물이 속으로 들어가자,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길게 늘어진 소파 그림자로 짐작하건대,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출근해도 모자랄 판에, 해가 중천에 뜬 지금에서야 잠이 깨다니 저가 생각하기에도 대책 없었다. 연락 하나 없는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우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째는 거 확실히 째자, 하는 심정으로 소파에 드러누워 티비를 켰다. 평소 이 시간 즈음엔 티비를 킬 일이 없어 무슨 프로그램이 하는지조차 모르지만, 무작정 채널을 돌렸다.
‘…오랜만?’
‘너한테 관심 무지 많아.’
‘그니까 이제 그만 튕기고 내 맘 좀 받아주지?’
부스스한 붉은 머리칼이 불쑥 생각난다. 전원버튼을 누르자마자 다시 고요하게 내려앉은 정적에 우현이 자세를 고쳐 누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빨개서 그런가, 자꾸 생각나네. 처음엔 경계해야 할 남자에 불과했던 남자가 어느덧 시도때도없이 불쑥불쑥 생각나는 존재가 되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요새 들어 그 클럽에 발을 자주 들인 건 사실이다. 저 좋다는 무수한 여자들 말고, 왜 하필 남자가 떠오를까.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곰곰이 생각해봐도, 답은 하나였다. 그 남자가 싫지 않으니까.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은 어느덧 진실이라는 탈로 바뀐 지 오래였다. 덫에 걸려버렸다. 우현의 가슴 속에 위치한 마음의 덫. 머릿속에 구불구불한 실이 잔뜩 생기며 이리저리 엉키었다. 발코니 유리를 뚫고 거실을 쨍쨍히 내리쬐던 햇볕이 구름에 가려 자취를 감춤과 동시에, 밝디밝던 거실에 일순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 남자가 널 찾아왔었다고?”
남자의 얼굴의 반을 덮고 있는 검은색 두건 탓에 제 얼굴이 보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성규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예상했던 일 아니었어? 불투명한 눈빛의 성규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색 두건 속에 가려진 얼굴은 과연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일말의 도움이라도 얻을까 하여 오래간만에 들렸건만, 여전한 남자의 태도에 성규는 이곳에 들른 걸 후회하는 중이었다.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뭘 두려워하고 그래.”
더는 그 남자에게 구속받고 싶지 않다고 했었지? 거의 다 쏟아지고 얼마 남지 않은 모래알갱이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자꾸만 웅웅거리는, 불필요한 소음이 귓가를 괴롭혔다. 꿈쩍 않는 남자의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성규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 다 됐네요, 이만 가볼게요. 도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안되는 게. 속으로만 뾰족한 말을 내뱉은 성규가 거칠게 의자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잡았다.
“네가 피하면 피할수록, 그 남자는 더 널 갈구하게 될 거야.”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이 멈칫한다. 천천히 뒤를 돈 성규가 여전히 정자세로 앉아있는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해결책이 뭔데요. 그건 다음에 찾아오면 말해주지. 흥, 콧방귀를 뀐 성규가 거세게 문을 닫고는 위에 달린 '고해성사실' 이라는 애꿎은 푯말만 툭, 건드렸다. 잠까지 마다하고 왔건만, 역시 해답은 얻지 못했다. 다음 차례였던지 웬 여자가 얼굴을 가리며 방으로 들어간다. 보드라워 보이는 검은색 머리카락 뒤로 흉측한 자국이 짧은 찰나에 성규의 시선을 스쳐 지나갔다. 제 손짓에 의해 옆으로 비뚤어진 푯말을 묵묵히 바라보던 성규가 천천히 걸음을 뗐다. 저마다의 이유로 목에 징그러운 잇자국을 가진 채 고해성사를 하러 오는 이들 모두는, 성규와 마찬가지로 뱀파이어였다. 점점 멀어지는 건물을 뒤돌아본 성규가 온몸에 내려앉은 피로감을 추스르며 다시 정면을 향했다.
“오늘도 허탕이야.”
ㅡ거기 나름 괜찮다니까. 네가 불신해서 그래.”
“얼씨구, 네가 과하게 신임하는 건 아니구?”
ㅡ믿기 싫으면 믿지 말든가. 다음에 김재규가 또 찾아오면 나 불러.
“네가 퍽이나 오겠다.”
ㅡ나 한국 들어왔어.
뭐!? 지하철 안의 이목이 모두 성규에게로 쏠린다.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인 성규가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언제? 지난주 주말에. 왜 말 안 했어? 이번엔 답을 않고 묵묵부답인 수화기에 성규가 다시금 물으려는데 수화기 건너편에서 뒤늦은 답이 들려온다. 말하면, 네가 가만히 놔뒀겠어? 익숙한 정거장 이름이 흘러나오자 성규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일단 가게로 와. 뒤로 이어지는 말을 가뿐히 무시한 채 전화를 끊자,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린다. 어지럽게 늘어진 생각들을 잽싸게 지워낸 성규가 핸드폰 액정을 만지작거렸다. 하여간에 말은 지지리도 안 듣지. 출구로 들어서자마자 훅 끼쳐드는 차가운 바람에 워머를 코끝까지 밀어 올린 성규가 물에 젖은 휴지처럼 축축한 회색빛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마 안 가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빗방울을 보며 성규가 눈을 감았다. 마음속 한구석에 박혀있던 먹구름 떼가 서서히 중앙으로 흰 구름을 몰아내며 들어왔다. 갑작스레 내리는 비에 우산도 없이 허둥지둥 뛰어가는 사람들 사이로,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성규의 마음속에도 비가 쏟아져 내렸다. 슬며시 손을 내민 성규의 손바닥 위로 우수수 쏟아지는 빗줄기. 멍하니 그 빗줄기를 바라보던 성규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발을 떼지 않았다. 오랫동안 비가 퍼부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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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아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암호닉들 다 기억하고 있어요 ㅎㅎ~
연재는 3~4일에 한번씩 정도 할 것 같아요..! 기다려 주세요 ㅠㅠ~..